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90화
아수라를 쫓아 온 티리온은 바로 아스타로트와 나란히 선 김건을 발견했다.
일단은 둘 다 아는 얼굴이다.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김건과 아스타로트는 잠깐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하라고 아스타로트가 턱짓을 하자 김건은 피식 웃었다.
“전 세뇌당하고 있어요.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형형한 눈으로 그런 말을 한다.
납득할 순 없지만 티리온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스타로트를 바라보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난 그저 벨제불 님의 명령에 따르는 마인 나부랭이일 뿐이거든.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아스타로트는 킥 웃으며 티리온을 가리켰다.
“지금 우리는 너희 편이라는 거지.”
김건은 시선을 전방으로 향했다.
“일단은 저걸 어떻게든 한 다음에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세 전사가 신을 추종하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아수라는 바로 깨달았다.
눈앞에 선 자들이 이 행성,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뿜어내는 투기에 티아마트의 추종자마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재생 능력은 어떻게 하지?”
“마기로 늦출 수 있어. 전신에 이물질을 집어넣어서 꿰매 버리면 아무리 재생력이 좋아도 별수 없지.”
“그럼 내가 사지를 잘라 놓지.”
“전 머리를 터트릴게요. 두뇌가 없으면 순간적으로 행동이 멈출 테니까요.”
신격을 눈앞에 두고서 잘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아수라는 알았다. 그들에게 정말로 그 말을 실천할 능력이 있음을.
‘저만한 전사들을 한 자리에서 접하는 건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만인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아수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희열에서 나오는 떨림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정찬을 앞에 두고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아수라가 무기를 꼬나쥐었다. 등에 걸친 금빛 휘광이 용솟음치고, 셀 수도 없이 빽빽하게 생성된 황금색 어검이 쏘아져 나가기 직전에,
누군가가 아수라의 어깨를 잡았다.
부동명왕의 가면을 쓴 아수라의 고개가 돌아간다.
“너 혼자 만찬을 즐길 셈인가?”
태극 무늬가 그려진 가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섯 개의 팔이 까딱인다. 빨갛고 파란 쌍도, 그리고 차크람과 금강저, 번개 모양의 법구와 수정 구슬.
티아마트가 강림하기 전, 그것을 막기 위해 출격한 인간들을 막아 세웠던 최초의 아수라.
그가 그곳에 있었다.
부동명왕의 가면을 쓴 아수라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나 혼자 처리하겠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도움이 아니야. 너 혼자 맛있는 걸 독차지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을 뿐이지.”
태극 가면은 그렇게 말한 뒤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의 신을 위한 의식을 잇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주문을 외는 태극 가면, 그것을 바라보며 부동명왕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앞의 인간들은, 모두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홀리쉿!”
티리온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아스타로트가 입버릇처럼 지껄였다.
“……음.”
이번에는 미래에서 돌아와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김건마저 놀랐다.
그는 아수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 강대한 힘을 추구한 나머지 지능을 잃어버린 마신, 티아마트.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다룰 지능이 없다면 그 위력이 급격히 줄어든다.
아수라는 그러한 단점을 메우기 위해 티아마트가 스스로의 일부를 잘라 만든 화신이었다.
지능이 없는 본체를 보좌할 일종의 보조 두뇌.
그 인격과 능력은 지금까지 티아마트가 집어삼켜 온 강대한 전사들의 정보를 근간으로 하며, 죽여 없애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티아마트로부터 새로운 아수라가 태어나 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그 정체를 아는 김건조차 한 번에 여러 기의 아수라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김건도 지금까지 반신급의 티아마트와 싸워 본 적은 없다.
따라서 일어난 현상을 보고 그 연유를 추측해 볼 수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아수라는 티아마트의 뇌에 해당하는 존재.
하지만 그 뇌가 처리해야 할 본체의 정보, 즉 크기가 커지면, 뇌 역시 같이 크기가 커지거나, 아니면 그 숫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으아악! 이건 뭐야!”
“아악! 살려 줘!”
수많은 괴물과 인간들이 싸우고 있는 진형 밖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폭음과 함께 시체와 피가 솟아오르더니, 그 안쪽에서 기이한 형태가 빠져나와 김건 일행의 앞에 착지했다.
피에 젖은 만다라가 얼굴 앞에 피어 있다.
다른 아수라들과는 다르게 근육 없이 앙상한 팔다리를 갖고 있다.
그 나무 막대기 같은 6개의 팔 위로 뾰족한 장창들이 가시처럼 솟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놈의 등 뒤에는 새빨간 깃털로 장식된 날개가 퍼덕이고 있었다.
“나도 끼워 줘. 이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군.”
또 다른 아수라가 세 명의 전사 앞에 섰다.
우우우우우!
세 신격이 내뿜는 압력에 중력이 배는 올라간 것 같았다.
공기가 뜨겁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력이 어깨 위를 꽉꽉 눌렀다.
“큭……!”
티리온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에이…… 농담이지?”
아스타로트가 실소를 흘리고, 이번에는 김건마저 침음성을 냈다.
부동명왕의 아수라가 말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사이좋게 셋이서 하나씩 가지도록 할까.”
의식을 마친 태극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만다라 가면이 새빨간 날개를 퍼덕이며 케케켁, 기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재미있겠는데.”
세 괴물들은 여유가 넘쳤다.
놈들은 사냥감을 몰아가는 맹수마냥 천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김건은 이를 악물었다.
시선을 전방으로 향하고, 무기를 틀어쥐며 옆에 있는 티리온에게 물었다.
“혹시 일 대 일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10초 정도는.”
“나도 그 정도가 한계일 것 같은데.”
아스타로트가 대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러는 너는?”
실력의 고하를 떠나 이 자리의 인물 중 가장 육체적 스펙이 낮은 것은 김건이다.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난 5초면 죽을걸.”
“그럼 끝이군. 빌어먹을.”
투덜거리는 아스타로트.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전방에 꺼낸 무형기를 회수하려 하지 않았다.
전투의 시간이 다가온다.
티리온이 빠르게 물었다.
“김건, 혹시 그 벨제불을 소멸시켰다는 기술을 사용할 순 없나?”
“가능은 한데 소용없을 겁니다. 연쇄 반응으로 완전히 분해할 수 있는 건 접촉한 대상 한정이에요. 폭발로 터져 나온 반마력이 화신들은 물론이고 주변의 괴물들도 모조리 쓸어버리겠지만…… 반신까지 날려 버리긴 힘들어요. 그리고 그 여파로 우리 쪽 전력은 모두 날아갈 겁니다. 아무도 주변에서 마력을 사용할 순 없을 테니까.”
반신생존, 아군전멸.
그것은 곧 인간의 패배를 뜻했다.
“……완전히 사태를 종료시키기 위해선 그걸 반신의 본체에 박아야 한다는 말인가?”
“네.”
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리온은 쓰게 웃었다.
“나 참. 말만 들었을 때는 엄청난 만능의 힘인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군.”
“그만 떠들어. 온다.”
아스타로트가 말을 잘랐다.
그의 앞에 무형기가 피어올랐다.
김건과 티리온 역시, 각자의 무기를 다잡으며 전의를 다졌다.
앞으로 일어날 약 10초 간의 싸움.
그 안에 끼워 넣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마지막 흔적이었다.
“죽어 보자고.”
아스타로트가 중얼거렸다.
모든 각오를 마친 세 전사가 전방으로 쏘아져 나가려 할 때, 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을 붙잡았다.
“그럼 삼 대 일은 가능한가?”
귓가를 녹이는 나른한 목소리.
네 번째 신격이 자리에 섰다.
클라우 베리스가 세 전사의 옆에 있었다.
“이건 또…….”
티리온은 더 이상 생각을 하는 걸 포기했다.
김건이 말했다.
“아무리 화신이라도 혼자서 둘을 상대하긴 힘들 텐데.”
“둘이 아냐.”
이번엔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얀 면사포를 걸친 여자가 옆에 섰다.
다섯 번째 신격.
기린의 화신.
“하나는 내가 맡는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
두 화신의 등장에, 이번엔 아수라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부동명왕이 한숨을 쉬었다.
“……듣던 대로군. 정말로 화신이 둘이야.”
만다라가면이 말했다.
“킥킥킥! 더 재미있어졌는데?”
태극가면이 기쁜듯한 웃음을 토했다.
“기린과 벨제불의 화신이라. 그분 앞에 진상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싸움이 되겠군.”
다섯의 신격과 셋의 전사.
그들이 내뿜어 대는 투기에 조금씩, 주변의 대기가 일그러졌다.
“재미없어.”
“흥.”
아수라를 포함한 전사들과 달리, 새로이 싸움에 끼어든 두 여자는 싸움을 즐기는 성격들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고조될 틈도 없이, 바로 행동을 시작.
좌우에서 각각, 희고 검은 광포가 전면부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앗!
극저온의 냉기로 적을 소멸시키는 엡솔루트 제로와 극한의 침식 부하로 물체를 분해해 버리는 납음부존지망.
아수라들은 두 갈래로 뻗어 나온 극대소멸공격기를 피했다.
지면이 얼음꽃과 함께 스러지고, 질질 녹아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케헷!”
만다라 가면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다.
부동명왕이 용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검고 흰 여자들이 잔상과 함께 사라지고, 아수라들과 두 화신이 상공에서 충돌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김건, 티리온, 그리고 아스타로트는 태극 가면의 아수라와 맞서 싸웠다.
카가가가강!
이쪽도 여섯 개, 저쪽도 여섯 개.
총 12개의 팔이 춤추며 불똥이 허공을 수놓았다.
던져진 차크람이 김건을 날려 버린다.
휘둘러진 얼음의 대도와 금강저가 티리온의 일격을 틀어막고,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무형기의 가시를 수정구의 보호막이 차단했다.
콰콰콰콰콰!
충격파가 사방을 덮쳤다. 진동이 땅을 기며 흐른다.
채찍의 남자가 물결처럼 몸을 휘며 싸웠다. 금발의 남자가 수십 개에 가까운 무기를 뽑아내며 각양각색으로 휘두르고, 검게 물든 마인은 온갖 가시와 촉수로 전신을 무장한 괴물을 부려 붉은색의 거인을 몰아쳐 갔다.
그리고 아수라는 무한재생과 신묘한 법구, 달인에 달한 기술의 힘으로 그들 모두를 상대했다.
튀어 오르는 불똥과 살기에 살이 에일 것만 같다.
검이 날고, 팔과 다리가 끝없이 교차하며 터져 나오는 파육음이 음악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육도(六道)의 하나,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이고, 무한한 싸움을 이어 간다고 하는 지옥.
그것은 그야말로 수라도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그 무한할 것 같은 싸움의 연쇄를 끊어 낸 것은, 어디선가로부터 날아온 초음속의 주먹이었다.
“컥!”
사각에서 쏘아져 들어온 주먹에 직격하자 늑골이 모조리 나갔다.
아수라가 신음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그 틈을 타고 지면으로 흘러 들어간 진동이 머리를 파괴.
그렇게 나타난 빈틈을 파고든 티리온이 여섯 개의 팔을 조각 냈다.
아스타로트가 뿜어낸 무형기가 수백 개의 가시를 뻗어 거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좋았어!”
아스타로트가 손을 쥐었다.
꽈득, 꽈득 소리를 내며 아수라의 전신을 꿰뚫은 무형기가 그 몸을 계속해서 쥐어짜 재생을 막았다.
태극 가면을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을 확인한 티리온이 컥- 하고 막힌 숨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얼굴이 검었다. 그는 겨우겨우 모자란 호흡을 보충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탈진에 빠진 김건을 일으키는 에디 슐츠를 발견했다.
방금 아수라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건 에디의 기습 덕분이었다.
격화된 싸움으로 에디는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덩치가 있으니 버티고 있는 것이지, 얼마 못가 그도 과다출혈로 쓰러질 것이다.
“전황은…….”
티리온이 힘겹게 물었다.
김건을 부축해 온 에디는 킁 하고 코를 풀어 피를 토해 내곤 말했다.
“나쁘지 않아. 배신자 새끼가 강령술로 죽은 베히모스를 일으켰어. 드래곤과 다른 기린의 권속들도 멀쩡하고.”
위급하던 상황이 안정을 찾았다는 말이다.
티리온은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지금이면 돌파가 가능하다.
기린과 벨제불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제야, 원래 목표인 거대 크립티드의 핵을 파괴할 수 있다.
에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힘들어.”
그는 벨제불의 화신과 맞서 싸우는 날개 달린 아수라를 가리켰다.
“저 자식이 오면서 극대소멸공격기를 가진 후위를 다 죽여 버렸어. 뭔진 모르겠는데 후위를 탐지하는 능력이 것 같아.”
눈어림으로 재 보았을 때, 크립티드의 핵은 거의 건물만 한 크기를 하고 있었다.
그만한 크기의 물체를 부수려면 후위의 화력이 필요하다.
큭, 하고 티리온이 이를 악문다.
“그럼 에디 교수님이나, 세라스가……!”
극대소멸공격처럼 완벽한 소멸은 필요 없다.
그저 부수기만 하면 되니, 에디나 세라스처럼 막대한 위력의 기술을 지닌 자는 그것을 파괴할 수 있으리라.
“난 무리야.”
에디는 거의 곤죽이 되다시피 한 주먹을 내보였다.
이제 보니 그 역시 극심한 중상을 입고 있었다.
베히모스의 발톱에 스쳤는지 커다란 자상이 상체를 가로지르고, 무리한 기술의 운용으로 안쪽에서 터져 나온 근육 섬유가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저 그 무식한 체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일격을 뿜어내긴 힘든 상태다.
“나뿐만이 아니야. 세라스는 베히모스한테 밟혀서 허리가 나갔어, 지금은 거동도 못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