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92화
분노를 토하는 붉은 괴물을 검은 괴물이 옭아맸다.
상황을 통제할 세 아수라가 모두 봉쇄당했다.
그리고 상공에서는 이미 막대한 투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크륵, 크에에에엑!”
인간들의 두뇌를 마구잡이로 쥐어짜 뽑아낸 투기.
비명 소리가 가득한 지옥의 광경이 반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층 빌딩조차 들어갈 수 있는 외눈이 사납게 깜빡이고, 길게 찢어진 입안에서 수백, 수천 개의 이빨이 뾰족한 끝을 드러냈다.
우우우우우우!
팔을 치켜드는 것만으로도 굉음을 토해 내는 거체가 완전히 자세를 틀었다.
내리치려는 주먹을 뒤로 당겨 앞으로 내지른다.
콰아아아아앗!
그 위력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파괴의 철퇴가 나아간다.
목표물에 적중하지도 않은 초기 가속 상태에서도 굉음이 터졌다.
그 끝에 집결된 투기가 맹회전하며 주변에 폭풍우가 몰아 닥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릉!
갑작스레 모인 구름에서 번개가 쳤다.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두들겨 맞으며 클라우가 올라탄 비공정을 제회한 모든 함선이 회피 기동을 시행.
급류에 떠내려가는 가랑잎마냥 출렁거리며 충돌 지점에서 벗어났다.
콰아아아앙!
공격이 날아가는 여파만으로 기압이 급증하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지면을 타격했다.
지표면에서 싸움을 이어 가던 모든 자들이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신음 소리를 내며 어깨를 누르는 충격을 견뎠다.
클라우는 그렇게 몰려오는 겁멸의 파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강제로 끌어올린 전투 본능과 파괴 충동으로 흐려진 이성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티아마트의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다.
화신이고 나발이고, 저것에 맞으면 당연히 죽는다.
남아 있는 본능이 몸부림쳤다. 죽고 싶지 않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당장 피하라고.
하지만 여기서 클라우가 몸을 피하면 억지로 만들어 낸 투기가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티아마트는 바로 공격대상을 바꿀 것이다.
‘멍청아! 그래 봐야 개죽음이야! 네가 여기서 죽는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이성이 부르짖었다.
차가운 판단력이 냉정한 소리를 쏟아 냈다.
네가 지금 같은 짓을 한다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차라리 다 같이 망해 버리는 게 나을 거야.
전 세계 사람들을 길동무로 삼으면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긴 싫은걸.’
가슴속에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호소했다.
저도 모르게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타는 눈.
나약한 힘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강해진 남자.
정말로 갖고 싶었다.
그 마음을, 고결하고 단단한 금강석의 정신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연인이 된다던가 하는 레벨의 이야기가 아니다.
클라우는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붙잡아 두고, 나만의 새장에 가둔 채 평생 사육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이미 주인이 있었다.
너무나 강인한 그것은, 한 번 정한 주인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다.
빼앗으려고 하면, 사실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강하다, 강하다, 해도 고작해야 인간. 신의 힘을 이겨 낼 순 없다.
벨제불의 힘으로 무작정 짓이기고 산산조각을 내 버린 뒤, 클라우를 따르도록 구조를 바꿔서 정신을 재조립해 버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클라우가 갖고 싶었던 것은 억지로 뜯어고친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저 온전한 모습의, 그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기에 클라우는 실패했다.
‘이걸 봐. 여전히 혼자인 채잖아.’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분노가 끓어오르며 억울한 감정이 용솟음쳤다.
하고 싶은 건 하나도 이루지 못했는데, 갖고 싶은 건 하나도 갖지 못했는데, 목숨까지 버려 가면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거야?
모른다.
그 이유는 클라우 스스로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리 말하리라.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워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살아갈 세상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것이 되어 주지 않아도 좋다.
그저 건강히,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가 주었으면 했다.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찌릿.
지금까지 느껴 본적 없는 통증에 클라우는 스스로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쾅쾅 뛰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인생이란 재미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살아온 평생 동안, 이 정도로 스스로가 살아 존재한다는 실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아……!”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온몸에 전율이 치솟았다.
클라우는 그것으로 무언가를 자각했다.
고행을 하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기분이 너무 좋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 하나 없고 오로지 상쾌할 따름이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에 벼락이 내리꽂힌 것 같았다.
이제야 이해했다.
왜 자신이 여태까지 혼자였는지.
왜 그 사람이 감정 한 조각 건네주지 않고 자신을 멀리했는지.
그거야 당연했다.
이토록 가슴 벅차오르는 것을 지금까지 마음대로 짓밟아 왔으니까.
이토록 소중한 것을 산산조각 내 허공에 흩뿌리고 다녔으니까.
이제는 과거처럼 비웃을 수도 없었다.
과거의 그녀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 평범한 인간들이 항상 잘난 척하며 쉽게 입에 담아 오던 이름의 가치를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아아, 이게 좋아한다는 거구나.
이게, 사랑이라는 것이구나.
이제야 알았는데.
이제야 당당하게 그 사람의 앞에서 지금부터의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단지,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클라우는 눈을 감았다.
그 눈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함선의 선미에 떨어지는 순간,
전신(戰神)의 주먹이 그녀가 있던 곳을 휩쓸었다.
* * *
티아마트가 주먹을 내질렀다.
폭풍이 몰아쳤다. 충격파가 대기를 찢었다.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우주에서 보이는 대기의 흐름. 그것이 누군가가 가위로 자른 것마냥 좌우로 갈라졌다.
거대한 함선이 가랑잎처럼 날아간다.
지면까지 닿은 충격파가 건물만 한 크기의 베히모스와 드래곤을 지면에 처박고 오메가 몬스터들마저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전투가 중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세 괴물이 동시에 움직였다.
부동명왕, 태극, 만다라 가면의 아수라들이 상공에서 터진 일격의 후폭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몸을 일으켜 전장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강령술로 되살려 낸 베히모스가 침몰했다.
유니콘의 목이 떨어지고, 찢겨진 영웅들의 시체가 사방에 번졌다.
그 움직임은 일견 자비 없는 냉철한 움직임으로만 느껴졌으나, 기린의 화신은 한눈에 전황을 깨달았다.
지능을 지닌 적은 이래서 상대하기 편하다.
지능이 있다는 것은 행동에 논리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행동에서 논리를 역추적해 정보를 끌어내거나,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아수라들의 행동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전투를 즐기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으로 목표를 전환했다.
그 말은 즉, 그들의 상황이 그만큼 안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것을 아는 한서리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황금빛 비늘이 진동하며 시공간이 일그러졌다.
순간이동을 시전한 백색 면사포의 여인이 티아마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 크립티드의 핵 앞에 출현.
그대로 손을 들어 올리며 극대소멸공격을 발사하려 했다.
수십 층 건물에 맞먹는 크기를 고려해 마력을 모으는 찰나, 한 아수라가 위험을 깨달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며, 한순간에 한서리의 앞에 태극 무늬의 가면이 떠올랐다.
무기의 특수 능력을 이용한 순간이동으로 그녀를 따라온 것이다.
“빌어먹을!”
드디어 괴물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곧장 여섯 개의 무기가 전신을 노리고 쏘아져 들어왔다.
생각 같아서는 한서리도 다른 화신들처럼 얻어맞으며 화력을 쏘아내고 싶었지만, 인간의 육체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들과 같은 회복 능력을 바랄 수는 없었다.
“큭!”
어쩔 수 없이 회피.
가속된 시간 속에서 공중을 누비며 계속해서 쫓아오는 아수라를 상대했다.
“으아아아아아!”
“일어나! 싸워, 이러다 다 죽어!”
“크와아아악!”
상공에서는 아직도 티아마트의 일격에 의한 후폭풍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괴물이고 인간이고 가릴 것 없이 찢어지는 대기와 휘몰아치는 먼지 속에서 미친 듯이 싸움을 이어 갔다.
티아마트의 일격이 엇나간 지금.
다행스럽게도 승기는 인간 측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노린 것은 아니지만 기린, 그리고 벨제불의 권속이 도와준 것이 컸다.
10기나 되던 베히모스의 무리도 거의 다 쓰러졌고, 남아 있는 아수라도 하나는 기린의 화신이, 하나는 광마가 막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표정들은 그리 좋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에디가 하늘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제기랄! 수르트가……!”
티아마트의 돌연한 공격 때문에 억지로 가동에 들어간 수르트가 마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붉은 배를 둘러싼 마력 공급 네트워크가 발광하며 어마어마한 마법진을 피워 올리고 있다.
작전 브리핑 때 누차 경고했던 것처럼, 최대 출력의 포격은 한 번 발동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몇 초일까.
3분? 2분?
어찌 됐든 수르트는 곧 발사된다.
그때까지 크립티드의 핵을 파괴하여 티아마트의 질량을 줄이지 못하면 인간들의 패배다.
문제가 터진 건 상공만이 아니었다.
티아마트의 공격으로 비공정의 진형이 흐트러진 틈에 바깥에 펼쳐져 있던 방위선이 뚫렸다.
사방에서 티아마트의 권속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스타로트는 후방에서 몰려오는 괴물들의 파도와 상공에서 가동 중인 수르트를 보고 침음성을 토했다.
- 음,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로군.
한서리에게 인간 측의 작전 개요를 전달받았기 때문에 그는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스타로트는 전신을 컨트롤하여 아수라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 몸을 얻은 탓에 아직 생각을 이어 갈 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는 곧장 자신과 융합해 사고를 공유하고 있는 한 사람을 불렀다.
- 레이나.
- 뭐죠?
클라우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인지, 레이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아스타로트를 싫어했다.
벨제불에 대한 충성심도 거의 없고, 그저 생각 없이 싸움만 하고 다니는 그를 경멸했다.
벨제불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허락했을 뿐, 아스타로트와 융합하는 것을 선택한 것만 해도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아스타로트는 그런 걸 고려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네가 정말 싫어할 부탁을 하나 해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