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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95화 (95/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95화

인간들은 티아마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기린과 벨제불의 권속 및 화신에게 도움을 받았으나 아무도 그들이 인간들을 도운 이유를 알지 못했다.

티아마트의 소멸을 확인한 순간, 기린과 벨제불의 권속들은 곧장 전장에서 이탈했으며 누구도 그들을 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의 소멸에 분노해 물밀듯이 짓쳐들어오는 티아마트의 권속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전 목표는 어디까지나 티아마트의 퇴치였다.

할일을 마쳤다고 판단한 지휘부는 곧장 지상의 영웅들을 불러들여 퇴각했다.

그리고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이동 요새, 슬레이프니르에 도착해서야 피해 상황이 보고되었다.

10대의 비공정 중 4대가 파괴.

전투에 참가한 후위의 30퍼센트, 전위는 60퍼센트가 사망.

발할라의 교수진 중에서도 기관권 안진현이 아수라를 상대하다 죽었고.

무리하게 전선을 지키던 노제 프레데리카와 이시하라 사쿠라 역시 치명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수르트는 스스로 뿜어낸 포격의 반동만으로 무너져 내렸으며, 스칼렛 발렌타인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뇌가 파괴되어 재기 불능 판정을 받았다.

피해는 몹시도 컸다.

인류가 마계의 존재들과 싸우며 수십 년을 공들여 키운 전력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들의 희생이 인류를 구원했으니까.

사람들은 환호했다.

인류의 멸망을 막아 낸 그들을 진정한 영웅이라 칭송하며 세계가 축제 분위기로 들끓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본디 이미 해결된 문제에 대해서는 빨리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세계의 위협이었다고는 하나, 실제로 그것을 체감한 사람은 실제로 반신과 맞서 싸웠던 사람들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저 먼나라 이야기였고, 실질적인 위협이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잊었다.

그렇게, 위기로부터의 승전보는 빠르게 잊혔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세계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 * *

김건이 여유 시간을 얻은 것은 티아마트를 소멸시키고 두 달이나 지나서였다.

그동안 김건은 내내 조사에 시달렸다.

왜냐하면 티아마트 공략전이 끝나자마자 사라져 버린 기린의 화신, 그리고 벨제불의 화신을 뒤쫓을 만한 단서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심문관의 추궁에 김건은 일관되게 답변했다.

기린의 화신에게 잡혀 있을 때는 일언반구 없이 방에만 갇혀 있었고, 이후에 벨제불의 화신이 등장하고 나서는 세뇌에 걸렸기 때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조사를 맡은 발할라의 특무과 사람은 개소리하지 말라며 펄펄 날뛰었지만, 뇌를 포함한 김건의 전신에 남은 마기의 상흔이 정말 세뇌의 흔적처럼 보였고, 갑자기 매스컴에 등장해 김건을 납치한 이유를 밝힌 드래곤의 발언 덕분에 의심을 벗고 풀려나게 되었다.

세상은 또 다른 혼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영웅들을 도와 티아마트를 처치하는 데 협력했던 기린의 권속들이 정식으로 이쪽 세상에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김건이 조사를 받는 동안 한서리는 그보다 훨씬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한서리와 기린의 화신이라는 이중 신분으로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알리시아와 그 동족들을 부리기 위해, 그녀는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들을, 이 세상에 이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그녀는 이미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기린의 화신으로서 알리시아와 함께 한 방송사를 붙잡아 언론 플레이를 시작한 건 그 첫수였을 뿐이다.

그 대담한 행동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당장 저들을 죽여야 한다, 몬스터를 이 세상에 받아들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타 등등.

당연하지만 반발은 거셌다.

하지만 의외로, 기린의 권속을 지지하는 여론도 있었다.

일단 기린의 권속들은 이 세상에 멋대로 들어와 둥지를 틀고 제멋대로 행동하기는 했으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침략 행위를 하지 않았기에 다른 마신의 권속에 비해 거부감이 낮았던 것이다.

거기에 티아마트의 등장 당시에 나타나 한서리의 파티를 도왔던 일, 그리고 마지막에 티아마트 퇴치전에서도 중요한 타이밍에 지원을 와 줬던 일이 조금이나마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보다 현실적인 이유였다.

마계와 마력이라는 이물질은 분명 이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나,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삶의 터전이자 사업아이템이기도 했다.

몬스터들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영웅이 대표적이다.

마력이라는 존재와 몬스터라는 적 없이 그 직업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법, 마정석, 기타 광물 등을 이용한 상품들도 현 인류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열린 차원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에 꼭 괴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보가 하나.

티아마트의 소멸 이후,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게이트의 발생 빈도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좋은 소식처럼 들렸지만 마계의 존재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이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언제까지고 쌩쌩할 줄 알았던 공급망이 갑자기 줄어들었으니까.

기린의 화신은 그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버려져 있던 땅, 기존의 마계화 지역에 알리시아의 동족들을 이주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해 그들 세상의 생물과 자원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 것이다.

새로운 공급망.

셈이 빠른 권력자와 사업가들은 그것이 갖는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판을 깔아 놓자, 그 뒤는 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구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일은 한순간에 잊혀 버리고, 세상은 외부 세계의 존재를 들이느냐 마느냐라는 거대한 담론을 두고 열렬한 토론과 논의를 이어 갔다.

그 혼돈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옆에 있었다.

김건이 물었다.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은 엘리시아한테 맡겨 놨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고생하네. 다음에 뭔가 귀한 책이라도 하나 선물해야겠어.”

“필요 없어. 다 자기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며 김건의 팔을 끌어안았다.

남편에게 어깨를 붙이며 칭얼거리듯 말했다.

“앞으로 더 바빠질 거야.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당신이랑 추억을 만들고 싶어.”

김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니 좀 미안한데. 당신까지 이곳에 올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괜찮아, 정말 싫어했지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두 사람은 클라우의 별장이 있던 섬에 와 있었다.

묘한 이질감이 신경을 거슬리지만, 평온함이 감도는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섬의 모습은 그때와는 달랐다.

그때와 같은 이질감은 없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본디 이 장소에 걸맞아야 할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으극, 으그그그!”

누군가가 딱따구리라도 된 양 나무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정신 연령이 퇴화한 환자들이 아이들처럼 먹을 것을 갖고 싸움을 벌인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건장한 남자 간호사들이 몰려와 싸움을 말리고 그들을 제압해 데려갔다.

“이거 놔! 내 아들 불러 와! 내 아들 불러 오라고!”

“히힛, 히히히히힛!”

가족에게 버림받은 자의 외침과 정신을 잃어버린 광인의 웃음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주변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눅 들어 멍하니 앉아 그저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한서리는 그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쓰레기통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하네. 관리도 제대로 안 되는 것 같고.”

김건이 말했다.

“이곳에 사람을 넣으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이래도 괜찮은 거야?”

“상관없어. 몸 성히 살아만 있으면 되거든. 여기는 치료하는 장소가 아니야, 골칫덩이를 잘, 조용히, 신경 쓰지 않도록 숨겨 주는 곳이지. 이곳이 비싼 건 보안이랑 비밀 유지 때문이지 사람들을 잘 돌봐줘서가 아니야.”

“…….”

김건이 혀를 찼다.

한서리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저번에는 안 이랬어?”

“응.”

한서리는 조금 굳어 있는 남편의 얼굴과 원래 이 장소에 있었던 이의 능력을 떠올리곤 금방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챘다.

“…….”

그녀는 말없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원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섬은 작았다.

클라우의 별장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별장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문과 창문이 전부 열려 있고, 가구와 물건들이 밖으로 나와있다.

한 사람이 낑낑거리며 별장에서 짐을 빼내고 있었다.

이전에 김건과 이야기를 나눴던 섬의 직원, 마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김건이 인사를 건넸다. 마틴은 바로 김건을 알아보았다.

“클라우 아가씨의 손님분!”

하던 일을 손에 놓은 그는 곧장 다가와서 물었다.

“혹시 클라우 아가씨가 어디 가셨는지 아십니까? 위에서 저 별장을 철거하고 다른 건물을 짓겠다는 이야기가 나와서요. 저야 말단 직원이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만…… 클라우 아가씨가 직접 오시면…….”

“클라우는 안 옵니다.”

김건은 그겋게만 말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담은 말이었다.

마틴의 표정이 굳었다.

처음만난 사람과도 껄껄 웃으며 수다를 떨 수 있는 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깔렸다.

“그런…… 가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틴은 이내 가볍게 웃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두 달 전쯤부터, 갑자기 섬의 분위기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 시작했거든요. 그 전에는 아가씨가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데 말이죠.”

“…….”

마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 됐나 봅니다. 고생 좀 하게 생겼군요.”

웃어 보이지만 중년의 목소리에는 음울함이 깔려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김건이 묻자 마틴은 와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네! 괜찮죠, 괜찮고말고요.”

억지 웃음소리를 내던 마틴은 갑자기.”어이쿠, 이런,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바깥에 서 있던 공중변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안에서 와아악-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은 무엇 때문인가.

죽어 버린 클라우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무너져 버린 거짓 낙원을 실감한 절망 때문인가.

김건은 알 수 없었다.

한참이나 기다려 보았지만 마틴은 화장실을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들어가 보니 쓰러져 있는 마틴이 있었다.

큰일은 아니었다.

변변치 않은 생활을 해 온 중년.

이제는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렇게 거칠게 울었으니 쓰러질 만도 했다.

김건은 그를 부축해 숙소에 데려다 준 뒤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강철의 여제를 발견했다.

한서리는 형형하게 파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 정도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 지금까지 우리가 버려두고 온 목숨이 몇 개인데.”

미래에서 온 두 사람은 정말 많은 것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앞에서 죽어 사라졌다.

구하지 못한 사람, 어쩔 수 없이 뒤에 버려두고 온 사람 역시 셀 수도 없다.

남편의 정신력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결국에는 미력한 존재일 뿐이다.

벨제불의 화신부터 시작해서 티아마트의 반신, 아수라, 그리고 마인협회.

돌아온 이래로 겪은 폭풍 같은 시간.

미쳐 날뛰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다가 잠깐 파도가 잦아들게 되면 누구나 뒤를 돌아보게 된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수련을 거듭해 온 전사라면 더하다.

아무리 기술을 연마하고, 노력을 거듭해도 몰려오는 해일을 막을 수는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부술 수는 없다.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병마에는 이길 수 없다.

그런 일을 겪다보면 문득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은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던 한서리는 별장 옆의 공터에 짐을 줄이기 위해 쓸모없는 잡기들을 태우던 흔적을 발견했다.

고개를 들어 보자 마침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는 저녁노을이 보였다.

한서리가 김건을 끌어당겼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떠돌았다.

“우리, 잠깐 불놀이나 하다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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