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96화
타닥, 타닥.
부서진 가구와 오래되어 우그러든 책이 환한 불꽃을 피우며 소리를 냈다.
한서리와 김건은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하아─
한서리는 휑뎅그렁한 별장의 주방을 탈탈 털어 끓여 온 차를 마시곤 나른하게 한숨을 쉬며 김건의 어깨에 체중을 실었다.
김건은 묵묵히 조각 낸 장작을 모닥불 위로 던져 넣었다.
이렇게 둘이서 만나 여유를 가진 건 오랜만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그동안 못했던 대화를 나누었다.
“이주 계획은 어때? 괜찮을 것 같아?”
“응. 이미 이쪽 계획에 동의한 사람들이 꽤 많아. 새로운 시대의 첨단에 서고 싶어서 안달이 난 녀석들이지.”
“그쪽 사람…… 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쪽은?”
알리시아를 필두로 한 마계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한서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쪽이야 선택지가 없으니까. 받아 주면 다행인 줄 알아야지. 괜찮을 거야. 알리시아가 겉보기에는 그래도 은근히 실권이 있거든.”
김건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벨제불도, 티아마트도, 기린도. 돌아온 지 1년도 안 지났는데 사건이 너무 많았어.”
한서리는 킥킥 웃었다.
“그래도 어떻게 잘 끝났잖아? 티아마트를 추방시키고 난 뒤로 벌써 게이트 발생 횟수가 반이나 줄었어.”
“기린은 어때? 여전히 움직임이 없나?”
“응. 딱히 나를 이용하려는 느낌도 없고, 다른 선계에서의 움직임도 안 느껴져. 근데…….”
“그런데?”
“기린의 힘을 쓸 때마다, 점점 이질감이 줄어들어 가고 있어. 뭔가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한서리는 그러면서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을 거야.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변했는걸.”
김건은 팔을 뻗어 아내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그 온기를 느끼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놓인다.
한서리는 어깨 위에 얹어진 김건의 손등을 쓸어내리며 배시시 웃었다.
“걱정하지 마. 전에도 말했듯이 내 최후의 보루는 당신이니까. 당신만 있다면, 나는 무너지지 않아. 절대로.”
“그래.”
그렇게 말하며 김건은 아내의 머리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달이 기울어 갔다.
섬의 밤은 선선했다. 앞에 놓인 모닥불은 작았지만 서로의 체온만으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같은 공간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동안 삶을 겪으며 쌓인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문득, 한서리가 입을 열었다.
“알리시아한테 들었어. 꽤 성격이 괜찮은 세이렌을 알고 있대. 여기에, 녀석을 둘까 해.”
세이렌.
인어와 비슷한 생김새에 기이한 노랫소리를 이용한 정신 제어 마법을 사용하는 몬스터다.
김건도 발할라 생도 시절에 세이렌을 상대할 때 꽤 고초를 치른 적이 있었다.
한서리는 말을 이었다.
“클라우 정도로 안정적인 힘을 쓰지는 못할 거야.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낫겠지. 몬스터들의 쓸모를 증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고.”
섬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본 반응이 꽤 신경 쓰인 모양이다.
김건은 아내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져서 말했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는데…….”
“괜찮아. 이용 가치가 있어서 그런 거지,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니까.”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며 스르륵, 남편의 어깨에 푸른 머리를 기댔다.
김건은 이글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오랜만에 궁상 좀 떨었더니, 뭔가 씁쓸하네.”
이 장소에 딱히 추억 따윈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적으로 삼았던 이와 잠깐 손을 잡았다가 그들의 도움을 받고 살아나게 되면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되곤 했다.
아직도 혀끝에 쓴맛이 남아 있다.
차라리 도움이라도 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김건은 슬쩍 입맛을 다셨다.
한서리는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궁상 좀 떨면 어때. 당신은 오히려 스스로한테 너무 가혹해. 조금 더 안일해져 봐. 나한테 어리광을 부려도 좋고.”
“지금 이러는 건 어리광이 아니야?”
“아니지. 펑펑 울면서 내 품에 안길 정도는 돼야지.”
“……어머니한테도 그렇게 한 적은 없어.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그래? 그럼 지금 한번 해 볼래?”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떼고 얼른 들어오라는 듯 양팔을 벌렸다.
“됐어,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김건은 점잖게 거절했지만 한서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김건을 재촉했다.
“빨리 와. 안아 줄게. 아니, 안고 싶어. 응?”
……이래 가지고는 누가 어리광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김건은 싫다고 한참이나 버텼지만 언제나 그랬듯, 극성맞은 아내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옳지. 잘했어요.”
한서리는 기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부드럽게 남편을 안아 주었다.
마른 손가락을 들어 사랑스러운 듯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내의 품은 따뜻했다. 그리고 좋은 향기가 났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어때?”
“……좋긴 하네.”
솔직한 남편의 답변에, 한서리는 까르륵 웃었다.
한서리는 한참이나 김건을 안고 있다가 그를 놓아 주었다.
김건은 조금 얼굴이 붉어져서 아내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로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는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아내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금 흔들리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슬슬 불이 꺼져 가는 듯해 옆에 쌓아 두었던 장작을 집어 드는 찰나, 지금 집어든 것이 그림이 담겨 있던 액자를 조각 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김건이 품속을 뒤졌다.
그가 꺼낸 것은 공간 압축 마법이 걸려 있는 액자였다.
마력을 조작해 마법을 풀자 커다란 액자가 손에 잡혔다.
김건이 꺼낸 액자.
그리고 그 안에 그려져 있는 것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깨달은 한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뭐야?”
“클라우한테 선물로 받은 거야. 다시는 여기 올 일도 없을 테니까…… 같이 보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러면서 김건은 액자 속의 그림을 끄집어내려 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서리가 김건의 팔을 잡았다.
“아니야. 잘 그렸네. 태우기엔 아까워. 이건 그냥 가지고 가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액자를 잡아당겼다.
김건은 순순히 아내에게 그림을 넘겨주었다.
한서리는 빤히 그림 속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처럼 말했다.
“세상을 구했으니까…… 흔적 정도는 남겨 줄 수 있어.”
한서리는 다시 압축한 액자를 자신의 품속에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남편 대신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빨간 불똥이 솟구쳐 올랐다. 타들어 가는 나무가 갈라진 틈새로 주황색 속살을 보이고 있었다.
병자들이 대부분인 섬은 소등이 빨랐다.
해가 지자 사위는 어둠에 휩싸였다.
멀찍이서 쏴아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드문드문 서 있는 야자수가 잎파리를 부딪치며 마찰음을 냈다.
조용하다.
마치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예전 사람들이 생각나네.”
불쑥 한서리가 말했다. 김건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예전 사람?”
“돌아오기 전에, 우리들과 함께 싸웠던 사람들. 대부분은 싫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다.
지금 한서리와 김건이 이는 곳은 멸망이 실현되지 않은 과거니까.
하지만 그들은 죽었다.
한서리와 김건의 기억 속에서.
어찌 보면 두 사람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들이었다.
한서리가 말했다.
“행복해지자.”
그것밖에 없다.
지나간 일이 어찌 되었든,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반신 추방 및 퇴치 작전에 너무 큰 힘을 소비한 발할라는 무기한 휴식에 들어갔다.
단순히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은 아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한 기린의 권속들, 그리고 줄어든 게이트에 대한 처리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서의 의미까지 포함된 결정이었다.
섬은 한산했다.
대부분의 생도들이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한서리는 얼른 집을 구해 섬을 나가고 싶어 했지만 앞으로 발할라가 어떤 방향성으로 움직일지는 몰랐다.
두 사람은 발할라의 다음 방침이 정해질 때까지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기숙사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해진 발할라에서, 김건은 느긋하게 요양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마지막 전투가 끝난 직후, 아수라와의 격전에서 얻은 상처, 그리고 아스타로트와 레이나에게 마기의 침식을 허락한 것 때문에 내내 병상에 누워 있다 보니 체력이 꽤 떨어졌다.
아카데미가 휴식 중이라 따로 수련 시간도 없다.
김건은 최근 아내가 자고 있을 새벽 시간을 이용해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훅- 훅-!”
해가 뜨지 않아 주변을 밝히는 것은 가로등이었다.
가로등의 불빛을 건너간다. 아침부터 해변가를 나는 새가 보이고 섬의 바깥으로 쭉 뻗은 수평선이 희끄무레하게 물들었다.
김건은 그렇게 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쭉 뻗은 섬의 도로 위를 달렸다.
그의 앞을 막는 그림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죽으러 온 건가?”
“그래.”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널찍한 로브 안쪽에서 손을 꺼내 보였다.
희게 빛나는 가로등의 불빛 아래로 검은 가루를 날리며 바작바작 부스러져 가는 손끝이 보였다.
박사가 말했다.
“짧은 기간 동안 화신을 둘이나 잃은 탓에 벨제불 님의 영향력이 너무 약해졌어. 마기가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아.”
“…….”
“마이는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도망쳤지만…… 녀석도 그리 오래는 못 버틸 거다. 아마도 한 달 내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인들은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질 거야.”
김건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봐야 몇 년이지. 시간이 지나서 벨제불이 손을 뻗치기 시작하면 또 벌레처럼 기어 나오기 시작할걸.”
박사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아직 벨제불 님은 이곳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으니까. 하지만 다시 나타난 마인들이 제대로 활동할 근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걸릴 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예상의 범주에는 있었으나, 지금까지는 몰랐던 사실에 김건은 물끄러미 박사를 바라보았다.
“마인협회를 만든 게 당신이었나?”
“그래, 내가 협회를 만들었다. 마기라는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전 세계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벨제불 님의 강림을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마인들을 통솔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하는 바다의 끝을 바라보았다.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어.”
김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들을 속이고, 죽이는 것 말인가?”
“아니, 어떤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 나가는 것 말이다.”
김건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뭐래도 상관없다. 박사는, 아니, 프리드리히 하이데거는 그저 담담히 스스로의 이야기를 읊었다.
“과거의 난 사이먼에게 졌다. 언제나 녀석을 추월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그걸 성공하지 못했지.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평생을 노력하더라도, 사이먼을 이길 수는 없다는 걸.”
벨제불을 신봉하는 마인이 고개를 돌렸다.
깊게 눌러쓴 두건 아래로, 검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두 눈이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게 새로운 길이 되어 주신 게 벨제불 님이다. 그분이 내게 목표를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때보다 더 성장할 수 있었지.”
마인이 된 자는 정신이 잠식당해 오로지 벨제불만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삶의 목표 자체가 벨제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김건이 이론상으로만 아는 이야기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인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공감해 주진 못하겠군.”
“아니, 넌 이 감각을 알고 있다.”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김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네게도 있지 않나. 한서리라고 하는, 맹목적인 신뢰의 대상이.”
“……그거랑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다를 바 없다. 넌 어떤 이득을 계산해서 한서리를 지키는 건가?”
“그건 아니지.”
“그럼 어떠한 필요가 있어서 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야.”
박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단언하듯이 말했다.
“네 행동 동기는 이성이 아니야. 감정, 오로지 그것뿐이지. 넌 그 불분명한 기준과 지지대만으로 벨제불 님의 지배까지 이겨 내며 한서리를 지켜 냈다. 한서리가 기린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말이야. 앞뒤를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믿음이라는 점에서 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어.”
“…….”
“맹목적인 믿음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 그게 있었기에 나는 수십 년간 발할라에서 잠복할 수 있었다. 그게 있기에 F급 마력적성자에 불과한 네가 그토록 강할 수 있는 거다.”
김건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조상님들에게 배워 온 가르침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건이 미극공진동을 완성시킨 것은 아내를 만나기 전의 일이었으나, 그가 완벽하게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김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비슷한 사이끼리 사이좋게 담소라도 나누자고 귀한 시간을 내서 온 건가?”
“……그럴지도.”
박사는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벨제불 님의 힘을 느끼고, 부서진 연구소에서 클라우 아가씨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난 아가씨를 중심으로 마인협회를 만들려고 했지. 하지만 아가씨에게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어, 그렇기에 나는 그분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두에게 그분을 숨겼다. 그분 스스로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난 그저 그분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박사는 손을 들어 김건을 가리켰다.
“그런 클라우 아가씨에게 삶을 부여해 준 것은 너다. 널 얻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아가씨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셨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다가 스스로의 의지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건 네가 있었던 덕분이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적에게 그런 말을 들어 봐야 그저 난감할 뿐이다.
김건이 그리 말하자 박사는 작게 웃었다.
김건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쓸데없는 넋두리를 하러 온 거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김건의 다리를, 박사의 말이 붙잡았다.
“기린을 주시하는 게 좋을 거다.”
“뭐라고?”
김건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듯 박사를 돌아보았다.
박사가 말했다.
“마신은, 단수가 아니다. 대부분의 힘을 통제하는 주 인격은 존재하지만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의 힘이 주 인격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야.”
그건 김건도 아는 사실이었다.
미래의 학자들이 밝혀낸 바로, 마신들이 가진 그 막대한 힘은 한가지의 인격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신은 스스로의 정신을 수백, 수천 개의 인격으로 나누어 일종의 공동 집합체의 의미로서 신격을 구성한다고 했었다.
대표격인 인격은 존재하나, 그것이 완벽하게 나눠진 모든 인격을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마신은 스스로의 인격을 나누어 화신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반신이 만들어 낸 아수라 역시 마찬가지다.
토너먼트에서 만났던 벨제불과 클라우의 차이, 그리고 각 아수라들이 가지는 성격의 차이를 보면 그 추론이 사실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들 모두가 벨제불이자 티아마트였지만 그들은 모두 각각의 인격과 개성을 가지고 행동했다.
“마신을 통제하는 것이 한 가지 인격만이 아니라는 건 알아……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김건이 자신의 말을 이해한 것 같자 박사는 바로 말을 이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정신은 작은 조각이라도 신의 의사를 이겨 낼 수 없어. 아가씨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분에게 강림한 벨제불 님의 일부가 인간으로서의 부분을 긍정했기 때문이야. 아마도…… 한서리 역시 비슷한 상황일 거다.”
“수틀리면 인간으로서의 일부를 인정하고 있던 기린이 그것을 부정할 수도 있다는 건가?”
“그건 아니야. 나도 그리 많은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한 인격에 정착한 신격은 자신과 인격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아. 이미 그 인격을, 스스로의 일부로 받아들인 거지. 내가 조심하라 말하고 싶은 건 오히려 바깥쪽이다.”
“바깥쪽?”
“한서리에게 정착한 기린이 아니라, 그 밖에 있는 기린의 인격들.”
“…….”
“한서리는 이미 기린을 받아들였다. 능숙하게 그 힘을 다루며, 기린의 화신이라는 입장까지 이용해 권속들을 늘렸고 그들을 받아들였지. 그리고 지금은 이 세상과 선계의 공존을 꾀하고 있다. 비록, 그 선계가 전체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기린이 구축해 놓은 선계에 간섭하는 행위가 된다.”
김건은 박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의 아내는 분명히 기린의 화신이 되었다.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선계의 일을 이쪽 세상으로 끌어들여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의지가 곧, 기린의 의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린은 아내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아내가 기린에게 종속되어 있고, 어쩌면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는 기린의 일부가, 마음대로 선계를 건드리는 아내의 행동을 불쾌해할 수도 있다.
새로운 화두를 떠안게 된 김건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소리로 자신의 말이 김건에게 충분히 전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박사가 물었다.
“벨제불 님과 티아마트의 영향력은 확실히 감퇴했어. 그건 의심할 필요가 없지. 원인이 분명하니까. 문제는 기린 쪽이다. 최근 기린의 움직임이 묘하게 둔화되어 있긴 해.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 한서리가 그 상황을 파악하고 있나?”
기린의 침묵.
아내는 기린이 그 두 사람과 함께한 시간 역행의 반동에 당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이다.
사실 여부에 따라 그것은 얼마든지 부정될 수 있다.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린이 둔화된 건 알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몰라. 화신의 능력을 사용해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하던걸.”
“그럴 거다. 억지력이라는 건 밖에서 안으로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도 작용하니까. 제대로 정보를 수집하려면 이곳이 아니라 선계로 넘어가서 하는 게 좋을 거다. 그다지 추천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야.”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아가씨에게 들었다. 토너먼트 경기장에 나타났던 화신이 자신을 불렀다고. 아가씨는 그 화신이 아가씨의 힘을 흡수하려 한 짓이라고 하더군.”
“화신이, 다른 화신을 흡수하려 했다고?”
“한서리가 선계로 나선다면 얼마든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어. 되도록이면 명계, 투계, 선계를 떠나 아예 마계로는 건너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다시 돌아오기도 힘들고, 억지력이 지켜 주고 있는 이곳이 한서리에게는 안전해.”
김건은 말이 없었다.
아마도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라고 박사는 판단했다.
할 말은 다 했다.
박사는 그저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저 먼 지평선으로부터 일자로 하얀빛이 번지며 그 중점에서 주황빛 덩어리가 고개를 들이미는 모습이 보였다.
햇빛이 들이쳤다.
옷 아래로 부스러져 가는 몸의 일부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박사는 자조했다.
“햇빛을 바라보는 건 이게 마지막이겠군.”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실패하기만 한 인생이었다.
사이먼을 뛰어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 이후에는 벨제불에게 이 세상을 안겨 주려 했으나 그 목표마저 손아귀에서 흘러나가 버렸다.
안타까웠다.
박사는 고개를 돌려 김건을 마주했다.
강철 같은 눈동자.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무기로 가다듬은 남자가 그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마인도 아니고, 목적으로 삼은 대상도 다르다.
하지만 박사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해 준 자에게 말했다.
“넌 꼭, 네가 가진 목표를 달성해라.”
그말을 끝으로, 박사의 몸은 햇빛에 녹아들듯 검은 연기를 풍기며 사라져 버렸다.
후드득, 그가 걸치고 있던 로브가 벤치에 떨어진다.
김건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적에게 받는 축복이라.
“나 참,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니, 그런 의문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
아내의 얼굴을 떠올린다.
푸른색으로 물든 물빛의 아내와 은색과 금색으로 빛나는 아내.
다른 사람들은 그 둘을 별개로 구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건에게 그 둘은 똑같은 존재였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
그것은 그가 인생을 걸고 지켜야 할 절대명제였다.
‘기린을 주시해라.’
박사가 남긴 말.
김건은 그것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