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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97화 (97/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97화

발할라 토너먼트에서 등장한 벨제불의 화신이 수만 명의 사람을 죽이고.

차원의 틈을 찢고 등장한 티아마트가 인류를 멸망의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기린의 화신이 다른 세계로부터의 이주를 요청한 혼돈의 해.

그 해가 끝난 뒤로, 3년이 지났다.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서리는 회사를 차렸다.

처음에는 한씨 가문이 이끄는 그룹의 자회사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독립해 세계시장을 주름 잡는 대기업이 된 ‘스노우플레이크‘.

그리고 스노우플레이크의 주요 사업은, 이 세상으로 이주해 온 선계의 주민들에게 필요한 땅과 자원을 공급, 혹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환경을 갖춰 주는 것이었다.

오늘도 한서리는 스노우플레이크의 최고 경영자로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경영진 및 각 실무의 책임자, 보좌관 기타 등등. 하지만 중앙에 위치해 있는 두 사람 외의 인물은 모두 들러리일 뿐이었다.

재벌가 출신에 벨제불과 티아마트전을 겪으며 쌓은 영웅으로서 쌓은 엄청난 실적.

거기에 게이트가 급격하게 줄어들며 영웅이라는 직업이 빠르게 소멸해 가는 시기에 보인 경영자로서의 실력까지.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한서리는 살아 있는 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직접 나서서 회의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와 대담을 나눌 상대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

한서리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온몸을 새하얀 천으로 두른 사람이었다.

기린의 화신.

천천히 이주를 시작해 지금 인간과 함께 지구에 자리 잡고 있는 이세계의 선주민, 용족을 이끄는 자.

일명, 용왕(龍王).

항상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면사포를 쓰고 나타나 아직까지 그 진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인지, 용족인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종족인지, 혹자는 아예 촉수 투성이의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릴 할 정도로 비밀스러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모습을 드러낸 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모두의 눈에 익숙해진 그 면사포는 이제 마냥 신비롭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용왕이 말했다.

“그래서, 암브로시아의 공급량을 절반으로 낮추겠습니다.”

거래 상대의 폭탄 선언에 한서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에 도열한 다른 경영자들 역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잠깐 앞으로 나선 누군가가 한서리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손을 저어 그를 물린 한서리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공급량을 줄이시는 이유가 뭐죠? 게이트의 숫자가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수요가 크게 늘어서 여전히 마정석의 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이에요. 이 와중에 대체품인 암브로시아의 공급을 줄이시는 저의가 뭔지 궁금하군요.”

용왕은 차갑게 대답했다.

“노동력이 부족합니다. 용족이 인간들보다 뛰어난 체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들도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요즘 들어 완전히 정착해 아이를 키우는 가정도 슬슬 늘어 안 그래도 부족한 노동력이 더 부족해졌죠. 지금까지는 당신들을 위해 무리를 했지만 더 이상은 힘듭니다.”

한서리의 뒤에 있던 사람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공급량을 절반으로 줄여 버리면…….”

면사포로 가려진 얼굴이 그를 향했다.

가볍게 뿜어진 신격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변했다.

용왕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쪽도 마냥 편한 건 아닙니다. 새 레어를 구축할 자재가 부족해서 아직도 임시 저택에서 지내는 자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 와중에 그쪽에서는 유통상의 문제를 들며 자재의 가격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내포된 의미를 알아챈 한서리가 말했다.

“……용족 분들의 불만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용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리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저희가 암브로시아의 가격을 얼마나 조정해 드리면 용족 분들의 불만을 누그러트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것이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용왕은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지금의 두 배는 받아야겠습니다.”

“무슨, 그런 날강도 같은 요구가 어디 있습니까?”

한서리의 뒤에 앉아 의견을 듣던 몇 참다못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자 용왕의 뒤에 있던 용족들도 일어났다.

인간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지만, 기다란 귀를 가진 이세계인이 목대에 핏줄기를 세웠다.

유창한 공용어가 흘러나왔다.

“날강도라니, 당신들이 우리를 착취하는 건 정당한 일입니까?”

“착취? 기껏 자리를 만들어 살 수 있게 해 줬더니, 착취라니!”

한 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불이 붙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하찮은 인속 주제에……!”

“인속? 도마뱀 따위가! 어딜 감히!”

이리저리 분노의 고함과 욕설이 오간다.

그 난장판 속에서, 용왕과 한서리의 눈이 마주쳤다.

용왕은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움직임으로 가벼운 제스처를 취했다.

‘죽겠어요.’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당장이라도 상 위에 엎드릴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쯧.”

한서리가 혀를 찼다.

용왕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엄한 눈으로 용왕을 꾸짖는 한서리.

그러자 용왕은 어쩔 수 없이 다시금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위엄을 세웠다.

그렇게 회의는 난장판인 채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 * *

이주를 해 온 용족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과거의 마계화 지대, 즉 티아마트의 반신이 강림해 초토화된 곳이었다.

몬스터들만 득실거리던 황무지는 어느새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 동굴이 산맥처럼 듬성듬성 서 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들이 즐비한 환상향이 되어 있었다.

용왕의 집무실은 그 중앙에 있었다.

시청과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건물은 용족의 양식으로 지어져 지구상의 그 어떤 문화 양식의 것과도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건 건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황금색 잎사귀가 열려 있는 줄기 지름 수십 미터의 초거대 나무의 속을 파 놓고, 그 안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 놓았을 뿐이었으니까.

집무실의 안에는 소형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게이트 안쪽의 공간이 휘어지며 그 안쪽으로부터 면사포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하아~.”

한숨을 쉬며 나타난 그녀는 비척비척 걸어가 집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풀썩 앉았다,

“힘들어…….”

용왕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인간들로부터 선물받은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시 후, 뒤편의 게이트가 다시 한번 번쩍거렸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푸른빛을 뿌리는 얼음 같은 미녀, 한서리였다.

한서리는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걸어가더니 집무실의 한편에 놓인 차 세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용왕이 일어나기 위해 허리를 들었다.

“아니, 제가 하겠…….”

“앉아 있어. 오늘은 고생했으니까.”

허락이 떨어지자 용왕은 바로 자리에 늘어졌다.

한서리는 잘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라 용왕의 앞에 놓아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용왕은 꾸벅 고개를 숙이곤 차를 마시기 위해서 면사포를 걷어 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가 사라지자 금색의 장발이 쏟아졌다.

뾰족한 귀가 쫑긋 서고, 녹색 눈이 깜빡인다. 그 얼굴에는 용족의 전사를 의미하는 문신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계약을 맺음으로서 한서리의 권속이 된 레드 드래곤, 알리시아 비칸테르였다.

한서리는 알리시아와 마주 앉아 찻잔을 홀짝였다.

“이걸로 당분간 암브로시아의 시세가 오를 거야. 충분한 정도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수요가 줄겠지. 그러니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용족들의 노동 시간을 좀 줄여. 충분히 쉬게 하고, 기운이 있다면 축제 같은 걸 여는 것도 좋겠지. 하여튼 당분간은 원하는 걸 좀 들어 줘. 채찍질만 해서는 효율이 안 나오니까.”

알리시아는 따뜻한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깍듯한 대답에 한서리가 투덜거렸다.

“그놈의 팀장님 소리는…… 언제까지 할 거야? 난 더 이상 네 상사도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비즈니스 대상이지.”

알리시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게 입에 익어서…… 화신님이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별로지 않습니까. 그냥 기린 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난 기린이 아니야. 그냥 이름으로 불러. 딱히 존댓말을 할 필요도 없어. 네가 나보다 수십 배는 더 살았잖아.”

“그래도 어찌 감히…….”

끝까지 고개를 조아리는 알리시아에게 한서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부담을 줘 버린 것 같다.

그녀는 포기한 듯이 말했다.

“그래, 그냥 편한대로 불러.”

“그런데, 명칭은 갑자기 왜 신경 쓰십니까? 혹시나 제가 불편해 할까 봐 그런 건가요?”

“아니거든? 내가 불편해서 그렇지.”

“흐으음~.”

“…….”

히죽히죽 웃으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알리시아.

그 우쭐해 하는 그 얼굴이 성미를 건드렸다. 한서리가 더욱 기를 죽여 놓아야겠다고 마음먹기 직전에,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용왕님? 돌아오셨습니까?”

“들어와.”

집무실로 들어온 것은 알리시아의 비서였다.

용족의 전통 복장인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인간들의 기계였다.

인간들이 마계에 살던 그들을 받아들였듯, 그들 역시 인간들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서리를 발견한 비서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한서리 님.”

“그래.”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의 비서는 한서리의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알리시아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 주는 측근.

듣기로는 사촌지간이라고 들었는데, 정확한 건 한서리도 모른다.

하여튼 신뢰도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비밀을 아는 대가로 목숨을 건 계약까지 스스럼없이 진행할 정도였으니까.

비서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눈치를 보고 있는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잠깐 보고 좀 드려도 될까요?”

알리시아는 곧장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서리의 앞이라 그런지 일을 거부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가 수락하자 비서는 한참이나 알리시아가 자리를 비운 동안 들어온 건수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고는 확인을 부탁한다며 알리시아의 앞에 노트북을 세팅해 주었다.

손님맞이 상 위에서 일이라.

상당히 무례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알리시아와 한서리의 성향을 잘 아는 비서였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 당장 결재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확인하시고 바로 메일로 답변을 보내 주세요. 다들 급하다고 하고 있으니까.”

전달을 마친 비서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알리시아는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여 신경 쓰지 말고 일이라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알리시아는 뚱한 얼굴로 바로 업무에 착수했다.

그녀의 계정으로 날아온 메일을 확인하고, 답변을 작성한다.

그녀가 키보드 두드리는 모습을 본 한서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직도 독수리 타법을 써?”

안 그래도 예전에 그 건으로 한번 호되게 잔소리를 들은 터다.

알리시아는 다급히 변명했다.

“아니, 그게…… 아무리 해도 기계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래도 연습해서 속도는 제법 빠릅니다.”

그녀는 그러면서 이거 보라는 듯 두 손가락으로 빠르게 문자를 입력해 나갔다.

한서리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진짜 알리시아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문서를 작성하는지 확인했다.

믿을 수 없긴 하지만 정말로 나쁘지 않은 속도였다.

“…….”

납득한 한서리가 도로 자리에 돌아가자 알리시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서리가 차를 마신다.

알리시아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자판을 두들겼다.

그러던 와중, 알리시아가 물었다.

“저, 팀장님. 잠깐 이것 좀 같이 봐주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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