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00화 (100/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00화

김건은 그저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다.

인류의 전력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티아마트나 벨제불의 힘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을.

기린은 예외일 뿐이다. 나머지 두 마신은 기린처럼 얌전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이 행성의 에너지 총량을 더 해도 진정한 마신의 힘을 넘을 수는 없었다.

우주로 진출해 지금보다 더욱 큰 에너지를 다루고 더 많은 자원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된다면 뭔가 수가 보일지도 모르나.

앞으로 100년 뒤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지금, 그 정도의 발전을 바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김건은 한서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결코 승산이 없는 싸움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있는 거야?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의 나는…… ‘기린의 화신’이니까.”

김건은 기린의 세계, 선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확장을 더해 가는지 알기 때문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권속화를 하려고?”

“그래, 벨제불과 티아마트의 침략을 완전히 끊어 내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없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마신은 마신으로 상대해야지.”

김건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충분한 ‘동의’를 얻는 게 가능할까? 저번처럼 힘든 상황이 아니잖아. 사람들이 그 계약조건에 쉽게 납득할 것 같진 않은데.”

과거이자 미래.

김건과 한서리가 겪은 미래에서 인류는 똑같은 방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기린이 계약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최악으로 치달아 남은 인류 전체가 기린과 맞서 싸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인류에게는 한서리가 있었다.

기린의 화신, 기린의 의사를 지닌 자.

그렇다면 기린의 동의는 얻었다고 봐도 좋으리라.

오히려 진짜 문제는 그 반대편에 있었다.

김건이 그 점을 지적하자 한서리는 웃었다.

그녀는 윙크를 해 가며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괜찮아.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돈을 모으고, 명성을 쌓아 온 거니까. 재력과 권위, 이 두 개만 있으면 자본 주의 사회에서 못할 일은 거의 없어.”

한서리가 세운 기업인 스노우플레이크는 이 세상으로 이주해 온 기린의 권속들에게 지구의 문물과 필요한 자재를 전달해 주는 대가로 그들에게서 마계의 물품을 받아 오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으로 기린의 권속을 통솔하는 용왕이기도 했다.

자기 물건을 자기 물건으로 바꾸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싸게 판다.

돈 놓고 돈 먹기.

아무도 모르는 새에 전 세계적인 규모로 사기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부도덕한 짓이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지금 한서리가 보유한 자금과 사업의 크기는 그야말로 세상을 뒤집을 만했다.

상식 수준의 경제 관념밖에 없는 김건은 그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런 그도 아내의 수완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이런 전략 규모의 싸움터에서는 일개 장수이자 무기에 불과한 김건이 나서서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아내가 싸우려 하는 것은 그녀를 핍박하는 불합리한 폭력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힘내, 응원할 테니까.”

“응.”

한서리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언젠가, 남편에게 했던 말을 다시 했다.

“역시 나는 세상을 구할래.”

손을 뻗는다. 그녀는 남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더, 이곳에서 당신과 오래 지내고 싶으니까.”

* * *

김건은 도장에 나갔다.

그가 운영하는 도장은 과거, 에디 슐츠와 세라스 프레이저가 수련 장소로 자주 이용하곤 하던 곤륜산 한복판에 있었다.

무성한 숲 속에 세워진 건물.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소형 게이트부터 대련장, 연무장, 그리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마련된 기숙사까지. 어지간한 기능은 모조리 갖고 있는 종합 시설이었다.

처음에 김건은 그저 도시의 빌딩 한층을 빌려, 평범한 무술 도장을 운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기에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실적이 너무 대단했다.

발할라 시절, F급 마력적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발키리로서 활동한 이력, 게다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특무대의 황금 쌍두마차, 티리온과 세라스가 몇 번이고 그의 실력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문이 돌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김건이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고, 그는 방침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의 힘을 빌렸다.

기업을 운영하며 많은 사람들을 다루는 한서리의 능력을 빌어 지원 대상을 압축, 아내에게 건네받은 정보를 토대로 재능이 뛰어나거나 가능성이 있다 여겨지는 아이들을 철저히 분석하고 선별해 도장에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김건이 아는 교육 방침은 소수의 정예를 키우는 것이지, 다수의 병사를 양산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자 모두가 재능이 있고 의욕이 넘치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수업은 꽤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정해진 수업은 오전 동안만, 그 외의 시간은 각자 알아서 수련한다.

김건은 아이들의 수련 과정을 지켜보며 조언을 해 주거나, 과제를 주는 것으로 방향성만 잡아 줄 뿐이었다.

워낙 자유로운 환경이다 보니, 당연히 수련은 안 하고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건 뭐예요?”

지금도 그랬다.

자율 수련 시간.

김건은 사무실에 앉아 다음 날 쓸 수업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 아이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명패를 빼 들더니 그것을 들고 쪼르르 달려왔다.

일곱 살은 되었을까,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사내아이였다.

아이는 명패에 박힌 문자를 가리키며 그 의미를 물어 왔다.

“…….”

게으르기만 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아이가 그랬다면 혼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명패를 가져온 아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스스로의 수련 계획을 관리하며 충분히 실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저 가끔,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할 뿐이다.

“이거?”

김건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곤 명패를 받아 그곳에 적혀 있는 과거의 문자를 읽었다.

‘成為武器’

명패에는 단 네 글자만 덜렁 적혀 있었다.

한자.

공용어만 배운 아이는 당연히 알 수 없는 단어였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김건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년 전에 사라져 버린 명패였다.

과거 아버지가 운영하는 도장의 자료를 가져올 때 짐에 섞여 들어온 것 같았다.

김건은 간만에 보는 명패의 글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별건 아니야. 무기가 되라는 말이지. 우리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던 가훈이었어.”

“무기? 칼이나 창 같은 게 되라는 거예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야. 강해지기 위해 수련하되,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휘두르지 말라는 거지.”

“…….”

아이는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건은 그 순진한 얼굴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었다.

“크리스의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시지?”

크리스는 손울 번쩍 들며 대답했다.

“지휘자요!”

“그래, 지휘자시지. 그럼 어머니가 지휘하시는 분들은?”

“음악가 분들이요.”

“음악가 분들은 어머니의 지휘에 따라 연주하시지?”

“네.”

“이 말도 마찬가지란다. 수련하고 연마하되,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지휘를 따르라는 말이야. 음악가분들이 스스로 갈고닦은 악기 기술을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연주하는 것처럼.”

“왜 그래야 하는데요?”

“자기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힘은 결국 폭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크리스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김건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모든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며, 해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고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기가 되어라.’

김건은 그 말이 생겨난 것은 조상들이 과거에 군부에 몸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와 주군을 지켜야 할 힘으로 사리사욕을 채우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로 보이지만…… 한때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기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을 얻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힘이 가지는 의미,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고민은 모조리 남에게 맡기고, 그저 순수하게 힘을 추구하는 것이 더 강해질 수 있는 비결이었기에 한 말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회귀하기 전,

그가 아카데미의 쓰레기이자 문제아였을 시절.

부모님의 죽음과 사람들의 멸시가 불씨를 당기기는 했지만 그때의 김건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강함이었다.

왜 강해지려 하는 것인가, 강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힘을 열망했다.

그 생각이 마냥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잊고 강함을 추구한 덕분에, F급 마력적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미극공진동이라는 신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금의 김건은 안다.

도룡지기(屠龍之技)라는 말이 있다.

천금을 들여 용을 잡을 수 있는 기술을 익혔으나, 실상 용이 존재하지 않아 그것을 사용할 곳이 없었다는 고사.

아무리 대단한 기술이라도, 쓸데가 없다면 소용없다는 말.

그것과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강한 무기라도,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그저 고철덩어리일 뿐이다.

스스로를 무기로서 갈고닦아 온 김건.

그는 그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 * *

휴일이 되었다.

한서리는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라 커다란 그룹을 통솔하는 경영자였다.

매번 정시 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래쪽에서 불만이 폭주하는 상황이다.

그래신 그녀는 별도의 휴일 없이 일을 했다.

그렇다고 김건이 휴일을 하릴 없이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햇살이 들이닥치기 시작하는 아침.

머리 위로 새벽 햇살이 들이친다.

김건은 산중에 마련된 평평한 연무장에 서 있었다.

하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말쑥한 전투복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금발금안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높은 마력적성으로 유명한 프레이저 가문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스스로 가문을 떠나 홀로 최강의 자리에 선 자였다.

군계일학, 티리온 프레이저가 김건의 앞에 있었다.

“그럼 시작할까.”

티리온이 장검을 들어 올렸다.

날이 없는 연무용 검. 하지만 어설픈 물건은 아니다. 번쩍거리는 강철의 검신이 시리게 빛났다.

김건이 쥔 것은 티리온과 똑같은 검이었다.

손잡이를 다잡은 김건은 기수식을 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동시에 안쪽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갑옷과 만년설식의 마력이 전신을 감쌌다.

티리온 역시 강체술을 시전했다. 금빛으로 번득이는 오라의 근육이 피부 위를 덮어 갔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스타일이 비슷했다.

사량발천근의 고수, 에디 슐츠처럼 속공으로 밀고 들어가 기세로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흡과 행동을 읽고, 역공을 먹이는 것이 주된 전투법이다.

그러므로 서로 공격을 내밀지는 않았다.

천천히 상대를 관찰하며 간격을 계산하고, 몸의 중심을 이동시켜 거짓 의도를 내비친다.

그것에 맞춰 상대가 움직이면, 다시 한번 자세와 무게 중심에 변화를 주어 다음 경로를 계산한다.

쏴아아아─

바람 소리가 수풀을 흔들고 지나갔다.

싸움이 시작된 지 수십 초가 지났다.

칼 한 번 부딪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이미 수십 합의 교전이 끝났다.

집중력이 고조된다.

기합 한 번 지르지 않았는데 몸에서 흐른 땀이 수증기가 되어 하얀 김을 뿌렸다.

누가 먼저 상대의 빈틈을 포착하느냐, 누가 더 깊이 상대의 수를 읽느냐.

“…….”

먼저 균형을 깬 것은 김건이었다.

중단에 세웠던 칼날을 내린다.

자세를 변경. 칼을 하단에 위치시켜 상단의 방어를 비웠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라 식의 도발이다.

티리온의 심리가 이어진다.

상대의 도발을 상회하는 속도와 타이밍으로 상단을 깨부술 것인가.

상단에 허초를 날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움직임의 빈틈을 찌를 것인가.

도발을 무시하고 완전히 다른 형태의 공격으로 흐름을 이쪽으로 가져올 것인가.

떠오르는 수는 수십 가지.

티리온은 스스로의 반응속도와 검술을 믿었다.

“흡!”

호흡을 내뱉는다.

전신의 근육이 수축. 전사의 육체가 가속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일순을 가로질러 김건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야말로 벼락 같은 일격.

단순히 내려치는 것이 아니라 중간의 발걸음에 체중이동의 혼선을 끼워 넣어 상대가 측면에서의 공격으로 착각하게끔 만들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머리를 내리치는 속도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수를 읽을 줄 아는 고수라면 측면으로 날아오는 허초에 속아, 머리가 터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김건은 대응했다.

카강!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간 칼날. 상단의 공격을 흘려내며 그대로 검극을 티리온에게 찔러 넣었다.

준비는 길었다.

하지만 승부는 일순이었다.

김건이 질러 낸 일검이 티리온의 목 아래에 드리워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