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03화
다음 날, 김건은 알리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반전화는 전혀 받지를 않아서 아내에게 넘겨받은 직통 번호를 사용했다.
한참이나 수신음이 울려서야 겨우 통화가 연결되었다.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업무 과다로 전화 응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필요하신 사안이 있다면 메일로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김건은 그것이 비서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비서가 통화를 끊기 전에 얼른 말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엘리 씨. 김건입니다.”
아, 하고 당황스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엘리는 순식간에 잦아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 화신님의 부군 분……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괜찮습니다. 알리시아 씨와 통화가 가능할까요? 바쁜건 알지만 꼭 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서 통화가 끊어지고 다시금 수신음이 이어졌다.
잠시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다. 웬일이지? 네가 전화를 다 하고.”
한서리의 앞에서야 주군의 남편이니 꼬박꼬박 존대를 했지만 그 외의 경우에 알리시아는 항상 김건에게 하대를 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더 편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몇 번이나 같이 싸운 사이다. 마주칠 일은 많지 않지만 두 사람은 언제나 편하게 서로를 대했다.
김건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런 걸 여쭤봐도 될까 싶습니다만…… 최근 선계에 뭔가 변화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그냥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닌가 보군.”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노바 선배에게 들어 보니 최근에 급격하게 마계화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아서, 원인 분석을 위해 선계 측의 협력을 얻고 싶다고 하더군요.”
음, 알리시아는 신음 소리를 냈다.
“노바라, 알지. 예전에 몇 번 본적도 있고. 굉장한 학자라는 건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었나 보군. 아직 인간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쪽에서 뭔가 수를 쓴겁니까?”
“그래, 가속화된 게 아니야. 일부러 가속화시킨 거지. 우리 세계의 기술로 지구 곳곳에 장치를 박아 뒀어. 그것 때문에 마계화가 빨라진 거야.”
이번에는 김건 측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권속화 때문입니까?”
“권속화를 알고 있나? 그럼 이해하기 쉽겠군. 그래, 그것 때문이야. 이 세계를 선계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마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야 해. 그걸 위해 일부러 손을 얹은 거지.”
이 세상을 선계에 포함시킨다.
그것은 선계의 구조를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켜 세상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편입시켜 버리는 티아마트와 벨제불과 달리, 기린의 선계는 여러 세상으로 분할되어 존재했다.
즉, 선계라는 것은 수많은 세상들의 집합체.
마치 아홉 세계를 가지로 잇고 있는 신화 속의 세계수, 위그드라실과 비슷하다.
알리시아의 고향 역시 선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직 인간들은 그러한 선계의 구조를 모른다.
아마도 알리시아는 그것을 한서리가 김건에게 알려 준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사실 김건과 한서리가 회귀하기 전의 인류가 밝혀낸 정보였다.
선계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기린과의 계약이 필요하다.
그 정확한 평가 기준은 모른다. 어떠한 조건을 만족하면 기린 측에서 먼저 세상 전체에 권속화의 계약을 제안한다.
그렇게 하여 세상의 의지가 기린과의 계약에 찬동하게되면, 계약의 힘으로 세상 자체가 선계와 연결되어 기린의 힘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안쪽의 생명들은 자연스럽게 기린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김건은 아내가 왜 권속화를 노리는지 알고 있었다.
선계와 연결되면 기린의 힘으로 인해 명계와 투계의 침략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자연 현상, 중립의 위치를 고수하는 억지력과는 다르다.
기린은 확실한 의지를 갖고 스스로의 세상을 지킨다.
그렇기에 회귀 전의 인류는 최후의 수단으로 기린의 권속화 계획을 추진했다. 다만 기린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실패했을 뿐.
그 시도는 결국 최악의 흐름으로 치달아 결국 기린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것이 김건이 기억하는 회귀 전 인류의 마지막 행보였다.
아무래도 알리시아는 지금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김건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계화를 시도하면 억지력이 약해져서 다시 티아마트와 벨제불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텐데요.”
“괜찮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류의 발전 속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라. 우리 측에서도 대비를 하고 있고. 지금의 전력이라면 저번처럼 반신이 나타나더라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어.”
티아마트와 벨제불이 약화된 지금이, 오히려 권속화를 시도할 절호의 찬스야.
알리시아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김건이 다시금 물었다.
“지금 인간 측에서 권속화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확히는 나도 몰라. 팀장님이 권속화에 찬동하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 밑작업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게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진행이 됐다면 인간들 중에 몇 명이나 지금 상황을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알리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아직 인간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팀장님이 기린의 화신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쪽뿐이고, 나를 통해 인간들에게 따로 접촉을 지시한 것도 아니니까.”
“…….”
김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이내 알리시아가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차라리 팀장님께 물어보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할 텐데.”
김건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말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요.”
그는 수화기에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회귀 전에는 뭔가를 숨길 여유가 없었고, 회귀 후에는 아는 게 없어서 숨길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긴 일상을 거치며 그에게는 여유가 생겼고, 지금의 생활을 잃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까지 생겼다.
그렇다 보니 뭐랄까, 부부 관계에 대해서 날것 대 날것으로 부딪혔던 과거보다 비교적 조심스러워진 부분이 있었다.
김건은 조심스럽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고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잘된 일이로군.”
알리시아는 단언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김건은 조금 얼빠진 소리를 냈다.
“잘된…… 일이라고요?”
큭큭, 알리시아가 웃었다.
겁이라는 걸 모르는 싸움광이 왠지 주눅이 들어 보이길래 괜히 걱정했다.
그녀는 보다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와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하나 물어보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혼인을 몇 번이나 했는지 아나?”
김건이 알기로 알리시아의 나이는 1300을 넘었다. 그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 말했다.
“글쎄요. 용족은 워낙 오래 살아서 주기적으로 이름이나 신분을 바꿔 가며 새 삶을 살아간다는 말은 들었는데…… 두 번, 세 번 정도인가요?”
“순진하군. 정확히 12번이다. 그중에서도 혼인 생활을 백 년을 넘긴 건 한 번 밖에 없어.”
“……생각보다 많네요.”
알리시아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나 정도면 적은 편이야. 내 친구들 중에는 100번을 넘게 혼인한 녀석도 있어. 그건 녀석이 심한 편이지만…… 하여튼 그렇다. 누군가랑 같이 사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
“내가 이래 봬도 천 년을 넘게 살았어. 그런 내가 말하는 거니까 믿어라. 넌 괜찮아. 다들 그러고 산다.”
알리시아는 자신감 있게 이야기했다.
“부부라고, 사이가 좋다고 모든 걸 공유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애초에 다른 사람이니까 서로 같아질 수가 없어. 오히려 억지로 서로의 관계성을 더욱 밀접하게 가져가려고 하다가 무너지는 경우를 더 많이 봤다. 적당히 서로 비밀도 있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는 게 훨씬 더 좋아. 그리고 그게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다. 아마 팀장님이 이 건에 대해서 네게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도 너와 비슷한 이유에서일 거다.”
김건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알리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너랑 팀장님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 지금까지 여러 번 혼인을 했지만 너랑 팀장님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길게 이어 간 적은 거의 없었다. 굳이 짚어 봐야 한 번…… 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끝나 버렸지. 백 년이나 함께 하다 보니 서로에게 질려 버려서 말이야.”
“……그렇군요.”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했군. 하여튼, 내가 생각하기에 두 사람 사이에 문제는 없어.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문제야. 팀장님을 봐라, 3년 전의 팀장님과 지금의 팀장님을 대조해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뭐가 바뀌었습니까? 전 잘모르겠는데요.”
“그건 네가 항상 붙어 있어서 그런 거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완전히 달라. 예전의 팀장님은 항상 삐친 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보다는 부드러워진 것 같긴 하네요.”
“조금이 아니야.”
알리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말했다.
“능력도 있고,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그때의 팀장님은 여유가 없었어. 아랫사람의 잘못을 감싸 주는 포용력도, 남의 사정을 봐주는 배려심도 극도로 적었지. 그분에게 아랫사람은 그냥 시킨 걸 수행하는 장기말일 뿐이었어.”
알리시아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였다. 말을 하며 과거를 돌아보다 보니 무언가에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굳이 내 입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위태위태했지. 너라는 지지대가 없으면 바로 쓰러져 죽어 버릴 것만 같은 위태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여유가 생기셨어. 엄한 건 여전하지만 내면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있어. 강해지셨다. 그분보다 수십 배를 많이 산 내가 계속해서 그분을 따를 정도로.”
“…….”
“그리고 그건 모두 네 공이다.”
알리시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단언했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해라. 그게 곧 팀장님이 원하는 거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건은 한참이나 입에서 혀를 굴리다가 겨우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런 식으로 격려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요.”
알리시아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맨날 아이 취급만 받았으니까. 때로는 나잇값을 해야지.”
그렇게 으쓱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아이 같아서 김건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