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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18화 (118/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18화

인간이든, 용족이든, 이 땅에 강림한 여섯 화신과 여섯 세계를 홀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대는 명확한 적.

그들이 용왕을 요구했다고 해서 무작정 그녀를 바치려 하는 것은 그저 자중지란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협의했다.

지난 일이 어찌 되었든,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고 난 뒤에 이야기하자고.

그리고 머리를 모았다. 어떻게든 힘을 합쳐서, 여섯 선계의 침략을 물리칠 계획을 짜낼 셈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현실성 있는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두 종족이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도 있었다. 상대측 정령이 말한 기한까지, 앞으로 삼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용왕을 그들에게 바치는 것. 아니, 용왕이 제 발로 그들에게 가 주는 게 우리에게 남은 최선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한 남자였다.

계속해서 용왕을 제물로 바치자고 주장하는 강경파의 인물.

“어디서 그런 개소릴…….”

그 말을 들은 아크룩스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그새 멀쩡해진 팔을 내리쳐 탁상을 부수려다 한서리의 눈짓을 보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한번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적의 말을 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을 할 거면 그 전에 군사 지원 요청서에 사인이나 해 주시오.”

“미안합니다. 쓸데없는 데에 전력을 낭비하는 취미는 없어서요.”

농담하듯 답하는 남자의 태도에 아크룩스가 이를 갈았다.

남자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아주 강력한 군권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는 자기주장만 피력할 뿐,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이 자리에 나타난 건 그저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용족들과 힘을 합쳐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주장하는 자들도 지긋지긋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싶어서 듣는 게 아닙니다. 남은 방도가 그것밖에 없을 뿐이죠. 그게 싫다면 말해 보세요. 지금 상황을 해결할 대안을.”

“…….”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장내의 분위기가 남자에게 넘어갔다.

“일단은 우리가 용왕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년에 걸쳐 발할라에 숨어서 암약한 사람이에요. 지금이야 약한 척하지만 뒤로 무슨 음모를 꾸며뒀을지 모릅니다.”

“음모는 무슨, 그딴 걸 계획할 여유가 있었다면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고 있지도 않을 거요.”

아크룩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문득,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걸 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탁자에 맞게 평평하게 달라붙어 있는 터치 패널을 조작해 한 파일을 회의실의 디스플레이에 띄웠다.

“보신 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선계의 구조를 연구하는 한 학자의 논문입니다.”

“뭔지는 압니다.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선계대응본부 내부에 배부된 내용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노제가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는,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고 꺼져라.’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유를 잃지 않고 말했다.

“대응본부에 배부된 건 선계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요약본일 뿐이라 빠진 내용이 많습니다. 그렇게 빠진 내용을 잘 살펴보면 꽤 재미있는 개념이 등장하는데요.”

남자의 눈은 매서웠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매 같다.

그 눈이, 한서리에게 향했다.

“바로 ‘권속화’라는 겁니다.”

“…….”

한서리는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

“……권속화? 그게 뭡니까?”

남자는 자료를 넘겨 가며 설명했다.

“선계가 여러 세계가 모여 이루어진 다차원 세계라는 건 알려져 있죠. 하지만 그 여러 세계가 각각 어디서 왔는지, 어디선가 왔다면 어떤 방식으로 선계라는 세계로 통합이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권속화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계속해서 자료가 떠오른다.

척 봐서는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명제와 공식들이 떠오르며 남자가 설명을 이었다. 그것을 보는 모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이해했기에, 그것들이 가리키는 결론을 눈치챘기에 섬뜩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마친 남자는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정리했다.

“즉, 기린과 세계를 지배하는 선주 종족의 계약으로 세계는 선계에 포함된다. 그 계약을 수락한 선주 종족은 기린의 권속이 되며…….”

뒤이어 나올 말을 예상한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켰다. 남자는 냉담한 어조로 마지막 말을 맺었다.

“기린의 권속은, 계약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기린을 따르게 된다. 마치, 벨제불을 따르는 마인들처럼. 용족들의 그 충정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는 거지요.”

“이놈이……!”

흥분한 용족 몇몇이 호통을 치려는 것을 한서리가 말렸다.

그러자 흐르는 침묵.

용족을 제외한 모두가 흘끔흘끔, 조용히 앉아 있는 한서리를 곁눈질했다.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긴장감이 흘렀다.

그 긴장감에 방점을 찍듯, 남자가 말했다.

“용왕님, 권속화라는 것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신격을 드러내지 않은 한서리는 파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뇨. 지금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기린의 화신이라는 자가, 이런 선계의 기본 법칙조차 모른다니.”

“화신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니까요. 누군가가 화신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가르쳐 준 적도 없고요.”

“용족은 당신의 권속아닙니까? 권속화에 대해 모르는데 계약을 어떻게 맺었죠?”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권리와 책임을 양도받았을 뿐.”

“언제, 어떻게 화신이 되었는지는 아직도 밝힐 생각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정보입니다.”

한서리와 남자는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정말 뻔뻔하시군요. 계속 해서 시치미를 떼실 줄이야.”

남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아래로 손을 가져가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렸다.

“그럼 이건 뭡니까?”

그것은 언뜻, 말뚝처럼 생긴 금속덩어리였다. 최근에 수인들이 들고 다니던 마력장 발생기와 닮았다.

남자가 부연 설명을 했다.

“마력장 발생기를 회수하고 다니다가 발견한겁니다. 수인들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죠. 조사 결과, 이건, 마계화를 가속시키는 물건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 그는 금속덩어리의 표면에 그려진 마법진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였다.

“권속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계약의 대상이 되는 세계가 일정 수준 이상 마계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논문에 적혀 있더군요. 아무래도 그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문지르고 있는 마법진.

그것은, 용족의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이렇게 용족들이 이것을 박아 놓은 걸 보면요.”

“설마 진짜……!”

실제 물증이 나오자 반응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서 저것을 해명해 보라는 듯이 한서리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한서리가 입을 열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뭔……!”

그것은 이야기를 꺼낸 남자마저 ‘진짜 모르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까지와 일관된 반응이었다.

한서리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물건의 존재 자체만으로 그걸 우리가 설치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아요. 대체 그걸 우리가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요? 이 세계에 숨어서 날뛰고 있는 건 수인과 악마들입니다. 특히나 악마는 벌써 수년전부터 이곳에서 활동해 오며 많은 것을 해 왔죠. 자신들의 세상에서 고립된 그들이 용족의 물건을 사용해 일을 벌였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

“이번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는 대응본부에 연락 한 번 없으셨던 분이 나타나셨길래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더니…… 하는 말 하나하나가 내분을 불러일으키는 말이군요.”

순간적으로 발생한 신격에, 파란 눈이 은색으로 물든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전해지는 기린의 통찰안. 그것이 남자를 향했다.

“혹시나 싶어서 여쭤보는 것입니다만,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받은 정보로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건 아닙니까?”

“…….”

정곡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곧 웃으며 그런 일은 없다는 듯 시치미를 땠지만 반응이 늦었다.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남자가 지금 꺼낸 주장이, 그 스스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한심한 자를 보는 시선이 그를 향했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이를 갈며 굴욕을 견디는 모습니다.

다시 한번 한서리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선발대로 벌써 몇 년 전부터 악마들을 풀어 이 세계의 정보를 수집해 왔고, 저를 데려오라 한 것도 그쪽, 제 정체를 알려 준 것도 그쪽입니다. 힘만 있는 게 아니라, 정보를 무기로 쓸 줄도 아는 자들입니다. 그 사실을 항상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모두를 향한 말.

그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잦아들었다. 타이밍 좋게 노제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건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일단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도록 하죠. 모두들 조금 지친 듯하니, 잠시 휴식을 한 뒤 회의를 재개하겠습니다.”

휴식 시간이 선언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서며 삼삼오오 모여 귀엣말을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서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넘어갔지만, 남자가 꺼낸 정보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권속화라는 개념을 알린 것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에는 기린을 향한 불신이 생겼을 것이다.

권속이 되는 입장에서는 기린이 주는 개목걸이를 차고 그의 애완동물이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 세부적인 계약 내용을 조정하면 약간의 제약만을 지닌 채 권속이 될 수 있다 해도, 믿기는커녕 의심만 더 강해지겠지.

거기에 증거로 들이밀어진 마계화 가속 장치.

이전에 회수 명령을 내렸으나 시간의 경과에 따른 지형의 변화로 찾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제 말로는 수인들의 마력장 발생기를 회수하다 찾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서리가 마계화 가속장치를 설치해 둔 곳은 모두 마리아나 해구에 비견할 만큼 사람이 없는 오지였기 때문이다.

도심에 숨어 다니는 수인들의 행동 범위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저 물건이 어떤 경로를 통해 남자에게 흘러갔을지는 뻔했다.

‘언뜻, 그냥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그냥 내준 것 같지만 그게 아니야.’

계속해서 정보 공작이 일어나고 있다.

한서리의 눈이 장내를 휩쓸었다.

어쩌면 이 어딘가에도, 놈들의 눈이 있고, 귀가 있을지도 모른다.

‘용왕을 그들에게 바치는 것. 아니, 용왕이 제 발로 그들에게 가주는 게 우리에게 남은 최선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와 인간들에게 한 말.

하지만 그것은 한서리에게 이렇게 들렸다.

‘네게 벗어날 길 따윈 없어.’

웃기지 마, 라고 생각하며 한서리는 이를 악물었다.

* * *

히말라야 산맥 중앙.

거대 게이트 마법진으로 인해 주변 봉우리가 모두 무너져 평야가 되어 버린 한 분지.

그 가운데에 커다란 왕좌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은, 각 선계를 대표하는 기린의 화신들이었다.

그중 한 명, 최강의 수인이자 모든 수인들을 통솔하는 자, ‘검은 벼락‘이라는 이름 대신 스스로를 늑대왕이라 칭하는 자가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벌써 4일이나 지났어, 애초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면 벌써 다 끝났을 일이라고.”

그는 그러면서 여러 왕좌의 가운데에 위치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보석 의자에 앉아 있는 화염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온몸을 화염으로 두른 보석의 기사,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정령을 죽여 마검에 담았다 하는 남자는 아그니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그니스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력을 보전하기 위함이다. 고작 일주일 때문에 아까운 군사들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

“전력? 그게 아까우면 그냥 당신이 직접 나서면 되잖아? 전력이 아까운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가?”

이죽거리는 늑대왕.

아그니스의 양옆에 앉아 있는 악마와 그린스킨이 그것을 듣고 각각 호통을 쏟아 냈다.

“입 닥쳐라. 늑대. 아그니스 님의 행동에는 항상 뜻이 있다. 넌 그저 따르기만 하면 돼.”

붉은 피부를 황동색 철갑으로 가린 여악마가 입에서 불꽃을 토하며 말했다.

“짐승 같은 놈. 네 부하들이 벌써 수천이나 죽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싸우려 드나?”

하얗게 센 머리칼을 갖고 있는 그린스킨이 거대한 완갑을 들썩이며 욕설을 내뱉는다. 그는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늑대왕을 바라보았다.

‘잔소리꾼들이 또 난리군.’

늑대왕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이빨 사이를 긁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말했다.

“뭐, 그 이야기는 됐고. 이번 화신으로 만든 여의주는 내가 가지고 싶어. 슬슬 더 힘을 늘리고 싶거든.”

“뭐? 여의주를 늘려? 주제를 모르는군.”

그 말을 들은 그린스킨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루비처럼 붉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아그니스의 두 눈이 늑대왕을 향했다.

“넌 이미 화신이며, 하나의 여의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 더 늘리겠다고? 네 자아로 기린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그래, 충분해.”

늑대왕이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잠시. 크루루루, 기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늑대왕은 고개를 돌렸다. 그 소리는 옆에 앉은 기괴한 문어 괴물에게서 들려오고 있었다.

문어의 머리에 턱에는 촉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 아래로는 질척한 점액질이 흐르는 피부를 가진 근육질의 몸이 있다.

심해 괴물, 크투그아라는 종족의 근원이자 전부인 최상위 개체, 크투그아가 섬뜩한 텔레파시를 쏘았다.

<<버티지 못해도 상관없어. 기린에게 의식을 빼앗기면 그대로 죽여서 여의주로 만들면 될 터. 아무런 문제없지.>>

늑대왕은 코웃음을 쳤다.

“그럴 일은 없어. 설령 일어난다 해도 아그니스에게 죽지, 너한테는 안 죽어.”

가볍게 크투그아의 말을 받아친 늑대왕은 계속해서 촉수 안쪽으로 뭔가를 우적우적 씹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 코끝을 찡긋거렸다.

“빌어먹을, 식사는 좀 밖에 나가서 하면 안 되냐? 냄새 나 죽겠군.”

그러자 크투그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촉수 아래쪽에 달린 원형의 입을 벌려 트림을 했다. 그 안쪽으로부터 부식되다 남은 잔해가 와르르 쏟아진다.

생선부터 시작해서 육지 동물, 심지어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뼈가 바닥에 쌓였다.

어마어마한 악취가 사방에 풍기며 후각이 둔한 몇몇 종족을 제외한 모든 화신들이 코를 막았다.

크투그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보고 웃었다.

<<할 것도 없는데, 식사라도 해야지.>>

코끝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다.

이 중에서 제일 후각이 민감한 늑대왕은 냄새를 차단하기 위해 마법까지 사용해야만 했다. 벌떡 일어난 그의 손끝으로부터 길쭉한 손톱이 칼날처럼 튀어나왔다.

“이런 썩을! 뒈지고 싶냐? 이 자리에서 썩은 횟조각으로 만들어 줄까?”

아무렇지도 않게 살기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지진이 일었다.

모두의 시선이 굉음의 진원지로 향한다. 그곳에 있는 금속으로부터 노호성이 쏟아졌다.

“시간 낭비 시간 낭비 시간 낭비요! 이미 대오가 흐트러졌지 않소!”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인, 기가스의 대표였다. 금속질로 된 입술이 벌어지며 흘러나오는 기계음에 짜증이 섞였다.

“용족과 화신을 원한다면 그냥 가서 빼앗아 오면 될 것을, 쓸데없이 시간을 주는 이유가 뭐요? 이 세계의 선주 종족은 나약하기 그지없어. 전투가 벌어져도 별다른 피해는 없을 거요.”

그 말에 여악마가 반박했다.

“그 나약한 선주 종족한테 우리 선발대가 전멸당했어. 내가 심어 두었던 아이들도 하나둘 색출당하고 있고. 앞으로 공략해야 할 선계가 수백 수천 개인데, 그걸 다 일일이 힘으로 깨부술 건가? 모두 온전히 흡수해도 모자랄판에. 지하 속에 파묻혀서 길바닥만 깔았던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마.”

기가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나약한 당신 종족들이나 그런 거고. 말만 하시오. 당장 내 동족들을 보내서…… “

“타타리고.”

아그니스의 한마디.

그것이 흘러나오는 순간, 혼란스럽던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그니스의 몸을 이루고 있는 불꽃이 조용히 넘실거렸다. 그의 주변이 붉게 물든다. 과열된 공기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말라붙은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돌가루가 튀었다.

아그니스가 말했다.

“지저에 가라앉아 있던 네게 힘을 준 게 누구지?”

“…….”

“잘못된 진화 때문에 스스로 멸종해 가던 너희 종족에게 다른 선계의 힘을 건네주고,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게 누구지?”

타타리고는 침음했다. 금속거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이오.”

“그럼 다시 묻지. 내 판단에 불만이 있나?”

그 말은 언뜻 타타리고에게 하는 말처럼 보였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타타리고가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삐딱한 태도를 보이던 늑대왕도 조용하다. 크투그아 역시 식사를 멈췄다.

잠시 후, 타타리고가 말했다.

“없소. 잠자코 기다리리다.”

그러면서 금속의 거인이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에서 울리던 엔진 소리가 꺼졌다.

거인이 침묵. 스스로의 동력을 꺼서 잠들어 버린 것이다.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리고 아그니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들 마음이 급한 것 같으니, 슬슬 나도 움직여야겠군.”

그러면서 공간이동 마법이 준비되었다. 마력탐지로 좌표를 검색하고 있는 그에게 여악마가 공손히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를 만나러 간다. 그를 내 손아귀에 쥐는 것이, 이 세계로 온 가장 큰 목적이니까.”

‘그’를 부르는 아그니스의 어조에는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을 감지한 여악마의 눈썹이 문득,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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