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19화
아그니스의 시선이 여악마에게로 향한다.
“뭔가 문제가 있나? 파이몬.”
파이몬은 서둘러 일그러진 표정을 지우곤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이시군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아그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라. 다만,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파이몬이 부복한다. 그 옆으로 늑대왕이 섰다.
“나도 따라갈래. 심심하기도 하고, 멀리서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거든. 아그니스가 인정한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어.”
아그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말과 같았다. 늑대왕은 ‘너도 갈 테냐?’ 라는 표정으로 크투그아를 돌아보았다.
<<난 됐어. 별로 흥미가 없으니까.>>
그린스킨도 고개를 저었다.
“우리 군대의 피해가 꽤 심해서 정비가 필요해. 다녀들 오시오.”
갈 인원이 정해졌다.
파이몬과 늑대왕이 아그니스의 옆에 섰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아그니스가 좌표값을 설정했다.
공간 이동이 발동.
황금빛이 번쩍이며 세 화신이 분지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김건이 머물고 있는 별장은 인적이 드문 산중에 있었다.
겉보기에는 방탕한 부자나 살 법한 화려한 저택.
하지만 저택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무거웠다.
“후우…….”
저택의 문이 열리며 세라스가 나왔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옆의 테라스에 앉아 있던 티리온이 물었다.
“좀 어때?”
그는 그러면서 따뜻한 차 한잔을 따라 세라스에게 건네었다. 세라스는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
“……안 좋아요. 겉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상심이 큰 것 같아요.”
티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미친 괴물들이 아내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는 와중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나라도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환멸을 느낄 거야. 지금까지 내가 뭘 위해 그렇게 노력을 해 왔나 하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친구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들을 방해하기만 할 뿐.
세라스는 찻잔을 꽉 쥐었다.
그때, 문득 들고 있는 찻잔에 파문이 번졌다.
“……!?”
세라스와 티리온이 고개를 쳐든다.
그리고 동시에 중력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파르르, 탁자가 부르르 떨림과 동시에 그리고 엄청난 존재감이 주변의 숲을 휘감았다.
놀란 세라스와 티리온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발견했다.
공간을 가르고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화신을.
그들을 보자마자 두 사람은 확신했다.
저들이, 이 세계를 침범한 주범들이라고.
“…….”
세라스와 티리온, 아수라를 포함해 티아마트의 반신과도 맞서 싸운 두 사람은 세 화신의 신격에도 주눅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표정에 강력한 투기와 적대감이 피어올랐다.
여차하면 그대로 덤빌 기세로까지 자세를 잡는다.
하지만, 인류 최강이라고도 불릴 두 사람의 기세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우측에 선 악마도, 좌측에 선 늑대인간 때문도 아니었다. 가운데에 선 화염의 기사, 그가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를 보는 순간, 세라스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그 무엇을 마주했어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벨제불의 화신이나 티아마트의 반신을 눈앞에 두었어도 그저 그 압도적인 힘의 크기에 전율했을 뿐, 그것이 곧 어떠한 패배감으로 직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오르고 있는 불꽃의 갑주를 본 순간.
‘졌다.’
세라스는 이미 자신이 패배했음을 강렬하게 깨달았다.
티리온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화신을 지켜보는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세라스와 티리온은 둘 다 고도의 실력을 지닌 전사였다. 0.1초, 0.1밀리미터의 차이로 목숨이 오가고, 인생의 의미가 결정되는 미시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주 작은 정보에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런 그들에게는, 눈앞에 선 괴물의 모든 것이 흉기처럼 느껴졌다.
서 있는 자세, 걸음걸이, 숨을 쉬는 간격, 눈알의 움직임.
그것 하나하나가 새파란 칼날이 되어 그들의 감각을 난도질했다.
‘이건, 아무리 김건이라도…… 안 돼……!’
세라스는 입술을 강하게 씹었다.
피부가 찢어지는 짜릿한 고통, 그리고 피에 섞인 쇠의 맛이 정신을 일깨웠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혀끝을 세게 깨물었는지 피를 뱉어 내는 티리온이 보였다.
두 사람은 세 화신의 앞을 막았다. 티리온이 나섰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아직 협상이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함부로 설치고 다니면 곤란해.”
그러자 우측에 선 여악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 감히 누구 앞이라고…….”
흥분해서 튀어나오는 목소리를 화염의 기사가 막았다. 아그니스가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라. 지금 진행되고 있는 건 협상이 아니야. 그저 내가 자비를 베풀어 너희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지.”
엄밀히 말해 틀린 말은 아니다.
이를 가는 티리온. 아그니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그저 저 안의 남자와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차분히 이야기를 하는 데 방해되니,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잠시 비켜 주겠나?”
그 말을 들은 티리온과 세라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돌았다.
세라스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를 찾지? 아니, 어떻게 그에 대해서 알지?”
“말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너희들은 그냥 조용히 비켜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서 그들을 지나치려고 한다.
“…….”
티리온과 세라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판단이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무기를 빼 들었다. 세라스가 떨리는 손을 바로잡으며 아그니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는 못하지. 우리가 받은 임무는, 그를 지키는 것이거든.”
“벌레만도 못한 힘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무의미한 일이다.”
아그니스는 한숨을 쉬었지만 티리온과 세라스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설령 여기서 죽더라도, 그냥은 못 보내.’
그것이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갸륵한 놈들이군. 죽이는 재미가 있겠는데.”
큭큭, 웃는 소리와 함께 잠자코 있던 늑대왕이 앞으로 나섰다. 아그니스도, 파이몬도 이번에는 그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정령만큼은 아니지만 무시 못할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화신의 등장에 세라스와 티리온이 긴장된 숨을 들이켜고, 서로의 살기가 충돌하려는 찰나.
끼익.
뒤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언뜻 수수해 보이기만 하는 남자.
별다른 힘도, 별다른 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빈틈이나 약점이 보이지도 않는다.
블랙홀 마냥 이쪽이 보내는 신호를 모두 흡수해 버리니, 그저 정체불명의 무저갱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 기이한 기색을 발견한 늑대왕의 표정에 흥미가 감돌고, 파이몬은 질투로 이글거리는 눈을 향했다.
김건이, 무심한 눈으로 아그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그니스 역시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묵묵히 세 화신을 관찰하는 김건.
화신들의 표정으로,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옮겨 이쪽을 향해 열심히 신호를 보내고 있는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절대 안 돼!’
손짓과 표정으로 강력한 부정을 표하는 세라스. 표정을 보아하니 티리온도 비슷한 의견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그 말을 따라봐야 남는 것은 피와 죽음뿐이다.
과거 마인협회의 레이나에게 살육자의 냄새를 맡았듯이, 그는 먼발치에 서 있는 아그니스가 품고 있는 살기를 읽었다.
불꽃으로 몸을 두른 보석의 기사에게서는, 학살자의 냄새가 풍겼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 백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대로라면 그에게는 영웅이라는 칭호 수백 개를 붙여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무술을 갈고닦은 김건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부정해야 할 괴물.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대화를 신청하고 있었다.
“…….”
클라우보다 더하다.
놈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김건은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굳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와. 안에서 이야기하지.”
* * *
별장에 들어서기 전에 아그니스가 말했다.
“자리를 비워 주겠나?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군.”
“……비켜 주세요. 어차피 이놈이 뭘 하든 막을 순 없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세라스, 티리온, 엘리는 각각 납득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조심하라는 말만을 남긴 채 나머지 두 화신과 함께 별장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별장 안의 거실에는 아그니스와 김건만이 남았다.
정령의 불길은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소파 위에 앉았는데도 타는 냄새 하나 나지 않았다.
김건은 그저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인간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니 차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저 침착한 눈으로 자신과 이야기 하고 싶다 말한 괴물을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아그니스가 손을 휘둘렀다.
주변 공간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보이지 않는 결계가 펼쳐졌다. 김건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아그니스가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주변의 간섭을 차단한 불의 정령은 물끄러미 김건을 지켜보았다.
불로 이루어진 그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다만 보석으로 만들어진 눈의 움직임으로 겨우 감정의 조각을 읽어 낼 뿐이다.
김건의 눈에 그런 정령의 보석 눈이 문득, 웃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로군. 되돌린 시간은, 즐겁게 즐기고 있나?”
가볍게 건네진 한마디.
하지만 그 한마디는 철퇴가 되어 김건의 머리를 때려 부쉈다.
“……!!”
김건의 눈이 확장한다.
순간적으로 내리꽂힌 사실이라는 이름의 벼락이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오랜만.
그리고 되돌린 시간.
아그니스가 한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첫째, 그와 김건은 구면이다.
둘째, 그는 김건이 회귀를 거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이 회귀한 한서리를 제외하고,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었다.
“넌…… 기린인가?”
신음 소리와 같이 흘러나온 질문.
그 말에, 아그니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