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20화
기린이지만, 기린이 아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김건의 얼굴이 의문에 가득 차자 아그니스가 말했다.
“마신이라는 것이 여러 인격체의 집합체라는 건 아나?”
김건은 과거, 마인협회의 박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화신이라면 지금까지 많이 만나 봤으니까. 그리고 그 여러 인격의 대표 격인 주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군.”
“주인격에 대한 개념이 있나. 그러면 이야기가 편하겠군.”
아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주인격. 말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간단하다. 기린의 힘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자. 인간으로 치자면 왕과 같다고 할 수 있겠군.”
“…….”
“그리고 화신들은 모두 주인격이 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오로지 주인격만이 기린의 힘을 온전히 다루고, 그것으로 스스로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아그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등 뒤에서 잠깐 떼어 두었던 보석의 대검을 들어 바닥에 내리찍었다.
커다란 크로스 가드 때문에 마치 십자가처럼 보이는 대검이 비석처럼 바로 섰다.
그리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무것도 아닌 소파가 왕좌로 보인다. 그저 평범할 뿐이던 별장의 거실에 궁전의 알현실 같은 공기가 깔렸다.
그 모든 것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전사의 위압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그니스가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마계의 통일이다.”
“……뭐?”
김건은 순간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되물었지만 아그니스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필멸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할 수 있는 가장 큰 꿈을 꾸는 것이 당연하지.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선계를 넘어 명계, 그리고 투계까지 굴복시키고 이 세계의 패자가 되는 것이다.”
“…….”
김건이 살짝 입을 벌렸다. 그는 눈앞의 화신이 하는 말의 스케일에 질려 버렸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기린의 주인격이 될 필요가 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선계의 힘을 통합하지 못하면 벨제불이나 티아마트와 맞서 싸울 수 없으니까.”
“미쳤군.”
김건은 짧게 아그니스의 말에 대해 평론을 내렸다. 하지만 아그니스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나. 상관없다.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니.”
김건은 기시감을 느꼈다. 문득 몇 년 전, 클라우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분위기. 하는 말은 제대로 맞물리지 않고, 그저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자아를 부딪혀 온다.
하지만 클라우와 눈앞의 괴물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클라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몰랐다. 그렇기에 타인은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행동 어딘가에 순수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클라우가 자각이 없는 괴물이라면, 눈앞의 남자는 스스로를 긍정한 괴물이었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길을 관철해 나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아그니스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주인격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온 선계를 떠돌며 화신을 사냥하고 다녔지. 그들을 죽이고, 그들이 갖고 있던 기린의 힘과 권한을 빼앗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화신을 흡수해 많은 힘을 다루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주인격보다 더 강해질 것이고, 궁극적으로 기린의 주권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김건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드러나지 않고 있던 적의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아그니스를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 아내를 원하는 건가.”
“그렇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가 조금 달라.”
아그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정보가 극도로 부족한 김건은 혀를 차며 그의 설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과거, 나는 계속해서 힘을 불려 수많은 화신을 흡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 그게 뭔지 아나?”
“왜,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려 체하기라도 했나?”
김건이 이죽거렸다. 아그니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군. 맞다. 많은 화신을 흡수하다 보니, 기린의 능력이 너무 강해져 버렸어. 그래서 문제가 생겼지.”
아그니스는 팔짱을 꼈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불꽃 속에 박혀 있는 보석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본다.
“벨제불의 능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티아마트의 능력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이라 한다면, 기린의 힘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힘이다. 기린의 인지 능력은 시공간 너머에 있다. 그걸 제대로 깨닫게 되면 시간과 거리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들리고 모든 것이 보인다.”
말소리가 잦아든다. 눈살을 좁힌 것처럼 보석 눈이 가느다랗게 변하고, 아그니스가 중얼거렸다.
“그건 필멸자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우주의 탄생이 보이고, 우주의 멸망이 느껴진다. 분자 구름에서 시작한 항성이, 태양이 되었다가, 적생거성이 되고, 초신성폭발을 거쳐 중성자별이 되어 가는 억겁의 과정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그저 먼지에 불과해. 하지만 그런 것들의 일생까지도 모조리 알 수 있지.”
김건은 그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그니스가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지 이해는 했으나, 공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기린의 힘이 가진 위험성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삼계통일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며, 그 무엇 하나 두려울 것 없을 것 같던 괴물의 목소리에 작게나마 공포가 섞여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니 알겠더군. 기린이 왜 다른 마신들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선계에만 틀어박혀 법칙대로만 움직이는지.”
잠깐 잦아들었던 불길이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불꽃 속에서 아그니스의 눈이 김건을 향했다.
“모든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아니, 도리어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결말은 결국 무(無)로 정해져 있으니, 모든 것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지.”
“…….”
“아마도 세 마신 중 가장 신에 가까운 건 오히려 기린일 거다. 놈에 비하면 티아마트나 벨제불은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야. 그 힘은 강대할지언정, 최소한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해 있지는 않으니까.”
잠시 아그니스의 말이 멎었다.
그는 옆에 세워 놓은 대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린의 진정한 힘을 마주한 순간, 난 그 정보량에 먹혀 버렸다.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니,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인지할 수 없었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
“삼라만상을 깨달은 자에게 삼계를 통일하겠다는 목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난 그대로 모든 욕망을 잃어버렸다. 너희들 식으로 말하면 등선이나, 해탈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군.”
씁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폼멜의 뒷부분을 만지던 손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내가 주인격이라고 생각했던 건, 인격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기린이라는 이름의 짐승이었을 뿐이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잃은 채, 기린의 의식에 뒤섞여 표류할 뿐이었다.”
대검을 만지던 손이 그 위를 떠난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이, 김건에게로 향했다.
“네가, 기린의 신체를 날려 버리기 전까진 말이야.”
“뭐? 그렇다면 네놈이 바로…….”
“그래, 네가 이전 생에서 마지막으로 맞서 싸웠던 것은 기린 그 자체가 아니야. 내가 덩치를 불려 놓은, 조금 큰 화신체였을 뿐이지.”
회귀하기 전에 전 인류와 맞서 싸웠던 기린.
그것의 정체가 눈앞의 화신이라니.
김건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기에는 앞에 앉아 있는 화염의 기사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네가 화신체를 소멸시키는 순간, 나는 기린의 주박으로부터 풀려났다. 스스로를 자각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 하지만 내 정보를 담을 육체가 소멸해 버렸기에, 온 선계에 흩어져 있는 기린의 힘 일부를 붙잡아 버티는 것이 한계였지.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났다면 그대로 사라져 버렸을 거다. 하지만 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겨우 다시 찾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아그니스의 눈에 열망이 꿈틀거렸다.
한 번 기린의 힘에 먹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알고 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앞을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인간이 보이더군.”
그 말이 맺어지는 순간, 김건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억지력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이곳을 여섯 개나 되는 선계가 침략해 왔는지,
어떻게 선계의 침략자들이 아내의 정체를 알아냈는지,
그리고 어떻게 눈앞의 괴물이 김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는지,
김건은 이제야 모든 사건의 전말을 이해했다.
그의 입으로부터 신음 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약을 신청해, 회귀를 시도한 게 네놈이었군.”
아그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는 그 방법뿐이었다. 네 아내를 화신으로 만들고, 그 육체를 매개체로 기린의 힘을 그러모아 의식을 전송할 뿐인 시간 역행을 시도했다. 계약대로 네 아내와, 너의 의식까지 묶어서 말이야.”
“시간 역행에 따른 억지력의 저항은 없었나?”
“있었지.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엄청난 후폭풍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걸 맞은 건 기린의 주인격이야. 역행 자체는 내 의사로 이루어졌지만 그걸 실현시킨 건 기린의 힘이었으니까. 억지력은 기린의 가장 많은 힘을 담고 있는 주인격을 그 대가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것 같더군. 나와 한서리와의 계약도 시간 역행과 주인격의 파괴에 정보 주체가 흐려져서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고.”
김건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흘렸다.
“운이 좋았군. 네 좋을 대로 모든 상황이 이루어지다니.”
“완벽하지는 않다는 거지. 억지력도, 기린도.”
이제 대강의 상황은 모두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것을 못 들었다. 김건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곳에 온 목적은?”
아그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삼계통일이라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린의 힘을 통합하는 건 필수 불가결적인 요소야.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어. 그래서 연구를 했다. 이건 그 결과물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소파 뒤에서 호위하듯이 그의 등을 떠돌고 있는 구슬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날아와 그 위에 내려앉았다.
“이건 기린의 화신이다. 여의주라고 부르지. 인격과 신격이 섞인 화신이라는 것으로부터 순수한 기능만을 남긴채 나머지 것을 거세해 버린 것이다.”
그것을 듣자마자 김건의 표정이 변했다.
“너…….”
“그래, 한서리를 이렇게 만들 생각이다.”
“…….”
지금껏 아무리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져도 냉정을 유지하던 김건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깊게 아그니스를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아그니스는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살기를 품었다는 것을 당연스럽게 알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웃었다.
“그렇게 화낼 필요 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한서리를 여의주로 만드는 미래는 나타나지 않았어.”
아그니스는 손을 흔들어 여의주를 치웠다.
“그건 네가 앞으로 할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