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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4화 (124/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24화

반파된 별장을 빠져나온 아그니스는 난장판이 되어 있는 주변과 저편의 폐허에 쓰러져서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늑대왕을 보고는 눈매가 예리해졌다.

그 언짢은 기분을 나타내듯, 갑옷을 두르고 있는 화염이 조용히 화력을 더했다.

퍼져 나오는 열기에 주변에 널린 별장의 잔해가 연기를 뿜으며 검게 타 스러졌다.

그는 파이몬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례한 짓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말에 파이몬의 붉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곧장 부복했다.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떨며 사죄의 말을 뱉어 냈다.

“죄송합니다. 미처 늑대왕을 제지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아그니스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 널린 파괴의 흔적. 하지만 세라스와 티리온, 그리고 엘리가 멀쩡히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숨을 쉬었다.

“됐다. 별다른 피해는 준 것 같지 않으니, 물건에 대한 변상은 다른 것으로 하지.”

그는 바로 파이몬을 향한 관심을 끊었다. 그러고는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는 김건에게 고개를 향했다.

엄청난 힘의 차이를 직시하고서도 여전히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남자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컥, 헉……!”

김건은 겨우 끊어질 듯이 이어지던 폐의 호흡을 골랐다.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상당히 내상이 큰지 횡경막이 찌르르르 울렸다. 목구멍에 피가 넘치고, 지독한 고통이 올라왔다.

하지만 몸의 아픔 따윈 어찌 되든 좋다. 그는 정면에 서 있는 화염의 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방금 전, 별장 안에서 벌어진 짧은 전투.

그 속에서 불꽃의 정령은 그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첫째, 그의 전투 기술과 기량은 김건보다 위에 있다.

그리고 둘째, 그가 가진 능력.

육체는 물론이요, 마력, 감각을 포함한 모든 전투 관련 기능의 스펙은 김건보다 수백, 수천 배 위에 있었다.

그저 가벼운 일격을 한 방 맞은 것만으로도 김건은 그림자의 갑옷과 버프를 소실. 미극공진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투 능력을 잃어버렸다.

등 뒤에 떠다니는 네 개의 여의주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다.

지금 김건이 살아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그니스가 봐준 것뿐이었다.

만약 제대로 살의를 담아 쳤다면 이미 김건은 이 세상에 먼지 하나 남지 않고 소멸했을 것이다.

그래도 김건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그니스에게는 급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극공진동을 완벽하게 파해하지 못했다.

김건을 신하로 삼겠다는 목표도 있으니 쉬이 그를 죽일 기술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일 기회가 있다.

어떻게든 접근만 하면…….

그때, 아그니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날던 두개의 여의주가 반응. 여의주가 빛을 뿌리며 마법진을 분출함과 동시에, 김건 주변의 공간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

김건은 그것을 시인하자마자 몸을 움직였지만 늦었다.

측면으로 움직이다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튕겨져 나왔다.

바로 작은 진동을 쏘아 벽의 강도, 그리고 재질을 탐색하려 시도해 봤지만 되돌아오는 파형이 없었다.

“결계를 쳐 공간을 단절시켰다. 내가 직접 해제하지 않는 이상 넌 빠져나오지 못할 거다.”

직접 손을 대어 보이지 않는 벽을 만져 본 김건은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벽에는 질감이 없었다.

애초에 감촉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뭔가 있다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물질을 만진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감각이었다.

공간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김건에게는 아그니스의 모습이 보이고 그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그런 제어를 위해 대체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시공간 제어 기술이 사용되었을지, 김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그니스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무력화된 김건의 앞에 섰다.

보석의 눈이 지그시 김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네 힘으로 나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

그는 그러면서 허리춤을 만졌다.

갑주의 걸쇠에는 몇몇 무기들이 꽂혀 덜렁거리고 있었는데, 아그니스는 그중 하나를 뽑아 바닥에 던졌다.

그것은 붉은 보석을 깎아 만든 단검이었다.

반투명한 보석의 안쪽으로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빛이 있다. 길이도 매우 짧고, 칼 막이도 없는 것으로 보아 들고 싸우라고 만들어진 무기 같지는 않았다.

그것을 본 파이몬이 깜짝 놀랐다.

“아그니스 님! 그것은……!”

아그니스가 손을 들어 파이몬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차분히 말했다.

“이건 내 애병 중 하나다. 마력을 사용해 공간 좌표를 입력하면 자체적으로 순간이동을 가능케 하는 무구지. 잘만 사용하면 항성 간 이동까지 가능하니, 꽤 쓸모가 있을 거다.”

“…….”

“부숴 버린 물건에 대한 변상, 그리고 부하가 벌인 무례를 사과하는 의미에서 놓고 가마. 그리고 이미 내 본진의 공간 좌표가 입력되어 있다. 만약에 마음이 바뀐다면, 그걸 사용해 내게 와라. 인간들에게 준 유예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널 신하로서 맞이하겠다.”

“…….”

김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공간의 장벽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석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만한 힘의 차이를 보였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그니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볍게 웃어 보이곤 겨우 몸을 재구축해 폐허에서 몸을 일으키는 늑대왕과 파이몬을 손짓해 불렀다.

등 뒤에 그 두 사람을 세워 놓고는 마지막으로 김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고 있겠다.”

황금빛이 번쩍였다. 일그러진 공간이 세 화신을 감싸더니, 한순간에 그 모습이 사라지며 허공만이 남았다.

주변에 흐르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김건은 그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자신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진동을 사용해 몸의 상태를 확인하니 갈비뼈 4개가 골절, 비장이 파열, 대장에 천공이 생겨 혈액이 역류하고 있었다.

진동을 사용해 어느 정도 내장의 상태를 관리할 수 없는 김건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중상이었다.

휘이잉 하고 바람이 불었다.

플레어의 연발과 정령의 열기, 그리고 고속 이동의 마찰로 인해 주변은 이미 불바다였다.

타닥타닥 부서진 별장을 태우던 불꽃이 점차 크기를 키우고, 짙게 깔린 음영이 남은 사람들을 덮었다.

“빌어먹을!”

장난감 취급을 당한 세라스가 땅을 쳤다.

“…….”

간만에 벌인 혈투로 모든 힘이 빠져나간 티리온은 이제야 겨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부군님!”

놀라 달려온 엘리가 김건을 부축하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김건은, 천천히 손을 뻗어 땅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쥐었다.

‘네가 내 신하가 된다면, 네 아내를 놓아주마. 인간들도 그대로 놔두지.’

삼계를 통일하겠다 말하는 괴물이 남긴 말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

입가에 번지는 핏방울이 붉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칼날 위에 떨어지며 진득한 혈흔을 남겼다.

김건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손에 쥔 단검을 바라보았다.

* * *

선계의 침략자들이 준 유예 시간이 다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한서리는 홀로 용왕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조명이 강한 회의실에서 지낸지라 눈의 피로가 심했다.

그녀는 별다른 조명도 켜지 않고 한쪽에 열린 작은 창에 시야를 의지한 채 어두컴컴한 집무실의 소파에 등을 기댔다.

회의는 모두 취소된 상태였다.

아무리 지혜를 짜내고, 아무리 계락을 모색해 봐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한서리는 어젯밤, 노제 프레데리카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모든 회의가 취소되기 전, 잠깐 있었던 휴식 시간.

따로 한서리를 불러낸 노제 프레데리카는 둘만이 존재하는 방 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난 네게 희생하라는 말은 못해. 아니, 안 할 거야.”

티아마트 공략전의 뒤처리, 무너진 체계에 따라가기 위한 발할라의 개편, 그리고 사무총장의 역임 등 계속해서 격무에 시달린 노제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날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바짝 날이 서서 전성기 때처럼 형형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는 똑바로 한서리를 주시하며 말했다.

“어차피 이 세계는 온통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어. 여기서 타협해서, 널 바친다면 인류는 잠깐 생을 연장할 수 있겠지. 그러면 그다음은?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또 다른 요구를 한다면? 힘에 굴복해서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에만 급급한 인류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

한서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못하겠지. 또 빼앗길 거야. 그렇게 빼앗기고, 빼앗기다 보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안 남게 될 거야.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목숨마저도, 결국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기겠지.”

그것은 평생 동안 인류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마신들과 싸워 온 사람이 내린 결론이었다.

한서리는 그 말에 담긴 무게에 그저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사적인 자리에서, 한서리는 항상 노제를 교수라고 불렀다.

노제만큼 발할라의 교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고, 사이먼이 실각한 이후로 그녀가 발할라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노제는 한서리의 어깨를 잡았다.

“난 네가 우리의 희망이라고 생각해. 넌 기린의 화신이면서도 여전히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어. 그건 어떻게 말하면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지. 이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네 능력이 반드시 필요해.”

그 생각은 한서리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었기에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한서리는 인간들이 세 마신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화신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용족들을 이 세계에 끌어들이고, 권속화 등의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노제가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황금색으로 도금되어 있는 화려한 나침반이었다.

그 안에 새겨진 마법진과 마계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동체를 보아, 자기장이 아니라 마력의 파장을 감지하는 종류의 아티팩트로 보였다.

“이게 뭐죠?”

“건이가 머물고 있는 별장은 내가 준비해 둔 은신처야. 한 곳도 아니고, 티리온과 세라스에게 지시해서 계속 위치를 바꾸도록 했지. 그건 그 위치를 찾기 위한 추적기야. 전파가 끊겨 연락도 안 되고, 크투그아의 중화 파장이 강해서 지금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지만…… 너라면 이걸 사용해서 건이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거야.”

남은 유예 시간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선계의 침략자들은 천천히 인류의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통신 차단은 그중 하나였다. 마법으로 펼쳐진 전파 재밍, 그리고 심해 생물인 크투그아가 마법의 술식을 흐트러트리는 초음파까지 전 지구에 걸쳐 뿌려 대고 있었기에 고도의 마법 기술이 필요한 원거리 통신, 혹은 원거리 이동은 전부 막혔다.

지구라는 행성이 넓은 고립무원이 된 상황이다.

노제는 직접 한서리의 손을 펴서 나침반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 그 손을 양손으로 감싸 주며 말했다.

“도망치렴. 건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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