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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5화 (125/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25화

노제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냉혹하던 한서리의 얼굴에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도망…… 치라고요?”

노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계는 이곳과는 다르게 억지력이 없어. 기린의 화신이라면 선계를, 어쩌면 투계와 명계를 넘나들 수도 있겠지. 너희 두 사람이 작정하고 도망치면 아무리 세력이 커도 잡기가 쉽진 않을 거야. 그렇게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러면 설령 여기서 우리가 다 죽더라도, 너희는 살 수 있어. 인류는 여전히 이 세계를 살아가게 되는 거야.”

노제가 이를 깨문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독할 정도로 처절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인륜을 저버리고, 자존심도, 긍지도 없이 목숨만 부지하다 멸망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지.”

노제는 한서리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제 회의 따윈 의미 없어. 모든 건 네 선택에 달려 있는 거야.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네 의견을 존중할게. 그러니 이제 가. 놈들이 널 잡으러 오고 있으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중력 방벽이 주변에 펼쳐졌다.

그다음은, 뻔했다.

한서리를 잡아 침략자들에게 바치려 하는 자들이 무력을 휘둘러 왔고, 전투가 벌어졌다.

한서리는 그들과 맞서 싸우며 용족들을 데리고 후퇴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화신을 잡을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한서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면 아마 상당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고, 그건 인간과 용족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골을 만들었을 것이다.

노제와 그녀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기에 한서리와 용족들은 비교적 쉽게 그 장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화신의 힘으로 크투그아의 마력파장을 뚫고 순간이동을 시전, 용족의 마을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유는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방위군의 일부가 마을을 급습해 왔기 때문이다.

용왕의 집무실은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기에 조용했지만 지금도 밖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최대한 온건한 방법으로 제압하라고는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하겠지.’

한서리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 측은 지금 죽느냐 사느냐, 멸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자신의, 그리고 가족의 목숨 앞에서 알량한 이성이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다. 감정에 물든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해 올 것이고, 그러다 보면 반드시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한다.

그런 희생이 기폭제가 되어 더욱 크고 강렬한 감정이 폭발하게 되면…… 용족과 인간 사이에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참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쪽 다 파멸한다.

그러니 한서리는 그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조용히 고민을 거듭했다.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무난하고 적당한 것 따윈 없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리스크를 가진 극단적인 수단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요소를 고려하며 어떤 것이 정답에 가까운 답인지를 찾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단 하나.

또 한 번, 또 한 번 재고했지만 그녀는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게, 선택지를 쥔 자의 고통이라는 거구나.’

한서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과거로 돌아온 남편이 왜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 주기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소개하며, 메리안과 세라스와의 접점을 만들고,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노력을 거듭했는지.

걱정되는 것이다.

의외로 고통스럽지는 않다.

다만 걱정된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어서 숨이 다 막힌다. 마치 가슴에 천금을 올려 둔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하지만 한서리는 그 압박을 이겨 냈다.

먼 과거, 돌아오기 이전.

뭣도 모르고 모두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만 행동해던 때와는 다르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훨씬 더 단호하고 강인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감상 따위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움직여야 했다.

한서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해야…….”

혼자서 중얼거리던 입이 문득 멈췄다. 그녀는 행동을 멈추고 뭔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자 미칠 듯이 가슴이 아파 왔다.

하지만 참는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바로 마법을 사용해 바깥에서 싸우고 있을 알리시아를 호출했다.

* * *

김건 일행은 계속해서 이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별장에서 저 별장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지역 전체를 돌았다.

티리온과 세라스는 비행선을, 김건은 본체화한 엘리를 타고 움직였다.

외부와의 연락은 차단되었다. 통화도 먹통이고, 마법을 이용한 통신은 물론이요, 몇몇 별장에 있는 게이트 장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았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이제는 시간도 없었다. 불의 정령이 한서리를 데려오라고 고지한 시간까지 앞으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김건이 말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김건, 티리온, 세라스, 그리고 엘리가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외부와 연락을 취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쪽에는 김건을 제외하더라도 날 수 있는 엘리와 비행선, 필요하다면 자동차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전위도 둘이나 있었다.

방법을 고안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획을 정리한 그들이 준비겸 휴식 시간을 갖고 있을 때였다.

며칠전, 화신이 나타났을 때처럼 중력이 변화했다.

밖의 테라스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던 세라스와 티리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황금빛과 함께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한서리였다.

이제 위장은 완전히 포기했는지, 그녀는 화신으로서의 힘을 나타내듯 반짝이는 은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몸 주위에 넘실거리는 신격이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견 따윈 어찌 되든 좋았다.

세라스에게는 걱정했던 친구가 몸성히 나타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한서리!”

그녀는 얼른 뛰어나가 한서리의 손을 잡았다. 간만에 잡는 친구의 손. 그 온기에 안도하며 물었다.

“김건을 데리러 온 거야?”

한서리가 화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첫번째 만남이었지만 여전히 세라스의 표정은 살가웠다. 한서리는 그 따뜻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법을 찾았거든.”

정면으로 싸워서는 절대 못 이길것 같은 그 괴물들을 상대로 방법을 찾았단다.

세라스는 ‘역시 내 친구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물었다.

“그게 뭔데?”

“워낙 복잡한 작전이라…… 조금 있다가 말해 줄게.”

그렇게 대답한 한서리는 은근히 별장 쪽을 눈짓해 보였다.

세라스는 금방 그 의미를 알아챘다. 그녀는 김건과 한서리, 두 사람이 꽤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보고 싶겠지.

아마 김건도 한서리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녀는 얼른 길을 비켜 주었다. 큰 목소리로 김건을 부르려 하는데, 그것을 한서리가 막았다.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그이의 도움이 조금 필요해. 그래서 따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어? 악마종들이 워낙 설치고 있어서 정보는 최대한 제한하고 있거든.”

“어…… 그래. 알았어.”

세라스는 얼마나 보안을 철저히 하려고 이 정도까지 하나 싶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대체 그 작전이 뭐길래…….”

티리온은 조금 불만이 있는 듯싶었으나 굳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한서리는 그들의 배려에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곤 별장의 문으로 다가갔다.

보안 키로 문을 열기 직전에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살짝 뒤로 돌아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지금까지 숨겨서.”

목소리가 어둡다.

그 자존심 높은 한서리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세라스는 그 진심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괜찮아. 그걸 알아 봐야 나만 힘들어졌겠지. 너희들에게 큰 도움도 안 됐을 테고.”

“…….”

“하지만 다음에는 꼭 말해 줘. 힘들어도 괜찮아. 별 도움을 못 주더라도, 최소한 너희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는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한서리의 눈썹이 떨렸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입을 벌리고 말을 망설인다. 그녀는 이내 이를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말한 한서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를 본 엘리가 펄쩍 뛰었다.

“용왕님……!”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서리를 맞이했다.

한서리는 그런 엘리의 손을 한번 꼭 쉬어 준 뒤, 부드러운 말로 잠깐 나가 있으라 말했다.

그렇게 엘리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야 한서리와 김건은 온전히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김건이 웃었다.

“금방 데리러 온다더니, 꽤 오래 걸렸잖아.”

“미안해, 요즘 좀 바빴거든.”

가볍게 남편의 농을 받아친 한서리는 두팔을 벌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을 하며 그간의 외로움을 달랬다.

남편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한껏 체향을 들이킨 한서리가 이내 살짝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잠깐 앉자. 할 말이 있어.”

“할 말…….”

뭔가를 느낀 듯, 김건의 눈썹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아내가 권하는 대로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한서리 역시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지그시 남편을 바라보았다.

별장의 내부는 깨끗했다. 잔잔한 조명이 옅게 깔려 있고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가구가 반짝반짝 광을 냈다.

새집 느낌이 물씬 나는 공간.

언뜻 보기에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편히 있기에는 왠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삭막한 공기 속에서 한서리는 두서없이 말했다.

“내가 가기로 했어.”

툭,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

하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의 충격은 컸다.

음속의 속도에 대응하고, 보이지도 않는 영역에서의 공격도 피해 내는 전사가 순간 바보 같은 얼굴이 되었다.

“……간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김건은 방금 전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되물었다. 그에 한서리는 침착하게 대답해 주었다.

“놈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바치기로 했어.”

그 순간, 김건의 얼굴이 종잇조각처럼 짜그라졌다.

“……! ……!!”

명경지수라고 해도 어울릴 인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하얗게 질렸다가를 반복했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눈이 초점을 찾지 못했다.

김건은 한참이나 혼란 속에 빠져 헤맸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입가에서 주륵 피가 흘렀다. 아무래도 혀를 깨문 모양이었다.

김건은 말을 방해하는 피를 손바닥 위에 뱉어 냈다. 그러고는 가까스로 긁어모은 이성을 발휘해 물었다.

“왜?”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은발을 반짝이는 한서리,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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