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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6화 (126/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26화

방법이 없다.

김건은 거기다 대고 왜 방법이 없느냐, 어딘가에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다 등의 희망론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는 그의 아내가 그리 쉽게 포기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세상의 멸망을 겪고, 시간을 되돌리고, 기린의 화신이 되어서 벨제불과 티아마트와 싸우고 난 뒤에도 그다음 발걸음을 생각하며 움직이는 사람이다.

잠깐 넘어질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달려 나갈 여자다.

거기에 김건 역시 무너져 가는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불합리한 일은 너무나도 많고, 어쩔 수 없는 일이 수천수만 가지라는 것도 안다.

불가능한 건 존재했다.

그것을 알기에, 김건은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틀었다.

“가면…… 어떻게 될지는 아는 거야?”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크룩스한테 들었어. 날 물건으로 만들겠다고 하더군. 기린의 화신을 물질화시키는 기술이 있나 봐. 그걸로 화신의 힘과 계약의 권리를 갈취하는 거지.”

“…….”

한서리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방법이 없다 말했다면, 정말로 남은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다.

그렇기에 김건은 멍청한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정말로, 방법이 없어?”

“응. 이쪽 사정을 꿰뚫고 있는 데다가 사전 준비도 꽤 철저해. 전력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고.”

“…….”

“맞서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야. 애초에 놈들에게 인지당한 게 문제지. 노려진 순간 이미 끝이 난 거야. 대체 내가 무슨 실수를 했길래 놈들이 이곳을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통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한서리는 아그니스 일행이 김건을 만나고 갔다는 것을 몰랐다.

입이 근질거린다.

‘내가 신하가 되면, 당신과 사람들을 살려 주겠다고 했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한서리는 분명 지금 김건이 느끼는 것과 똑같은 심정이 될 것이다.

김건은 입술을 꾹 닫았다.

한서리가 이어 말했다.

“사실은, 노제 교수님이 도망치라고 했어. 당신과 함께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라고.”

“도망치라고…….”

“이곳을 떠나, 다른 선계로…… 그리도 또 다른 선계로 계속해서 도망치며 살아가는 거야. 난 화신이니까. 억지력이 없는 세계로의 게이트는 혼자서 열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말에 김건은.

‘그럼 그냥 도망치면 되잖아?’

라고 말하지 못했다.

한서리는 안다. 그가 그런 말을 쉽게 내뱉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한서리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게 우스웠다.

회귀 직후였다면, 아니, 티아마트를 쓰러트리는 그때까지였다면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남편과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 외의 존재 따윈, 그녀에게 먼지만큼의 가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에게는 남편 외에도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노제의 말이 맞다.

그저 살아남기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설령 남편과 함께 이곳에서 도망쳐서 생을 유지한다 해도,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남편은 점점 녹슬어 갈 것이다.

뱃속의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평생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서리 자신 역시, 분명히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스스로의 마음을, 그리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서리는 이 세계를 지켜야 했다.

문득 한서리가 웃었다.

“미안해. 지금까지 원망만 해서.”

“그게 무슨 소리야?”

김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서리가 한 사과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알았다.

다만, 깨닫는 것과 말하는 것이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김건은 아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되묻는 말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서리는 그런 김건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지금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것들 말이야.”

“…….”

“지금까지는 그럴 거면 그냥 같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남겨진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니까. 하지만 지금 비슷한 입장이 되어 보니까…… 당신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

한서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단단한 의지가 기린의 빛으로 물든 그녀의 눈에 비쳤다.

“지켜 주고 싶은 거야.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꿋꿋하게 살아가 주었으면 하는 거야.”

그것은 지금까지 김건이 항상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 왔다.

“고마워. 지금까지 몇 번이고 지켜 줘서. 미안해. 당신 마음도 모르고 매일같이 화만 내서.”

한서리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김건의 손등에 손을 겹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용서해 줘. 이번만큼은,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줘.”

그 한마디가, 김건의 입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과거의 기억, 과거에 그가 저질러 왔던 과오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아내를 버리고 죽음으로 도망쳤는가.

그 숫자를 떠올리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김건은 컥, 컥 숨 쉬기를 괴로워하며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한서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꽉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가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도 있고……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볼게. 애초에 그걸 위해 스스로 가는 거야.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강제로 끌려가면…… 협상이고 뭐고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할 테니까. 삼 년, 못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일 년정도, 그 정도면 마음 정리할 시간은 있을 거야.”

그렇게 달래보지만 그딴 걸로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한서리는 잘 알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 살아가는 이상, 언제나 불합리함과 마주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힘들고, 아프고, 화가 나도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

모든 걸 참으면서…….

한서리라고 지금의 상황에 울분이 치솟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신을 저주하고 하늘에 고함을 쳤는가. 하지만 한서리는 분노를 억눌렀다. 아직은 할 일이 있었으니까.

어쨌든 할 말은 다 했다.

그녀는 김건의 손을 놓았다.

“가 볼게. 나머지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자.”

몸을 일으키는 한서리.

그런 그녀의 팔을, 김건이 잡았다.

“…….”

한서리가 김건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김건, 그런 그에게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지 마…….”

말끝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말을 듣는 순간, 한서리의 가슴에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그동안 온갖 추한 꼴을 다 보이며 남편에게 의지만 해 왔던 한서리와 달리, 김건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끔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날 사랑하는 게 맞는 걸까?

여자로서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켜야 할 존재, 딸이나 여동생 정도로 귀엽게 여기는 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못난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로 꺼내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죽는 그날까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아아,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토록 강한 사람이, 세상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인지를 초월한 괴물들과 마주해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던 사람이.

저렇게 못난 얼굴을 보이며 구걸을 할 정도로, 내게 의지하고 있었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슬펐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이 넘쳐흘렀다.

한서리는 웃으며 김건을 끌어안았다. 그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속삭여 주었다.

“괜찮아. 잘될 거야. 그게 뭐든지.”

남편의 머리에 입술을 맞춘다.

한서리는 부드럽게 그의 턱을 돌렸다. 뜨거운 뺨을 어루만지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던져 주었다.

“그럼 다녀올게.”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몸을 흐르던 신격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풀썩 한서리가 쓰러졌다.

“……!?”

놀란 김건은 힘없이 늘어진 한서리의 몸을 안아 올렸다.

추욱 늘어지는 신체, 빠르게 체온이 빠져나갔다.

마치 시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김건은 힘없이 늘어지는 고개와 그 아래로 비치는 생기 없는 눈을 보고는 손에 쥐어져 있는 이것이, 알리시아가 다루는 인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나타난 뒤로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신격을 심어 그의 감각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는 것도.

아내는 이미 가 버린 것이다.

그를 내버려 두고.

인형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내가 자아낸 말의 여운이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김건은 떨리는 팔로 힘없이 늘어진 한서리의 흔적을 꽉 안았다.

이제야 이해했다.

버려진 자의 고통을, 홀로 남은 자의 아픔을.

미안해.

미안해.

몇 번이나 이런 고통을 겪게 해서, 몇 번이나 이런 울화를 참게해서.

몸을 웅크린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떨려오는 어깨, 들썩거리는 등.

김건은 울었다.

* * *

“이 녀석들…… 뭐 하나?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다른 사람들과 바깥에 앉아 있던 세라스가 투덜거렸다. 티리온은 여전히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그의 미심쩍어 하는 얼굴을 본 엘리가 뾰족하게 말했다.

“당신도 우리 용왕님을 못 믿는 건가요?”

티리온은 그런 소리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서리, 그 애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서리 표정이 안 좋았다고요? 전 그런 거 못 느꼈는데…….”

세라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조금 전에 봤던 한서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티리온은 피식 웃었다.

“의외로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변화를 잘 몰라. 너무 익숙하다 보니까 작은 차이는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거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티리온의 손목에 매달려 있던 시계가 울었다. 세라스는 그것이 통신이 왔을 때의 신호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차단되어 있던 통신이 복구됐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세라스와 엘리가 얼른 받아 보라며 티리온을 재촉한다. 티리온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수신자를 확인했다.

통화를 건 것이 특무대의 동료라는 것을 확인, 그리고 통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티리온? 티리온인가?>>

“그래, 나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통신은 왜 막혔고, 그 막혀 있던 건 갑자기 왜 뚫린 건데?”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당장 김건을 데리고 거기서 벗어나! 사무총장님이 붙잡히셨어, 그 심복들도…… 이 개자식들, 한서리가 제 발로 적진으로 들어갔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뭐!?”

믿을 수 없는 말의 연속에, 티리온이 크게 눈을 치켜떴다.

세라스와 엘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바라본 뒤 동시에 말했다.

“교수님이 왜 붙잡히…… 아니, 서리가 적진으로 갔다고?”

“용왕님이 스스로 놈들에게 가셨다고요?”

같은 특무과인 세라스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말했다.

<<전파 방해로 아무런 연락도 못 들은 모양이군. 그래, 한서리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스스로 놈들에게 가겠다고 이야기를 했어.>>

티리온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쏟아 냈다.

“아니, 그게 무슨…… 한서리는 지금 이곳에 있는데?”

<<거기에 왜 있어? 방금 놈들의 사절이 생성한 게이트로 한서리가 들어가는 모습을 내가 직접 봤는데?>>

“……!!”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세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곧장 별장으로 다가가 가볍게 외벽을 때려 보았다.

동시에 감각을 증폭. 청각을 극도로 강화시켜 퍼져 나가 소리가 돌아오는 것으로 내부의 상황을 확인했다.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안쪽에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나머지 한 명의 기척이 극도로 약해져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세라스는 바로 문을 박살 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거실의 바닥에 꿇어앉아 웅크리고 있는 김건과, 그가 안고 있는 한서리의 몸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라스는 김건이 안고 있는 것이, 사람도, 시체도 아닌 그 무언가라는 건 알았다.

이곳에 한서리는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이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 이, 거짓말쟁이가……!!”

사과했으면서, 분명히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말해 준다고 했으면서.

못된 계집애.

또 제멋대로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 버렸다.

온몸에 열이 끓어오르며 세라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인기척을 느낀 김건이 고개를 드는 순간 사라졌다.

“……!”

그런 김건의 모습을, 세라스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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