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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7화 (127/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27화

세라스에게 김건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F급 마력적성을 갖고 태어나, 온갖 불가능을 뚫어 낸 끝에 홀로 신을 멸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가 되었다.

김건은 그야말로 세라스가 상상하던 이상적인 전사의 모습이었다.

김건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와 같은 강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끝없이 달려왔다.

노력하고 단련하며, 완전무결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은 뒤에도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닦아 왔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떠들어도, 강해졌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김건의 아래였으니까.

세라스의 마음속에서 김건은 항상 최강이었다.

그 최강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고, 말끔하던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라스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저 그 못난 모습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김건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막상 마주하고 서면 막막한 느낌을 들게 하는, 김건만의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약해졌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김건의 숨소리, 심장 박동, 그리고 그의 다음 움직임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의 김건은 세라스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도 죽일 수 있었다.

세라스가 생각하기에, 무인은 검에 비유할 수 있었다.

세라스 자신은 커다란 중검이다.

날 때부터 크고 좋은 강철을 타고난 그녀는, 날을 조금 대충 갈아도, 설령 관리를 안 해 녹이 슬고 이빨이 빠져도 그 무게와 강도만으로도 칼로서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건은 다르다.

그를 이루고 있는 강철은 너무나도 작고, 볼품없어서 그가 검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날을 예리하게 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조그마한 강철 조각을 갈고, 갈고, 갈고 또 갈아서, 그 몸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깎아서, 모든 것을 베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해진 것이다.

설령, 한 번 사용하고 난 뒤에는 그 날이 모두 뭉개져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해도.

예리한 칼일수록 다루기가 어렵다.

조금만 잘못 다뤄도, 조금만 관리가 소홀해도 그 예기는 금세 빛을 잃고, 가벼운 충격만으로도 부러지거나 이가 빠져 버린다.

그리고 세라스는 김건의 칼날이 모두 뭉개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동경하던 예리한 빛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 버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라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웅크려 있던 김건이 후들거리면서도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려 하는 것을 본 뒤였다.

울면서 체력을 다 써 버린 모양이다.

김건의 몸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

마음이 미어진다. 나이가 들어, 스스로는 걷지도 못한 부모를 본 기분이었다.

세라스는 욱하는 감정을 눌러 참고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목이 막히는지, 김건은 신음 소리를 흘리다가 겨우 내뱉었다.

“……서리한테 가야겠어.”

“가서 어쩌게?”

“몰라.”

“갈 방법은 있어?”

“있어.”

그러면서 김건은 세라스의 부축을 받아 거실을 거닐었다.

한편에 놓여 있던 상자를 열자 붉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스는 바로 그것을 알아보았다.

“이건…… 그 정령이 주고 간 물건 아니야?”

김건은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 사용하면 놈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했어. 그러면 거기에, 서리도 있겠지.”

이전에 아그니스가 왔다 간 뒤에, 김건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놈들이 온 용건을 밝혔다.

그들은 여러 화신과 싸우고, 그들을 쓰러트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김건을 눈여겨보고 있으며, 만약 그가 신하가 되면 한서리와 인류의 목숨을 살려 준다 했다고.

그때, 범죄자들을 많이 상대해 본 티리온과 세라스는 코웃음을 쳤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세라스가 말했다.

“설마 네가 신하가 된다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건…….”

“안 해, 그런 생각은.”

김건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설령, 만에 하나 그들이 약속을 지킨다 해도, 김건은 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삼계통일이라는 헛소리를 위해 싸우다, 죽게 될 것이다.

그 꼴로는 또다시 아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뿐이다.

곧이어 통화를 마친 티리온과 엘리가 들어왔다.

“김건!”

“부군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둘 다 지금의 상황에 누군가를 배려할 여력이 없는 듯, 김건의 상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윽박지르듯이 물어 온다.

세라스는 마치 아이를 보호하듯 김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잠깐만요, 제가 이야기 할…… “

“괜찮아. 내가 말할게.”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김건은 세라스의 손을 거절하며 앞으로 나섰다.

“…….”

잠시 호흡을 고른다.

그러자 조금이나마 감정이 누그러든 모양인지 몸에 힘이 돌아오고, 굽어 있던 허리가 펴졌다.

“아내가 가 버렸습니다. 아까 온 건 인형이었어요.”

그 말에 엘리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형을 발견했다.

“저건…… 알리시아 언니의 것이네요. 제대로 다룰 수만 있으면, 사람이랑 거의 차이가 없는 물건이죠.”

인형이라는 말에 티리온이 문득 말을 꺼냈다.

“내 동료 중 한 명이 서리가 놈들에게 가는 모습을 봤다고 하던데…… 설마 그것도 인형인 건 아니겠지?”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어설픈 속임수가 통할 상대가 아니니까요.”

말을 잇던 김건은 이내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아마도 이야기를 하면 제가 막을 거라 생각해서, 인형을 보낸 거겠죠. 일부러 신격을 심어서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요.”

침묵이 흐른다.

한서리가 스스로의 희생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확정되자 모두들 말을 잊은 듯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티리온이 말했다.

“……그러면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사태는 일단락된 것 아닌가?”

그 말에 두 여자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삼촌!”

“이봐요!”

둘 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티리온을 쳐다봤다.

하지만 티리온은 냉정하게 말했다.

“화를 낸다고 어떻게 될 상황이 아니야. 서리도 아무생각 없이 간 건 아닐걸. 충분히 생각을 한 다음에도, 그게 옳다고 판단했으니까 간 거야. 엄청난 고민을 했을 테지. 그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각오를 무작정 무시할 셈이야?”

“하지만……!”

세라스는 이내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옆에 선 엘리 역시 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와중에 티리온은 냉랭한 시선으로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할 셈이야? 네가 가서 신하가 되겠다고 말하기라도 하려고?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짓은 소용없어.”

“안 합니다. 그런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럼 여기 가만히 있어. 최소한 이 일이 끝날 때 까지는. 그게 오히려 서리를 도와주는 일이니까. 그냥 감정에 휩싸여서 무작정 뭔가를 하려고 드는 건 민폐밖에 안 돼.”

“당신 정말……!”

계속해서 쏟아지는 차가운 말에 엘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로 화가 난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티리온을 쏘아봤다.

세라스 역시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꽉 쥐어진 티리온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언뜻 냉정해 보이기만 하는 티리온.

그 역시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참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의 감정이 격해졌다.

그 와중에 김건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잠시 후, 김건이 입을 열었다.

“……방법은 있어요.”

“방법? 그게 뭐야?”

세라스가 재빨리 물었다.

그리고 김건은 지금 생각해 낸 계획을 설명했다.

그것을 들은 세라스는 펄쩍 뛰었다.

“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성공해도 그러면 너희는 둘 다……!”

김건은 흥분한 세라스의 말을 끊었다.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저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지. 최소한, 놈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정도는 될 거야.”

그 말에는 계속해서 김건을 감싸던 세라스마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양손을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전히 싸늘한 눈초리를 한 티리온이 말했다.

“그렇게 위협을 가해서, 대체 뭐가 남는다는 거야? 괜히 놈들을 자극해 봐야 우리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애초에 너 스스로가 정상이 아니야. 지금 상태로 그 진동을 만들어 낼 수 있겠어?”

“…….”

김건은 말이 없었다.

티리온은 탄식을 토했다.

설령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이라 해도 앞에서는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 싸움꾼이라는 작자들이다.

그 정도 자신감이 있지 않다면, 목숨이 걸린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없다.

망설임이 생기고, 판단이 느려지며, 몸이 둔해진다.

그러면 결국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지금까지 티리온이 봐 온 김건은 이토록 자신 없는 자가 아니었다.

겸손함을 알기에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마어마한 자신감 덩어리였다.

자기 자신을 인류 최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의 김건은 달랐다.

말, 그것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무너져 있었다.

티리온은 ‘네가 가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라는 의미를 담아 김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건은 그 뜻을 저버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어요. 설령 그대로 보낸다 하더라도…… 그 말만큼은 하고 보내야겠습니다.”

부서진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고집스럽게도 말한다.

티리온의 얼굴에 더욱 짖은 음영이 꼈다. 그는 살짝 옆구리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가서 무슨 짓을 할지는 몰라. 하지만 분명히 그게 놈들에게 유쾌한 일은 아닐 거다. 그러면 그 선택으로 인류가 멸망해 버릴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가면 인류가 문제가 아니야. 서리의 각오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거야. 그래도 갈 거냐?”

짙은 살기가 피어오른다.

말을 함부로 했다간 정말로 죽일 기세였다.

“삼촌!”

이번에는 세라스마저 깜짝 놀랐다. 하지만 티리온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김건을 내려다보았다.

대답을 강요하는 눈.

잘못된 답변이 돌아오면 문답무용으로 검을 휘둘러 올 것 같은 삼엄함이 지금의 그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김건은 방금 전, 그의 실력에 대해 의문을 품었을 때와 달리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짧은 대답.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설령 인류가 멸망하고, 자기희생을 택한 한서리의 판단이 무의미해지더라도, 어떻게든 아내를 다시 만나야겠다.

그렇게, 부서진 남자는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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