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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8화 (128/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28화

“……!!”

저 바보가,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렸다.

김건의 말을 들은 세라스는 재빨리 김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쩌면 평소와 다른 기백을 뿜고 있는 티리온이 정말로 공격을 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리온은 바로 칼에서 손을 뗐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럼 가라. 그 정도 각오가 있다면야, 말릴 수 없지.”

“삼촌…….”

세라스가 티리온을 바라봤다.

티리온은 피식 웃었다.

“왜, 내가 공격이라도 할 줄 알았냐?”

“…….”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같길래, 압박을 해 본 거야. 이 정도 압박도 견디지 못하면 어차피 후회할 거고, 하고 후회할 거라면 안 하는 게 나으니까.”

티리온은 혀를 찼다.

“애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고작 그따위 협박에 굴복하고, 두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꼴이.”

항상 규칙을 지키고 상부의 명령에 충실한 티리온. 그런 그가 말했다.

“그렇게 죽기 싫었다면 마교 놈들이 말하는 것처럼 차라리 모두 마인이 되어서 벨제불에게 지배당하며 사는 게 나았을 거다. 자유야 없겠지만 죽진 않을 테고, 설령 죽더라도 두려움 따윈 느끼지 못할 테니까.”

충실했던 분, 그동안 쌓인 불만 역시 큰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노제 누님도 잡혔다 하니, 더 이상 그런 욕심쟁이들을 위해 지킬 의리는 없지.”

티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발할라가 건재했다면 이 정도까지 오진 않아을 텐데…….” 라 중얼거리며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서리에게 갈 수단은 있어? 게이트를 이용하려 해도 좌표값을 모르면 안 되잖아.”

그러자 김건은 손에 든 단검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있다고 놈이 말했습니다.”

티리온은 그 단검이 전에 방문했던 정령이 던져 주고 간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보곤 그가 혀를 찼다.

“그 이야기는 전에 나온 걸로 끝났다고 하더니…… “

놈들이 김건을 포섭하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신을 멸할 무기를 지닌 그이니, 포섭 대상이 되기로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 일은 김건의 거절로 끝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한번의 거절에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두 번째 기회까지 쥐어 주다니.

그 정도면 그저 단순히 능력만 보고 움직인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티리온은 세라스처럼 지인에게 무르지 않다. 그는 여전히 김건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번만큼은 봐주지.’

하지만 그것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왔다면, 믿기로 했으니 믿을 뿐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손속을 주고받고 세월을 함께하며 파악한 김건의 인간성에 기댈 뿐.

그는 김건이 믿을 수 있는 놈이라 판단한 스스로의 안목을 믿었다.

“그럼 바로 그걸로…….”

말을 잇던 와중, 티리온의 눈매가 바뀌었다.

“……!”

세라스 역시 반응. 두 전사는 바로 김건과 엘리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쿠웅.

중력이 올라갔다. 공간이동을 차단하는 중력 방벽이 발생함과 동시에 멀찍이서 다수의 기척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숲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증폭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리온! 세라스 프레이저! 김건을 구속해라! 한서리가 제대로 계약을 마치고 인류의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김건은 우리 지구방위군이 관리한다! 다시 한번 말한다! 김건을 구속하고 우리의 명령에 따라라!”

노제가 잡히며 권력을 갖고 있던 범지구사회연합 대신 지구방위군이 주권을 잡게 된 모양이다.

상황을 파악한 티리온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세라스.”

“알고 있어요.”

세라스의 눈이 금빛을 뿜었다. 이대로 방벽이 유지되면 김건은 한서리에게 가지 못한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체제는 이미 무너졌다.

그러니 이제부터 모든 판단은 그저 개인의 영역이다.

그리고 세라스와 티리온,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따를지 결론을 내렸다.

티리온이 검을 뽑았다.

그는 행사에서나 쓰일 예식용 기수식을 취하며 김건에게 경례를 했다.

“무슨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무운을 비마.”

그러고는 발을 박차고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세라스는 김건의 손을 꽉 쥐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돌아와. 서리와 함께.”

그리고 그녀 역시 사라졌다.

김건은 엘리와 함께 그 자리에 남았다.

엘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김건을 바라보았다. 김건은 단검을 쥐고 조용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바깥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뛰쳐나간 티리온과 세라스가 몰려온 지구방위군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중력이 정상화되며 방벽이 깨졌다.

공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되자 김건이 말했다.

“엘리 씨, 조금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마도구를 작동시킬 마력이 부족해요.”

“아…….”

엘리가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그녀가 따르는 주인의 남편이 마력의 축복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단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마력을 흘려넣어 살펴보니, 단검에 엄청난 마력과 진식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워낙 방대한 양인만큼 쓸데없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아주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엘리는 자신의 마력을 부어 그 잠금의 해제를 시도했다.

그동안 김건이 말했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노제 교수님이 실각하셨다니……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곧 돌아올 두 사람에게도 말해 보세요.”

“뭔가요?”

김건은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사항을 짧게 말했다. 엘리는 금방 그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어야 위협이 되겠군요.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됐어도 아직 인간 측과의 교류가 완전히 끊긴 건 아닙니다. 그동안 포섭해 둔 자들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말이 끝난 직후, 엘리가 단검의 마법을 작동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단검이 새빨간빛을 뿜어냈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콸콸 흐르고, 단검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짜여졌다.

김건은 그것을 들어 가볍게 앞의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그 궤적을 따라 불꽃이 꼬리를 늘이더니, 그것이 좌우로 갈라지며 공간을 찢고 게이트를 생성했다.

“…….”

김건은 잠시 그 공간의 틈새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뭐가 있을지,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가야 했다.

아직 던지지 못한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일말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게이트를 향해 막 발을 떼려는 찰나였다.

“부군님.”

엘리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김건은 고개를 돌려 아내의 충실한 비서를 바라보았다.

엘리는 똑바로 김건을 쳐다보았다.

“용왕님과 부군님. 전 두 분을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알리시아 언니처럼 함께 사선을 넘은 것도 아니고, 만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닙니다. 두 분이 안고 계신 고민도 모르고요.”

“…….”

“하지만 응원하고 있습니다. 종족을 떠나, 각자의 자리를 떠나, 감정을 가진 자로서 두 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두 분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수백 년 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떠오르거든요.”

엘리는 웃었다. 발을 떼어 살짝 물러난 그녀는 치마의 양 끝단을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신다면, 두 분께는 제가 직접 주조한 용족의 술을 대접해 드리고 싶군요.”

그녀는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김건은 저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렸다.

회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싫어하는 아내를 설득해 억지로 식사 자리를 잡았던 일이 떠올랐다.

네드, 그리고 메리안과 함께 했던 식사.

그 식사 자리에서 세라스와 인연을 나누었고,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눈앞의 엘리 역시 그중 하나였다.

멸망의 끝에서 돌아온 두 사람.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 세계에게 있어서 이방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에서 쌓아 온 인연이 무너지고 있는 김건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하아아아앗!”

멀리서 티리온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세라스가 뿜어낸 황금빛이 하늘을 꿰뚫고 솟구쳐 올랐다.

엘리는 발견했다. 조금이지만, 공허해져 있던 김건의 눈에 다시금 의지의 빛이 깃드는 것을.

김건은 엘리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엘리가 고개를 까딱여 마주 인사를 했다.

그리고 김건은 발을 내디뎌 게이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 * *

공간이동을 마치고 빠져나온 김건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을 의심케 하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얼추 보아도 수백 미터는 넘어 보이는 돌기둥들이 좌우로 뻗어 나와 회랑을 이루고 있었다.

멘탈과 지각을 뒤틀어 히말라야 산맥을 붕괴시키고 거대 마법진을 그리는 데에 성공한, 기가스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그를 향해 수많은 무기들이 겨누어졌다.

지면에서 솟아오른 촉수가 발밑을 어슬렁거리고, 악마의 것으로 예상되는 막대한 크기의 포구가 이쪽을 바라본다.

하늘 위에는 그린스킨들의 와이번이 날고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병력들이 득시글거리며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괴물들의 눈이 김건을 향했다. 수천, 수만의 살기가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포구가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가고 촉수가 가라앉았다.

김건을 향한 시선이 사라져 가며, 그를 향해 한 그린스킨이 다가왔다.

엄청난 덩치.

거기에 전신을 감싼 거대한 갑주로 인해 그린스킨은 마치 움직이는 로봇처럼 보였다.

“…….”

투구 속의 눈이 김건의 얼굴과 그가 손에 쥔 단검을 확인했다. 놈은 말없이 김건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김건은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그린스킨을 따라 빌딩만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회랑을 거닐며, 그 바깥쪽으로 김건은 이 세계를 침략한 자들의 본대를 처음으로 직관할 수 있었다.

거신이라 불러도 될 법한 거인들이 지축을 울리며 걸어다니고, 한쪽 면에 길게 펼쳐져 있는 능선이 왠지 새까맣다 싶더니 나팔소리와 함께 수천, 수만은 되어 보이는 와이번의 무리가 날아올랐다.

한편의 평야에서는 빨간 피부의 악마들이 마치 티아마트의 종속마냥 뒤얽혀서 서로 살육을 벌였고, 하늘은 주변에 펼쳐진 강력한 중력장 때문에 빛과 자기장이 굴절되어 괴이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를 안내한 그린스킨이 향한 곳은 일종의 연병장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다른 종족들과 달리 그린스킨은 꽤 체제가 잘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산을 깎아 만든 평야. 그 안에 수많은 그린스킨들이 도열하여 창을 꼬나쥐고 교관들의 지시 아래 훈련을 하고 있었다.

훈련에는 와이번 기수의 교육도 있는지, 수많은 그린스킨들이 번갈아 가며 와이번을 타고 오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인과 악마들도 와이번을 타고 오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린스킨은 김건에게 고개를 향하더니 그를 한 번 가리켰다가, 하늘 위를 나는 와이번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중력 방벽 때문에 순간이동이 막혀 있으니, 아무래도 주변 지역으로의 이동은 와이번을 통해 하는 모양이었다.

내용을 이해한 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스킨은 다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린스킨과 김건이 와이번이 도열해 있는 지면의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문득 그린스킨이 멈춰 섰다.

그는 정면에 있는 무언가와 김건을 돌아보더니 살짝 비켜섰다. 그러곤 김건에게 저기 보라는 듯 턱짓을 해 보였다.

왜 그런고 하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군.”

비행장으로 통하는 길.

부서진 암석을 대충 쌓아 만들어진 도로가의 바위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찰랑이는 금발을 한데 모아 말꼬리처럼 늘어트렸다.

깜빡이는 녹색 눈은 마치 파충류의 것처럼 동공이 세로로 갈라져 있고, 화려한 용족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이 철컥철컥 움직였다.

한서리의 심복.

알리시아 비칸테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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