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29화
김건은 갑옷 차림의 알리시아를 처음 보았다.
항상 양복을 입거나, 대충 걸친 추리닝 차림으로 사무에 치이는 모습만 보다 보니 잊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아내가 이끄는 용기사의 필두이며.
위기에 처한 용족이 그 운명을 맡기고 처음으로 이 세계로의 파견을 결정할 정도의 신뢰도와 실력을 지닌 전사라는 것을.
알리시아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솔직하고, 의리를 알며, 쓸데없는 겉치레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세 친숙하게 그녀를 대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알리시아의 눈은 여느 때와 다르게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리시아가 냉철한 눈으로 김건을 위아래로 훑더니, 탄식을 흘렸다.
“꼴이 말이 아니군. 팀장님의 일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알리시아 씨. 여기에 왜…… “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궁금한가?”
알리시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묵직한 압력이 퍼져 나가 김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김건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알리시아는, 김건이 그녀를 만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고.
알리시아가 말했다.
“널 막아 달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절, 막으라고요?”
“그래, 팀장님이 부탁하셨다. 혹시나 네가 올지도 모르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네가 더 이상 오지 못하게 막아 달라고. 항상 네놈은 예상치 못할 짓을 하곤 하니까 말이야.”
“…….”
몰랐다.
예상치도 못했다. 아내가 그런 명령을 내렸을 거라고는.
김건이 침묵한다. 알리시아는 혀를 찼다.
“비켜 달라고 하지는 말아라. 소용없으니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우리 용족은 꽤 불리한 조건으로 권속화의 계약을 맺어서 말이야. 계약의 권리자가 언령의 힘을 담아 내린 명령에는 저항할 수 없어. 어떻게 보면 벨제불의 세뇌와도 비견될 정도지. 물론, 권리자가 악의를 담아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알리시아가 허리춤의 레이피어를 꺼내 자세를 취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새파랗게 빛나는 칼날의 끝이 김건을 가리켰다.
“여길 지나가려면, 아마도 나를 죽여야 할 거다.”
“…….”
김건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가 자신이 오지 못하기 위해 그 정도까지 했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가기 위해서는 친우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차올랐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리시아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에…… 만약 팀장님이 네가 납득하지 못할 결론을 내린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그때 네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나?”
“…….”
“팀장님이 그런 행동을 취한다는 건 무기로서의 네가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었지.”
허탈한 웃음소리가 알리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대로 됐다. 넌 더 이상 그분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야. 팀장님은 싸우기를 포기하셨다. 너라는 무기를 사용해도 이 싸움은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신 거다. 그리고 넌 이렇게도 말했지.”
알리시아의 말이 이어진다.
그 어조에는 감정이 없었다. 억지를 부리는 것도, 비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팀장님이 그런 결론을 내린다면, 그 뜻을 따르겠다고. 그런데 넌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나 약해져서는, 스스로가 한 말조차 지키지 못하고, 그분이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만들었지.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말이야. 한심하기 짝이 없어. 김건, 너한테는 정말 실망했다.”
알리시아의 시선에 경멸이 서렸다.
“대체 여기에는 왜 온 거지? 팀장님의 목숨을 구걸이라도 해 보려고? 아니면 그래, 놈들에게 널 바치면 팀장님을 놓아주겠다고 언질 같은 거라도 받았나?”
그 말에, 김건의 어깨가 떨렸다.
알리시아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벨제불의 총애를 받고, 아수라의 경계를 받을 정도의 남자다. 살신기의 존재를 안다면, 그건 기린의 화신들에게도 유용할 터. 그런 권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자신의 추측에 김건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속마음조차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모양이다.
그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다 소용없는 일이다. 네가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나? 넌 이제 그분의 결심을 망가트리는 방해물밖에 안 돼. 그러니 꺼져라. 조금이라도 네게 그분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
김건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깨는 늘어지고, 다리에는 힘이 없다.
반듯한 칼날 같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건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무능력한 주제에, 포기조차 할 줄 모르고 질척거리는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렸다.
알리시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짜증이 폭발했다.
주군이 사지에 들어가는 것을 방관한 신하의 울분이 쏟아져 나왔다.
“귀가 먹었나? 정신적으로 흔들리니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건가? 주둥이가 달렸으면 어디 말을 해 봐! 네가 대체 그분에게 뭘 해 줄 수 있기에, 네가 대체 뭐기에 여기까지 왔는지!!”
감정을 토해 낸 알리시아가 씩씩 거리며 김건을 노려봤다.
김건은 한참 동안이나 고민을 하다가, 겨우 말했다.
“……그 사람의, 남편이니까요.”
“…….”
침묵이 흘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답변에, 알리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김건을 바라보았다. 거칠던 호흡이 잦아든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래, 그거면 되는 거다.”
증오로 이글거리던 얼굴에 독기가 빠져나간다.
허탈한 미소를 짓는 알리시아. 김건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져 간다.
알리시아는 평상시의 모습이 되어 익살스럽게 말했다.
“벽창호 놈이 조금은, 여자 마음을 알게 되었나 보군.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알리시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변신에 맞추어 변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갑주. 알리시아의 손이 부풀어 오르며 갑주를 벌리고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왔다.
그 끝이 하얀 목줄기를 겨냥했다.
“그럴 때는, ‘그녀를 사랑하니까요.’라고 하는 거야.”
이상을 느낀 김건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알리시아가 스스로의 목을 그었다.
동맥이 베이며 분수처럼 피가 튄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은지, 그녀는 곧장 손을 들어 자신의 배를 찢었다.
용인화된 발톱이 단박에 갑주를 베고 뱃가죽을 갈랐다.
피를 뿌리며 무릎을 꿇는 알리시아. 깜짝 놀란 김건이 달려갔다.
“알리시아 씨!”
마치 오지 말라는 듯 알리시아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건 만류의 의미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마법이 짜이며, 그녀의 손에서 화염이 쏟아져나왔다.
콰아아앙!
날아간 마법이 김건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지면을 부쉈다.
반대 손을 움직여 가까스로 조준을 흐트러트린 알리시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김건을 바라보았다.
반쯤 파충류가 뒤섞여 기괴한 모습이 된 얼굴로 호통을 쳤다.
“오지 마! 가라!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을 때! 어서!!”
목숨의 위기에 변화하기 시작하는 몸.
날개가 튀어나오고, 상체가 부풀어 올랐다. 김건을 향해 나아가는 손을 가까스로 틀어막으며 알리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
김건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알리시아의 의지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알리시아를 지나쳐 달려 나갔다.
이미 와이번 기수 한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등의 안장에 뛰어오르자 그린스킨의 기수는 곧장 고삐를 틀어 와이번을 움직였다.
뾰족한 괴성을 지르며 와이번이 날아올랐다.
알리시아는, 언령을 수행하기 위해 미쳐 날뛰는 몸을 통제하며 멀찍이 사라져 가는 김건의 등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패배자였다.
그녀는 주인을, 한서리가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선택을 하는 걸 막지 못했다.
사실은 포기하지 말라고,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막기에는 대안도, 명분도, 지금까지 쌓아 온 감정도 부족했다.
알리시아는 어쩔 수 없이 한서리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건은 다르다.
그에게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이력과, 지금까지 이어져 온 세상의 흐름이 있었다.
김건이 있었기에 이 세계가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
그가 있었기에 벨제불의 화신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을 수 있었고, 그가 있었기에 마인협회의 도움을 받아 티아마트의 반신을 퇴치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
이곳은 아무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를 침략한 여섯 명의 화신. 그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마굴이다.
김건이 온전한 모습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은, 그들과 김건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미쳐 돌아가는 운명의 소용돌이.
김건은 그 가운데에 있는 자였다.
웃기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세상의 운명이 김건과 한서리 부부의 선택과 판단에 휘둘려 왔다.
그러니 혹, 이 상황을 뒤바꿀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두 사람 중 한 명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두 사람을 따로 둬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서로의 의견을 맞추도록 해야만 가능성의 빛이 열릴 것이다.
그래서 보내 줬다.
그래서 명령을 어기고 김건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러면, 뭔가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이미 무너져 버린 세계의 사람이다.
‘멸망이니 뭐니, 이제는 지긋지긋해!’
알리시아는 피 구덩이에서 발버둥 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는 보이지 않는 김건의 등을 향해, 으르렁거리듯이 내뱉었다.
“어디 한번 보여 봐라. 이 개 같은 세상에게. 네가, 그리고 그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 * *
정말로 거창한 홀이었다.
구조는 단순하다.
드넓은 분지. 사방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배경으로 평평하게 깎인 평지에 왕좌와 탁자만이 놓여 있다.
하지만 중력장으로 굴절한 빛이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거기다 외벽처럼 펼쳐져 있는 결계가 대기의 흐름을 차단해 밖에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거대한 홀의 탁자 앞에, 한서리는 앉아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파이몬이, 그리고 주변의 왕좌에는 각각의 화신들이 있었다.
둥글게 반원을 그리고 있는 여섯 개의 왕좌. 그 한쪽 끝에 앉아 있던 늑대왕이 웃었다.
“붙잡혀서 끌려올 줄 알았더니, 웬일로 제 발로 왔군.”
한서리는 살짝 눈을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추한 꼴을 보이기도 싫고, 시간 낭비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어쭈, 죽으러 온 주제에 제법 주둥이가 살아 있는데.”
늑대왕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를 본 건 처음이지만, 한서리는 한 눈에 그가 싸움 외에는 쓸모없는 놈이라는 걸 깨닫고 존재를 감각에서 제외했다.
정치 외교적인 자리가 아니니 쓸데없는 격식 따윈 필요 없다.
한서리와 함께 탁자에 마주 앉은 파이몬은 거두절미하고 곧장 종이를 내밀었다. 한서리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
종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선계의 것인지, 질감이 완전히 달랐다. 가죽을 얇게 펴서 말린 것 같은 감촉.
그곳에는 한서리도 알아볼 수 있도록, 지구의 공용어가 적혀 있었다.
파이몬이 말했다.
“네가 용족의 권속화 계약을 양도하고 여의주가 되어 주겠다 계약하면, 우리는 이곳에서 물러나고 다시는 공격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여의주가 되겠다 동의하는 계약은 화신을 여의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위였다.
일반적인 마법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계약을 이용해 기린의 힘을 끌어와야만 화신을 여의주로 가공할 수 있다.
한서리는 물끄러미 그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사실, 기린의 화신이라면 계약을 하는 데에 형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구두로 하든, 계약서를 작성하든 서로가 완전히 내용에 합의해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 계약 내용은 모두 정해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한서리의 동의뿐이었다.
파이몬은 한서리가 금방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애초에 그런 각오가 없다면, 이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올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문득, 한서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삼계통일이 목표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