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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30화 (130/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30화

삼계통일, 이라는 단어가 한서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서 다른 선계들을 정복하며 기린의 화신들을 모으고 있는 거고.”

파이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내 부하를 심문했나 보군.”

인간으로 위장해 첩보 활동을 하던 악마족들. 한서리는 그들을 붙잡아 그 정보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의 목표가 삼계통일이라는 건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린의 화신이 각자의 권속에게 막강한 명령권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이 곧 군사의 사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권력자로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믿고 따를 강력한 비전을 제시해야 했다.

그렇기에 제시된 것이 삼계통일.

벨제불과 티아마트의 위협을 없애고, 오히려 그들의 힘을 이용해 막대한 자원과 마력을 손에 넣어, 그들에게, 그리고 그 후손에게 찬란한 미래를 선사한다는 것이 명분이 되어 주었다.

한서리는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협상 조건에 내용을 추가하고 싶어.”

파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용의 변경 따윈 없다. 우리의 목적과 너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넌 그저 화신으로서, 그 힘과 권한만을 남긴 채 우리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만 하면 돼. 네 죽음은 필연적이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여의주가 되겠다는 조건은 바꾸지 않을 거야. 단지, 그렇게 되기 전까지 시간을 줘.”

“시간을? 우리가 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 파이몬.

한서리는 그에 마주 웃어 주며 말했다.

“그쪽에게도 불리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시간을 주면, 그동안 용족의 전력을 더욱 강화하고, 내가 없어진 이후에도 너희들이 그들을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해 줄게.”

“…….”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오자 파이몬이 말을 잃었다.

뒤에 앉아 있던 백발의 그린스킨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직접, 용족의 전력을 강화해 주겠다고?”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한테 맡기는 게 그쪽도 편할걸. 난 용족에 대해 잘 알고, 이미 그들의 신임을 얻고 있어. 지금 당장 내가 죽어 버리면, 너희들은 그들을 명령으로밖에 다를 수 없을 거야. 알아서 스스로의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나라면, 짧은 시간 내에 그걸 해결해 줄 수 있어.”

청산유수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그린스킨이 턱을 쓰다듬었다.

“흠…… 적의 수장을 포섭해 기존의 통치 체계를 유지하는 건 정복 전쟁의 정석이기도 하지.”

파이몬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린스킨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발러. 용족의 통제권은 내가 받겠다. 그러면 충분히 그들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늑대왕이 켁켁 거리고 웃었다.

“전에 그러다가 한 종족을 모조리 몰살시킨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대답이 참 웃겼지. 뭐라고 했더라…… 제기랄, 그 연놈들 때문에 기억이 날아갔잖아!”

머리를 부여잡고 투덜거리는 늑대왕.

기린에 의한 의식 침범을 막기 위해 그들은 전신의 정보를 마력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뇌를 재생해도, 그것이 파괴되기 이전과 같을 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다.

기능 자체는 멀쩡하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기억이나 기술은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당해서 저 꼴이다.

파이몬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입 닥쳐라. 늑대. 넌 이 일에 끼어들지 마.”

그런 파이몬을 지켜보며 백발의 그린스킨, 발러는 슬쩍 눈을 돌려 아그니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그니스는 묵묵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쪽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로 그것을 표현하는 자였다.

때문에 아그니스의 묵언은 언제나 긍정을 의미했다.

발러는 왕좌에서 내려와 탁자로 향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파이몬의 옆에 앉고는 한서리에게 말했다.

“만약 네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이득이 있지. 그런데 그쪽은 뭘 하려고 시간을 원하는 거지? 시간이 있다면, 뭔가 반격의 기회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한서리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설사 가능하다고 쳐도, 이쪽의 전력으로 그쪽을 따라잡는 데에는 너무 오래 걸려. 설마하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진 않겠지.”

“그러면, 이유가 뭐지?”

그 말을 들은 한서리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한숨과 같이 말했다.

“……아이가 있어. 설령 내가 죽더라도, 최소한 아이는 낳고 죽고 싶어.”

“아이가 있다고?”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애초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투덜거리며 팔짱만 끼고 앉아 있던 기가스, 타타리고가 갑자기 말을 꺼낸 것이다.

키가 3층 건물은 될법한 금속의 거인이 자세를 바꾼다.

그는 유심히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뭔가 전자파 같은 것이 몸을 스캔하고 있다. 한서리는 그것을 눈치챘지만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정말이군. 아이가 있어.”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완고한 거인이 다시금 팔짱을 꼈다.

하찮다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화신끼리의 회의에도 자리만 지킬 뿐, 발언 한 번 하지 않고 있던 그가 갑자기 말했다.

“난 저 의견을 들어 줘야 하는 것에 찬성이다. 아이란 소중한 존재야. 그것을 낳는 행위 역시 신성한 것.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배려를 해 줘야 해.”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는 크투그아가 텔레파시를 쏘았다.

<<멍청하군. 인간은 네 종족처럼 번식이 어렵지 않아. 상시 발정기인 생명체의 어린 것에 그 정도의 가치는 없어.>>

“기린의 힘을 받아들여 겨우 이성을 얻은 금수는 당연히 이해 못하겠지.”

크루루루, 크투그아가 비웃는 소리를 내자, 타타리고는 불쾌한 표정으로 심해 괴물을 바라보았다.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다.

그것을 감지한 파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힘에 굴복한 패배자에게 휘둘리는 다른 화신들의 모습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고 한서리의 팔 한 쪽 정도는 날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못난 모습을 보이면 아그니스의 신임을 잃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일단 이성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일 년이면 충분한가?”

이번 전쟁에서의 정보 수집을 담당한 그녀다. 인간의 생태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간을 잡아보았지만……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삼 년. 이건 아이가 아니라 용족의 정비를 위해서야. 수천 년을 사는 종족의 통솔 권한과 지휘 체계를 정비하고 인수인계하는 걸 고작 일 년 만에 다 하라고? 그건 무리야.”

콰앙!

주먹이 탁자를 내리치며 굉음이 울렸다. 마계의 금속으로 만들어져 절대 강도라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은 탁자가 단번에 움푹 파였다.

파이몬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서리를 노려보았다.

“입 닥쳐. 가만히 내버려 두니 점점 도를 넘어서는군. 삼 년이라고? 웃기지 마라. 여기는 네 의견을 들어 주려고 마련된 장소가 아니야.”

살기가 한서리의 전신을 관통한다.

어지간한 사람이었으면 악마의 그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서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멍청하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저 폭력을 휘두르는 것밖에 몰라? 이 자리를 주도하고 싶어? 그러면 태도를 똑바로 해. 계속 같잖은 자존심만 앞세우니까, 이렇게 휘둘리는 거야.”

“이게……!”

악마의 입에서 이가 갈린다. 흥분한 파이몬이 한서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러가 그것을 막으려 할 때였다.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

아그니스였다.

단숨에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잦아들고, 모두의 시선이 홀의 중앙에 앉아 있는 화염의 정령에게로 향했다.

아그니스가 손을 뻗었다.

“……!”

보이지 않는 기운이 몸을 짓눌러 오자 놀란 한서리가 능력을 끌어올렸다. 파랗던 머리칼이 단숨에 은빛으로 물들며 신격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그니스의 힘은 그녀보다 훨씬 강력했으며, 기린의 힘에 대해서도 더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서리가 힘을 발휘한 건 잠깐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순식간에 신력이 사라지며 머리칼의 색이 돌아왔다.

모든 능력을 제한당한 그녀는 그대로 아그니스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활활 타오르는 갑옷의 손이 여린 목을 틀어쥔다.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한서리는 컥컥 숨을 토하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아그니스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붉은 보석의 두 눈이, 한서리를 향했다.

“한서리, 넌 내게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야. 용족도 아무래도 좋아. 화신 하나, 종족 하나 따윈 다른 선계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

솔직한 말이 흘러나온다.

아그니스의 목소리를 들은 화신들이 모두 어깨를 떨었다.

그는 지금까지 개인의 목표를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설령 별개의 목적이 있었다하더라도, 대외적으로는 이 세계와 화신, 그리고 새로운 종족을 군단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라 포장하며 이번의 정벌 전쟁을 모두에게 합리화시켜 왔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다르지. 그 능력과 운은, 다른 어디에도 없어.”

그런 그가 이렇게 진정한 목적을 밝힌다는 것은, 패왕으로서의 위엄도, 여러 화신을 통솔하는 지도자로서의 아량도 버리고, 오로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움직일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완전히 욕망을 드러낸 아그니스.

지금의 그에게 잘못 걸렸다간 한 개인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칫하면 한 종족이, 한 세계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아는 모든 화신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한서리는 방금의 말로 아그니스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그녀는 목이 조여드는 와중에도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너…… 설마, 내 남편을……!”

“그래. 내가 원하는 건 김건이다.”

“……!?”

말 한마디에 한서리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대체 다른 선계에서 온 자가, 왜 다른 것도 아닌 남편을 원하는가.

화신과 한 종족을, 따위라고 치부할 수 있는 자가 말이다.

‘설마……!’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하나, 둘 그녀의 머릿속에서 조합되어 간다.

철저히 숨겨져 있던 그녀의 정체를 그들이 어떻게 알아냈으며, 억지력으로 보호받고 있는 이곳을 어떻게 그리 쉽게 찾아냈는지, 그리고 남편의 가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는지.

한서리는 깨달았다.

놀람에 가득 찬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 나와 함께 돌아온 기린이구나……!”

아그니스는 호오, 탄성을 토했다.

“총명하군. 확실히 능력은 있어. 부하로 삼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네 쓸모는 그게 아니지.”

아그니스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숨통이 막히며 한서리가 발버둥 쳤다. 호흡 곤란을 일으킨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아그니스는 한서리가 기절하기 직전까지 고통을 주다가, 이내 그녀를 발치에 던졌다.

쓰레기처럼 나동그라져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널 손에 얻었으니, 너를 이용해서 김건의 마음을 돌려야겠다. 얄팍한 수라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자신을 인질 삼아 남편을 협박하겠다는 말을 들은 한서리가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뭐!? 개소리 하지 마! 그럴 바에 차라리 그냥 여기서 죽어 버리겠어!”

그러면서 혀를 깨물려고 한다. 아그니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죽어? 네가 죽으면, 네 아이까지 죽을 텐데도?”

“……!”

한서리가 행동을 멈췄다.

아그니스는 굳어 버린 한서리를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리고, 넌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혀를 깨물든, 목을 긋든 재생 마법으로 얼마든지 복구시킬 수 있으니까. 어쩌면, 그게 김건을 설득하는 데에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될지도 모르겠군.”

정령은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았다.

“이……!”

한서리가 그 사악함에 치를 떨 때였다.

아그니스와 한서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파이몬의 어깨에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사역마가 내려앉았다.

텔레파시로 정보를 송신받은 파이몬이 아그니스를 향해 부복하며 보고를 올렸다.

“김건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으로 들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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