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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31화 (131/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31화

“뭐?!”

김건, 이라는 이름에 한서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혹시나 뒤따라올까 싶어 알리시아에게 부탁까지 하고 왔는데, 그녀도 막지 못한 모양이다.

하기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눈앞의 쓰레기는 그저 그를 갖고 싶을 뿐인데.

남편이 스스로 오지 않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앞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한서리의 눈이 아그니스를 향했다.

그녀와 아이를 인질로 삼아 남편을 겁박하려는 자.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살아 태어나, 지금 이 순간만큼 강렬한 증오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아그니스는 그런 한서리를 마주 보았다.

“분한가? 이것이 세상의 순리다. 약자는 그저 더 강한 힘이 이끄는 데에 끌려갈 뿐이지.”

아그니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허리춤에서 뽑혀져 날아간 쇳덩어리가 몸을 부풀리더니 한서리를 덮쳤다.

“큭!”

한서리는 저항했지만 화신으로서의 힘도, 마력도 제한당한 상태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뱀처럼 몸을 파고드는 쇳덩어리에 제압당했다.

한서리의 몸을 휘감은채 제멋대로 형태를 바꾸던 금속이 지면에 박히며 몸을 세운다.

십자가마냥 한서리가 그곳에 매달렸다. 진흙처럼 뻗어 온 금속의 형체가 입까지 틀어막았다.

한서리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

그런 와중 계속해서 사역마에게 정보를 전달받은 파이몬이 보고를 이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쪽을 향해 핵무기를 발사할 준비를 갖췄다고 하는군요.”

“뭐? 그따위 장난감으로 우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늑대왕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뒤따라온 말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가능할 수도 있지. 만약 이 일대에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아그니스의 말.

그것을 들은 화신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

그들은 모두 아그니스에게 김건이 가진 ‘그 기술’에 대해 들었다.

마력을 분해하면서 일어나는 연쇄 효과를 이용해 일종의 핵분열 폭발을 일으키는 기술.

하늘을 가르고, 산을 부수는 화신들의 초능력은 모두 마력이라는 힘에서 비롯한다.

만약 주변 지역의 마력이 모조리 증발해 버리면, 그들이 인간들의 핵 공격을 막아 낼 수 없을 것은 자명했다.

아그니스가 말했다.

“저항을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직 김건과 연계하는 세력이 남아 있나 보군. 반마력 폭발에 무력화되지 않도록 이 부근에서 병력을 물려라. 군을 더 넓게 포진시켜서 공격을 요격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발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각자가 강력한 화신들인 그들에게는 별다른 호위도 필요 없었다. 그는 곧장 주변에 퍼져 있는 부하들에게 텔레파시로 지령을 내렸다.

파이몬은 고작 인간 하나를 맞이하기 위해 그런 조치까지 취해야 하나 싶었지만, 아그니스의 지시였기에 일단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그니스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혹시나 목숨이 아까운 자가 있다면 이곳에서 벗어나 있도록.”

“하, 필요 없어. 놈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원리는 알아. 마력의 순도를 낮춰 뒀으니, 그 반마력 폭발이 우리 군대 전부를 무력화시킬 순 없을걸. 게다가 우리는 실체를 갖고 있으니까, 그걸 맞아도 죽지 않아.”

늑대왕이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다른 화신들도 모두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그들은 아그니스가 왜 그토록 김건이라는 인간을 고평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그니스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하늘에서 와이번 한 마리가 내려와 홀에 안착하고, 김건이 그 등 뒤에서 뛰어내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발러가 손짓하자, 와이번은 다시금 하늘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김건은 그렇게, 홀로 여섯 화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 ……!”

김건을 본 한서리가 발악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김건 역시 그런 한서리를 발견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그니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내 신하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건가?”

아그니스가 말했다. 김건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그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내 아내가 저렇게 구속당해 있는 거지? 스스로 계약을 하기 위해 왔으니, 저렇게 구속을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그거야, 계약보다 널 얻는 게 중요하니까.”

그 대답에는, 김건을 위해서라면 한서리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김건은 단박에 아내의 믿음이 배신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

역시,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자다.

그것을 재확인한 김건은 조용히 아그니스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김건을 지켜보던 늑대왕이 돌발적으로 움직였다.

중력 방벽을 무시하고 순간적으로 황금빛을 남기며 사라진다.

뻗어 나간 손톱이, 김건의 몸을 관통했다.

“컥……!”

김건은 저항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늑대왕의 손에 꿰뚫려 공중에 매달렸다.

울컥, 하고 뱃속을 타고 오른 피가 입에서 토해졌다. 늑대왕이 손을 빼냈다.

배를 움켜쥐며 김건이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한서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그니스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무시무시한 압력을 지닌 말소리가 정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손님에게, 무슨 짓이지?”

늑대왕은 겁먹지 않았다. 만약, 지금의 행동이 정말로 아그니스의 생각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소멸했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는 오히려 웃었다. 그리고 발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김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자식, 너무 약한데? 당신이 원하는 그 대단한 전사가 이놈인거 맞아?”

“…….”

아그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나.

그 태도로 상황을 파악한 늑대왕이 손을 뻗었다.

그의 마력이 김건의 상처를 덮었다. 부서진 장난감을 고치듯, 김건의 몸을 회복시키며 늑대왕이 이죽거렸다.

“이 놈보다는 엊그제 상대했던 인간 암컷이 훨씬 나은걸. 아니, 그것에 대적할 주제도 못 돼. 내가 보기에 이놈은 그냥 일반 병사만큼의 실력도 없어.”

늑대왕이 김건의 멱살을 잡았다.

김건은 막으려 했지만 완전히 타이밍이 틀렸다. 그는 너무나도 쉽게 목줄기를 내주고야 말았다.

김건을 붙잡은 늑대왕이 이거 보라는 듯이 그를 화신들에게 들어 보였다.

거적때기를 다루듯, 김건을 휘두르며 말했다.

“자, 봐. 완전히 글러먹었다고. 기술도, 육체도 아무것도 없어. 대체 이놈의 어디가 우리보다 뛰어나지? 아무리 봐도 한 종족과 화신을 버리고 취할 정도의 실력은 없어 보이지 않나?”

“…….”

침묵이 흘렀다. 평소 같았다면, 누구 하나라도 까불지 말라며 늑대왕에게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만큼은 모두 늑대왕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대답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그니스에게로 향했다.

“…….”

하지만 아그니스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늑대왕에게 휘둘리고 있는 김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직접 아그니스를 추궁할 간담을 지닌 사람은 없다.

늑대왕은 아그니스가 대답하지 않자 김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을 튕겨 김건의 이마를 툭툭 때리며 그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야, 야. 그러고 보니까 넌 왜 아까부터 말이 없어. 위대하신 우리 두목이 무려 널 신하로 받아 주신다고 하는데. 얼른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저항할 힘이 없는 김건은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늑대왕을 쳐다보았다.

이놈 봐라?

쥐뿔만한 힘도 없는 주제에 아직 눈빛은 살아 있다. 그게 신경이 거슬린 늑대왕이 두 손가락을 김건의 얼굴로 가져갔다.

“건방지게, 어딜 눈을 부라려? 이대로 두 눈을 파 주…….”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폭음.

동시에 피보라가 몰아쳤다.

털로 뒤덮인 몸이, 근육덩어리의 신체가 조각조각으로 분할되어 날아갔다.

김건이 땅에 착지했다.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피가 흐르는 손목의 단면을 보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한순간에, 늑대왕이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무슨……!”

깜짝 놀란 파이몬이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발러가 붙잡았다.

파이몬은 발러가 왜 자신을 말렸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드넓기 그지없는 홀을 막대한 살기가 한순간에 가득 채웠다.

화신들마저 식은땀을 뻘뻘 흘릴 정도의 압력.

그 중앙에, 이글이글 불타고 있는 갑주가 놓여 있었다.

그저 가볍게 손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화신을 박살 내 버렸다.

멀찍이서 재생을 시작하는 늑대왕.

하지만 소멸시키려면 얼마든지 소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그니스 님……!”

이토록 감정을 강하게 보이는 아그니스는 처음 본다.

그가 보이는 분노에 공포를 느낀 화신들이 몸을 떨었다. 그런 아그니스의 눈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김건에게 향했다.

“약해졌군, 정말 터무니없을 정도로.”

정령의 입에서 한탄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런 건가? 애정? 사랑? 네 강함은 고작 그딴 것에 의지해서 얻은 것인가?”

“그딴 것이라 말하지 마. 넌 죽었다 깨어나도 이걸 모를 거다.”

겨우 입을 연 김건이 그리 말하자, 아그니스는 한숨을 쉬었다.

“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좋다. 네놈은 망각을 아는 생물이니, 금방 원상태로 돌아오겠지.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다. 내 신하가 되겠나?”

“그 말에 대답하기 전에, 저 사람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서리를 가리키며 말하는 김건. 아그니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작별 인사라면, 따로 이야기를 할 시간을 주지.”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 그 답변의 결과에 따라, 네게 줄 말이 결정될 거다.”

“한심하군. 스스로 자신 운명을 정하지도 못하다니.”

짙은 실망이 아그니스의 말에 묻어 나왔다. 그는 김건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의 싸움에서, 넌 내가 위협을 느낄 정도의 힘을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모든 화신들의 얼굴이 변했다.

설마하니, 김건이 만전인 상태의 아그니스를 상대로 그런 힘을 보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김건에 맞춰 아그니스가 고의로 어울려 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설혹, 그렇게 어울려 주었다 하더라도, 그 아그니스를 위협하다니, 홀로 온 세상과 싸워 이길 수도 있는 괴물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김건을 지켜보는 가운데, 아그니스가 말했다.

“그 실력에 경의를 표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자비를 베풀어 주지. 명심해라. 다음은 없다.”

그러면서 아그니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금속이 휘익 휘더니. 한서리의 입을 막고 있던 구속이 풀렸다.

“아…….”

한서리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김건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모습은 엉만진창이었다. 부은 눈, 떨리는 턱, 올곧던 자세도 흐트러졌으며 늑대왕 때문에 상체는 피로 물들어 있다.

저렇게 약한 사람이 아닌데, 저따위 무뢰배에게, 모욕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한서리는 알고 있었다.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미안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흘러넘쳐서, 당장이라도 사과하며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속마음을 표현해 버리면 다시는 지금같이 굳은 마음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서리는 필사적으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고민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한서리가 쉽게 그들의 말을 믿은 것은,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원을 넘나들며 침략 행위를 하는 놈들에게 이 작은 행성과, 인간이라는 나약한 종족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런데 웬걸, 저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 강한 특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대체할 협상안을 쉽사리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없다.

그녀는 절망에 찬 얼굴로 김건을 바라보았다.

한서리의 앞에 당도한 김건. 그는 온갖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남편은 또다시 스스로를 희생해 모든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는 건 아닐까.

만약,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장담컨대 한서리는 버티지 못한다.

두려웠다.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도 남편 한 사람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에 구역질이 치솟아 올랐다.

한서리는 그런 혼돈 속에서, 그저 막연히 김건을 바라보았다.

김건은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딱 하나만 물어볼게.”

“…….”

“만약 당신이 그 무엇이라도 쓰러트릴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뭐든지 이길 수 있다고 한다면, 지금 뭘 어떻게 하고 싶어?”

“……!!”

한서리가 눈을 크게 뜬다. 그녀는 단번에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 버렸다.

당신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일어나 싸우라고. 아무리 승산이 없어도, 아무리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어도, 포기하지 말고 싸워 나가라.

설령 그녀가 가진 마지막 무기가 바스라져 사라지더라도.

하지만, 한서리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번 사태가 발생한 이후 단 한 번도 김건의 힘을 찾지 않았다.

단순히 그것이 개인의 힘으로 뒤집을 수 없는 세계 단위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지켜 주고 싶었다.

항상 자신을 대신해 모든 것을 받아 내던 최후의 보루에 의지하지 않고, 그 밖을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두려웠으니까.

또다시 김건을,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의 능력을 사용하려는 생각도, 상황도 일부러 피해 왔다.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싸우지 않고 포기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덜컥, 겁이 났다. 미칠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또다시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다.

싫다.

싫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홀로 남겨지는 건 이제 충분해.

그녀는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김건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편의 얼굴.

어쩐지, 당장이라도 일어나 싸우라고, 꾸짖는 얼굴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서리는 남편이 던진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는 곧, 자신이 뭔가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한서리가, 무엇이든지 이길 수 있는 최강의 무기를 지니고 있으면 어떻게 하고 싶냐는 말.

김건은 그 질문에, ‘내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스스로를 쉽게 무기에 비유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명확한 답변을 원한다면, 김건은 그 최강의 무기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명시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사소한 어조의 차이.

하지만 한서리는 그 처이예 뭔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다시 한번 남편을 바라본다.

남편은 뭐든지 받아 주겠다는 듯이 온화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다.

언제까지고 함께하며, 언제까지고 기대고 싶어진다.

그 순간 한서리는 이해했다.

남편이 던진 질문의 진의를.

당신에게라면,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말해 봐.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원을.

요령이 없는 남편이기에, 항상 무술만을 닦아 오며 불합리와 싸워 온 그였기에, 그 말을 돌려 표현했을 뿐이다.

“아…….”

가슴이 떨려 온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넘치며 감정이 요동쳤다.

작은 원망이 솟아올랐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

자존심이 있다면, 말할 수 없다.

염치가 있다면, 하다못해 양심이라도 있다면, 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인간만큼 솔직하지 못한 생물은 없다.

그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가면을, 말랑한 속내를 감쌀 갑옷을 걸치고 살아간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나 따뜻한 시선이, 귓가에 남아 있는 말의 여운이, 지금까지 쌓아 온 감정이, 한서리의 마음을 감싸고 있던 갑옷을 한 꺼풀씩 벗겨 나갔다.

마른하늘 아래에서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부끄럽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약한 자신이, 추하고, 못난 자신이 바깥으로 삐져나온다.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이가 있으니까.

그이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돌아가고 싶어!!”

울음소리와 섞인 고백이, 한서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이처럼 순수한 원망의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고…… 돌아갈래!”

마지막으로 향하는 소망의 시선이 김건을 가리킨다.

“당신이랑 같이…….”

현실 따위 전혀 고려되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소원.

저 하늘의 별을 따다 줘── 와 다를 바 없는 유치한 말.

그런 말을 토한 한서리가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호흡을 토했다.

사회적인 동물이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순수한 자아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부하를 준다.

속마음을 토해 낸 한서리가 지쳐 훌쩍였다.

울음이 새어 나온다. 수많은 화신의 앞에서, 단두대에 목이 걸린 와중에도 비웃음을 띠며 흥정을 하던 모습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한서리는 울었다. 마치 갓난아기라도 된 것처럼.

그런 아내를 본 김건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상냥한 말을 속삭이며, 남자가 변화를 시작했다.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가 펼쳐지고, 굽어 있던 허리가 꼿꼿하게 서며 불안정한 발걸음이 암석처럼 지면에 박혔다.

싸우기를 포기했던 이가, 다시금 버려두었던 무기를 쥐었다.

꼴사납게 울부짖으며, 추하게 문드러지더라도 발악하는 것을 택했다.

그 눈물이 말라붙은 피와 녹을 닦아 냈다.

그 외침이 뭉개져 있던 날을 갈아 세웠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뭐야!?”

“……!?”

방금 전만 해도,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었는데, 얼마든지 짓눌러 죽일 수 있는 벌레 같은 존재였는데, 눈 깜빡하는 사이에 빈틈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강렬한 위험 신호가 화신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김건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여섯 명의 화신들을 바라보았다.

“들었지? 너희들을 다 죽이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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