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32화
그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늑대왕이었다.
“뭐? 우리를 다 죽이겠다고?”
그는 방금 전에 아그니스의 손짓 한 번에 사지가 분할 되었음에도 금세 기세를 되찾아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김건을 쳐다봤다.
“…….”
아그니스 역시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흐느끼는 한서리의 입이 틀어막히고, 정령의 입이 열렸다.
“그 말은 즉, 내 신하가 될 생각은 없다는 거군.”
“그래, 이 쓰레기야.”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너 같은 놈에게 주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아깝거든.”
“하…….”
아그니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화가 난 파이몬이 호통을 쳤다.
“이 무례한 놈이……! 지금까지 살려 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무례한 건 네놈들이겠지. 그리고 은혜라는 말을 아주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김건의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
그것은 아내인 한서리의 것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다잡은 사냥감을 하룻밤 늦게 잡아먹는다고 해서, 그걸 자비를 베풀었다고 할 순 없지.”
김건이 손가락을 들었다. 아그니스를 가리키며 말한다.
“잘된 일이야. 그렇게 여유 부린 덕분에, 너희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김건의 도발에 응하지 않는 아그니스.
파이몬은 이를 갈았고, 타타리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으며, 발러는 기가 막힌듯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크투그아와 늑대왕은 웃었다.
크루루루루루- 괴이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재미있는 놈이군.>>
“뭔가 했더니 그냥 미친놈이었네. 배짱 하나는 인정해 주지.”
킬킬거리며 웃던 늑대왕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서 손톱이 길쭉하게 뽑혀져 나왔다.
늑대의 눈에 담기는 살기.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입가에 침이 흘렀다.
“그럼 이제 죽여도 되지? 어차피 신하가 될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아그니스에게 눈짓하며 묻는다. 아그니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가. 실망이 크군. 내게 동경심까지 불러일으켰던 남자가 이토록 나약한 존재였다니.”
패왕의 위엄을 뽐내던 어깨에서 힘이 풀린다. 아그니스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손을 저었다.
“치워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알아서 뫼시죠.”
늑대왕이 미소를 지으며 김건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 문어를 연상시키는 머리를 가지고 있는 심해 괴물이 섰다.
늑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넌 뭐야?”
<<지금까지 정신병자를 먹어 본 적은 없는데, 그 두뇌의 맛이 궁금해졌거든.>>
먹잇감을 가로채겠다는 말에 늑대왕은 짧게 으르렁거렸지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말 따위는 먹히지 않는 괴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한꺼번에 집어삼키지는 말라고. 충분히 가지고 놀아야 하니까.”
<<워낙 맛있게 보여서, 장담은 못하겠군.>>
그렇게 두 화신이 김건의 앞에 섰다.
김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화신을 올려다보았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죽여라. 시간이 아깝다.”
파이몬이 재촉했고, 타타리고가 혀를 찼다.
늑대왕은 씩 웃으며 김건을 내려다보았다.
“들었지? 장난치지 말라고 하시는데.”
방금 김건이 했던 말을 되돌려줬다.
그 눈에, 그 자세에 긴장 따위는 없다. 그저 저 사냥감을 어떻게 찢어발길까 하는 욕망만이 넘실거릴 뿐이었다.
더없이 강력한 힘을 가진 화신.
그들에게 김건은 장난감밖에 안 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 모멸적인 시선에, 김건은 피식 웃었다.
손을 들어 올린다.
그는 손가락을 펼쳐 만든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고 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병신. 넌 이미 죽었어.”
“…….”
의아한 표정이 되는 늑대왕.
그와 동시에.
퍼억-!
김건의 앞에 선 늑대왕과 크투그아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
바깥에서 지켜보던 화신들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있는 모두가 아그니스에게 들었다. 김건이 진동이라는 힘을 다룬다는 것을.
그것은 늑대왕과 크투그아도 마찬가지.
그들은 김건에게 다가가면서 진동과 마력의 흐름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술에 걸렸다.
김건은 아주, 아주 작은, 화신조차 직시할 수 없을 정도의 진동을 여러 번 내쏘아 그들의 머리에 뭉친 뒤, 터지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 말은 즉, 김건의 마력 감지 능력과 제어 능력은 화신들보다도 위에 있다는 것이다.
파이몬은 단번에 그것을 깨달았다.
방금의 공격은, 설사 파이몬 자신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일격이었다.
조금은 아그니스가 왜 그토록 김건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김건이 무력한 벌레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제법이군!>>
크투그아의 머리가 순식간에 원상복구되었다.
심해 생물인 크투그아. 그의 뇌는 한 개가 아니었다. 머리가 아닌 곳에 숨겨 둔 보조 두뇌가 재생 마법을 작동해 몸을 수복해 낸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늑대왕을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늑대왕의 머리를 재생해 낸다. 그리고 비웃음이 담긴 텔레파시를 날렸다.
<<멍청한 놈. 인간 따위에게 그렇게 쉽게 죽지 마.>>
“……!!”
정신을 차린 늑대왕은 단박에 상황을 깨달았다.
방금 전의 그는 정말로 죽었다. 재생이고 뭐고 시도할 새도 없이 의식이 날아갔다.
만약, 크투그아의 조치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정말로 죽었거나, 설령 살았어도 많은 기억을 잃었을 터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초살당했다.
그 사실이 화신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개새끼가……!!”
분노의 울음소리가 늑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퍼져 나온 진동의 갑주가 그의 몸을 감쌌다. 아그니스에게 배운, 외부로부터의 진동을 흐트러트리는 기술.
이걸로 어설픈 진동은 그에게 닿을 수 없다.
“죽어!”
흥분한 일격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을 가를 것처럼 강화된 손톱이 공간을 찢었다.
그리고 동시에, 늑대왕의 얼굴에 주먹이 처박혔다.
초속으로 버프와 그림자 갑옷을 뽑아낸 김건이 곧바로 카운터를 먹인 것이다.
“……!”
늑대왕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그는 방금 인지하지 못했다. 김건이, 회피와 동시에 공격을 가해 오는 것을.
단순히 빠르고, 느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늑대왕은 고도의 전사였다.
하수처럼 보고 대응하지 않고, 그들처럼 느지막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수를 잃고, 미래를 예측하며, 예측한 정보를 토대로 미리 움직이는 것을 버릇처럼 몸에 박아 넣은 사람이다.
모든 싸움꾼이 그렇다. 고수일수록 더하다.
그렇기에 고수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결판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동작, 자세, 표정, 하다못해 숨소리와 심장 박동, 그리고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가 포석이 되어 미래의 결과로 이어진다.
부딪치기 전에, 이미 상대의 진형을 읽고 미리 공간과 시간을 선점해야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기척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다음 행동이, 다음 움직임이 전혀 눈앞에 그려지지 않는다.
마치 끝없는 어둠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만약 녀석이 방금 전 같은 일을 당했으면, 넌 이미 머리가 터져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을걸.’
늑대왕은 그제야, 저번에 맞서 싸웠던 인간이 했던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먹에 맞아 튕겨 날아가는 늑대왕.
그는 곧장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진동 갑옷마저 뚫고 들어온 기운에 머리가 터져 나간다. 그것을 미리 조합해 둔 재생 마법으로 복원해 피해를 상쇄했다.
그사이, 크투그아가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몸을 촉수로 변환해 김건을 노렸다.
김건은 곧장 소환한 등의 배낭에서 창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촤라라라랑!
빗발처럼 쏟아지는 촉수의 연타를 휘둘러지는 창대가 모조리 튕겨 낸다.
한달음에 접근한 김건이 일섬.
빛이 번뜩이고, 머리가 반쯤 갈라진 크투그아가 혀를 차며 후퇴했다.
<<이놈……!>>
늑대왕과 크투그아. 두 화신은 지금 맞서 싸우는 인간이 자신들보다 더 강한 전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강하다.
인간이라고는, 고작 장비 따위에 신체 능력을 의존하는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보다 더한 괴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래 봐야 신격조차 갖지 못한 피조물이잖아!”
늑대왕이 바로 여의주를 사용했다.
복잡한 조성식이 그의 손 앞에 짜이고, 터져 나온 가중력 마법이 전방의 영역을 일순간에 짓눌러 뭉갰다.
콰앙─!!
늑대왕이 가리킨 공간의 지면이 원형으로 주저앉았다. 김건은 측면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걸 피해?’
늑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점이나 선이 아닌, 면의 공격.
일정 범위를 초중력으로 초토화시키는 범위 공격을 피하다니!
기묘한 체중 이동과 변속 기동으로 조준을 흐트러트렸기에 나타난 결과이긴 하나, 그야말로 예술에 가까운 회피였다.
하지만 늑대왕의 기술은 단발이 아니었다.
연속으로 터져 나온 마법이 운석처럼 떨어지며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김건은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피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든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콰지직!
미처 빼내지 못한 발이 일순 중력에 짓눌렸다.
버프와 그림자 갑옷이 가까스로 신체의 파손은 막았으나 움직임이 둔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투그아가 촉수를 뻗었다.
수십 줄기로 날아간 촉수가 김건의 몸을 연타하며, 그를 움직일 수 없는 공중으로 쳐올렸다.
“크윽……!”
역시. 고작 이 정도다.
늑대왕의 입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한계가 있다.
개미가 스스로의 힘을 개량해 자신이 가진 것의 수천 배의 힘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지나가는 코끼리의 발에는 깔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한계점을 파악한 늑대왕의 기세가 살아났다.
순간이동.
공중에 떠오른 김건의 앞에 나타나 배를 공격했다.
김건은 거의 예지에 가까운 능력으로 방어했지만 이미 늑대왕은 황금빛을 발하며 그의 등 뒤에 나타나 있었다.
파파파파팟!
번쩍이는 황금빛. 순간적으로 늑대왕이 수십으로 늘어난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늑대왕은 김건의 반응 속도와 예측 능력을 상회하는 순간이동의 난사로 그의 전신을 두들기다가, 내리쳤다.
추락하는 김건.
가까스로 낙법을 취해 자세를 바로잡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수백 개의 촉수가 그를 덮쳐 왔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전방위의 공격에 김건이 난타당한다.
등 뒤로 나타나,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늑대왕이 이죽거렸다.
“야, 힘 좀 내 봐. 우리를 다 죽이겠다며?”
크투그아의 웃음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봐줘라. 지금까지 싸운 것만 해도 잘하지 않았나. 정말 좋은 먹잇감이다.>>
계속되는 린치에 김건의 상체가 뒤흔들렸다.
하지만 아직도 버프와 그림자 갑옷의 힘이 남아 그의 몸을 지키고 있다.
김건을 죽이려면, 그를 파괴하려면 벌써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힘을 뺀다.
고양이가, 다 잡은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지 않고 툭툭 치며 가지고 놀듯이, 화신들은 김건을 장난감으로 삼아 유희를 즐겼다.
다른 화신들은 한심하다는 듯이 늑대왕과 크투그아를 쳐다보았다.
한서리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고, 아그니스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닥을 보인 김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어디에도 김건이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방심이 최대에 달했을 때.
위기에 직면한 감각이 최고조로 달아오르고, 생존을 위한 본능이 육체의 모든 제한을 해제했을 때.
김건은 점차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폭주하는 신경, 들끓는 오감 속에서 어떤 선이 눈앞에 보였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선.
저 선을 넘으면, 지금까지 없었던 최강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느려진 시간이 멈춰 세운 것에는 김건의 몸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늑대왕과 크투그아의 공격이 날아왔다.
슬슬 끝낼 셈인지, 공격에 살기가 담기기 시작한다.
깎여 나가는 육체, 무너져 내리는 정신.
가까스로 버티고는 있지만 한 방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도 김건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금이다.
준비 작업은 끝이 났다.
위기가 곧 기회.
빠르고 강한 물길일수록 역류했을 때의 반작용도 크다.
그렇다면 지금이다. 지금 흐름을 뒤집으면, 단번에 운명이 바뀐다.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육체가 느끼는 고통이 아니다. 김건이라는 인물을 이루고 있는 자아가, 그의 존재를 상징하는 영혼이 무언가에 의해 짓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세상의 의지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아간다.
그래도 무릎을 앞으로 향한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영혼이 부서져 갔다.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워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발걸음이 멎는다.
의식이 흐려지고, 눈앞의 선이 점점 멀어져 갔다.
김건은 자신이 한계의 벽에 부딪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한 발인데, 앞으로 한 발만 내디디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데.
시야가 꺼진다.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고, 눈앞의 모든 것이 그라는 존재를 먹어 치우려고 하는 그 마지막 순간.
의식이 당겨지듯 뒤로 돌아왔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주마등…… 일지도 모른다.
못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님을 잃고 미친 듯이 힘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굴욕 그 자체였던 아카데미 시절.
돌이켜보면 고통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미극공진동이라는 절기를 완성시켰던 소중한 시간.
그러나, 김건의 인생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미극공진동을 완성한 그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원했던 강함을 손에 넣었지만 기뻤던 것은 잠깐뿐. 그 뒤에 남은 것은 깊은 허망함이었다.
김건은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강해질 이유가 없었구나.
무작정 강해지려고만 했지, 강해진 뒤에 무엇을 할 건지 생각하지 않았구나.
뭘 해도 기쁘지 않았다. 새로이 얻은 힘으로 잘난 척하던 바보들을 깨부숴도, 산더미만 한 괴물을 일격에 쓰러트려 사람들의 탄성을 들어도.
무엇을 해도 무료하고, 무엇을 해도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명검으로 빚어냈지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의 손잡이를 쥐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김건은 녹슬어 갔다.
번개처럼 빠르고 예리했던 것은 잠깐뿐, 갈 곳을 잃은 마음은 빠르게 그의 실력을 앗아 갔다.
겨우 얻었던 힘조차 잃어버리고는, 그저 그런 전사가 되어서, 멸망해 가는 세계를 거닐며 언제가 되어야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그는 걸어 다니는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바보같고, 무의미한 인생이었다.
그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한서리.
그저 건방진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며, 믿을 줄도 모른다. 우월 의식에 젖어 뭐든지 스스로 하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별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손에 떠밀려, 버려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서리를 버림패로, 다른 이들이 이득이 취하는 것으로 결정된 회의.
김건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와 한서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때의 그는 무력감에 젖어 다른 사람을 돌아보거나 배려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전 한서리를 돌아본 것은, 그토록 콧대 높던 여자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대체 어떤 표정일까, 그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인 저열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화내고 있겠지.
그토록 성질머리가 더러운 여자니,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한서리는 화내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 답을 듣기 두려워 묻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무언가가 변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한서리의 이미지가 무너지고, 재조립되었다.
아무리 냉철해 보였어도, 아무리 강인해 보였어도, 그게 다 위장이었구나.
나약한 자신, 솔직하지 못하고 애정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지닌 사람이구나.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문득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의 앞을 지키는 칼날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뿐인 생각.
그저 그뿐인 마음.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꿨다.
구석빼기 상자에 갇혀, 먼지가 쌓여 가며 녹슬어 가던 와중, 뚜껑이 열리며 빛이 들이치고, 어디선가 뻗어 온 손이 그를 움켜쥔 것 같았다.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깨달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내 손잡이를 쥐었어.
불필요하게 존재만 하던 힘에 의미를 부여해 줬어.
당신이 나라는 존재를 완성시킨 거야.
그러니까 보여 줄게.
당신이 쥔 무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내가 지금까지 벼려 온 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당신이 원한다면, 세상이라도 베어 보일 수 있어.
한계의 벽이 부서진다.
김건은, 세상이 정한 일선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