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33화
김건은 가볍게 몸을 굴려 늑대왕과 크투그아의 공격에서 빠져나왔다.
별것도 아닌 한 걸음. 하지만 그것이 모든 빈틈을 꿰뚫는 신의 한 수였다.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은 될까 싶은 확률로 생문을 뚫고 죽음의 결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무슨!”
<<뭐야!? 어떻게 한 거야?>>
그 말도 안 되는 움직임에 놀라 멈칫거리는 늑대왕과 크투그아.
그 틈에 공간압축마법이 해제되며 검은 광채가 김건의 몸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차르르르륵!
파도처럼 퍼져 나가는 금속의 물결.
묵광의 강철이 등을 덮고, 팔을 감싸며 허리를 타고 내려가 다리까지 뻗어 나갔다.
노바와 아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슈츠가 김건의 전신을 감쌌다.
온전히 현현한 갑주의 투구가 내려가고, 안쪽의 인터페이스가 김건의 머리를 감싸며 내장 컴퓨터가 부팅을 시작했다.
그리고 김건은, 마지막으로 자아낸 진동을 갑옷으로 흘려 넣었다.
회선을 타고 나아가는 진동.
금속질의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고, 그 틈새로 흘러들어가 수많은 전선과 나사와 톱니를 거쳐 지나간 그곳에 놓인 노심.
그 중앙에, 클라우가 선물한 신의 파편이 놓여 있었다.
진동이 벨제불의 마력을 분해한다.
연쇄 반응이 시작. 터져 나오는 폭발. 그 에너지가 노심을 가동시켰다.
키리리리리리리!!
갑주가 가동을 시작한다.
철컥철컥 금속이 움직이며, 요동치는 인공 근육과 갑옷의 틈새로 붉은 에너지가 뿜어져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
놀란 화신들이 대응하려 한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김건으로부터 시작된 에너지의 파장이 주변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퉁, 퉁, 퉁, 등 뒤에 떠다니던 여의주가 지면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파이몬이 경악한 시선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력이…… 사라졌어!?”
김건이 달려 나갔다.
묵광의 갑주로 무장한 전사가 순식간에 기계음을 내며 눈앞에 도달.
당황한 늑대왕을 향해 팔뚝에 달린 역수검을 휘둘렀다.
“어!?”
방심한 늑대왕. 수인으로서의 육체 능력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그는 마력의 소실로 인한 갑작스러운 능력 저하에 적응하지 못했다.
운좋게 얻은 힘에 도취해 자신이 가진 능력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하수.
일격에 목이 떨어져 나간다.
스스로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머리가 멍청한 눈으로 바닥을 뒹굴고, 피를 흩뿌리며 김건은 옆에 있던 크투그아에게 죽음의 시선을 던졌다.
“……!!”
크투그아는 대응했다. 마력의 소실로 인해 억눌려 있던 본 모습을 드러낸 그의 몸체는 수백 개의 촉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총알같이 쏘아져 김건을 관통하려 들었다.
기술 따윈 없다. 그저 타고난 포식자로서의 운명으로 여기까지 온 자.
그러나, 그 운은 여기까지였다.
촤라라라라락!
칼날이 춤춘다. 갑주의 양팔에 달린 역수검이 회오리치며, 앞으로 가로막는 촉수를 모조리 절단.
잘려 나간 촉수의 파편과 체액이 폭풍우치고, 저항 따윈 없다는 듯 부드럽게 안쪽으로 파고든 김건이 주먹을 날렸다.
완벽한 힘과 각도록 설계된 일격이 착탄.
파문이 유체의 몸 위로 퍼지고, 분쇄.
산산조각 난 심해 괴물의 육체를 꿰뚫고 김건이 빠져나왔다.
검은 갑주가 지면을 긁고, 가속한 육체와 노심의 열기를 식히며 증기가 분출한다. 그 안면갑의 중앙에 박힌 눈이 길게 안광을 늘리며 주변을 훑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화신이 죽었다.
그것을 깨달은 화신들이 놀라 일어나며 싸울 태세를 취했을 때, 이미 김건은 내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노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반마력을 흩뿌려 마법의 사용을 통제했어도, 여기있는 화신들은 하나하나가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능력을 지닌 종족들이었다.
갑주의 힘 없이 그들과 싸우는 건 불가능.
그러니 가동 시간이 끝나기전에, 갑주가 기능을 유지하는 동안에, 살아 있는 모든 화신을 죽인다.
파앙!
김건이 발을 박찼다.
키이이이잉!
인공으로 만들어진 금속의 근육이 울부짖고, 수증기와 엔진소리를 흩뿌리며 그가 달려들었다.
약한 상대부처 처리하는 것이 일 대 다의 기본.
그는 등 뒤의 대검을 빼든 그린스킨, 발러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놈!”
허나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리진 않았다.
강철의 거인이 파고들었다. 여기서 더 이상 화신을 잃을 순 없다고 판단한 타타리고가 김건을 막아선 것이다.
카가가강!
김건이 휘두른 역수검이 타타리고와 부딪혀 튕겨져 나왔다.
온몸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규소 생명체는 마력의 힘이 없어도 용암 속을 유영하고 암석을 바스러트릴 수 있다.
“그딴 장난감으로 날 상처 입힐 수 있을 것 같나!”
노성을 지르며 주먹을 내뿜는 타타리고.
앞에 죽은 두 화신과는 다르다, 강한 육체만 가진 것이 아니다.
컴팩트한 움직임. 완벽한 체중 이동.
그는 전투기술마저 완벽에 가까웠다.
가볍게 뻗어지는 잽과 스트레이트의 콤비네이션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다. 금속의 주먹이 파공성을 내며 공간을 찢었다.
김건은 가볍게 상체를 흔들어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곧장 안쪽으로 파고들어, 기가스의 옆구리에 일장을 찔러 넣었다.
“……!”
무시무시할 정도의 몸놀림과 센스.
하지만 타타리고는 당황하지 않았다. 옆구리를 내준 건 일부러였다. 김건의 공격이 자신의 내구도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설계한 함정.
그는 그대로 허리를 틀어 일격을 날리느라 멈춘 김건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김건의 손이 옆구리에 꽂히는 순간, 엄청난 통증이 기가스의 숨틀 토하게 만들었다.
뱃속에 칼날을 찔러 넣는 듯한 타격. 김건은 그 특유의 진동권을 오라 없이 그저 타격만으로 구현해 타타리고의 외피를 뚫고 내부에 피해를 준 것이다.
“컥……!!”
놀란 타타리고의 움직임이 멎었다.
실책을 깨닫고는 바로 방어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한번의 실수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김건은 이미 기세를 타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량을 보이는 중이었다.
파파파팡!
“크으으윽!”
계속해서 뻗어지는 진동권에 난타당하며 기가스가 물러났다.
이미 승부는 났다. 그대로 있었으면 타타리고는 죽었을 터.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날아드는 칼날, 그것을 눈치챈 김건이 몸을 피했다.
그런 그를 추적하는 녹색 그림자가 보였다.
발러가 외쳤다.
“혼자서 이길 상대가 아니야! 합을 맞춰라!”
“알았다!”
앞뒤로 김건을 포위.
타타리고가 방어를 굳힌다. 큰 공격을 줄이고, 계속해서 짧게 주먹을 쳐 김건의 움직임을 봉했다.
번개처럼 뻗어 오는 잽을 모조리 피할 순 없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방어. 하지만 거인과 김건의 체력 차이는 너무 크다. 방어하는 순간, 일시적으로 자세가 흔들렸다.
그 틈에, 발러의 대검이 번득였다.
슈칵!
섬뜩한 소리가 나며 김건의 몸을 감싸고 있는 완갑이 잘려 날아갔다.
거리를 좁혀 되돌아오는 일격을 막아 내는 김건. 발러는 당황하지 않고 곧장 그 간격에서 가능한 일격을 내질렀다.
그린스킨의 주먹이 날아간다.
회피는 불가능, 흘리기도 여의치 않은 타이밍이다. 팔을 겹쳐 막아 낸 김건의 몸이 들썩였다.
“큭!”
쾅, 소리와 함께 동체가 흔들렸다.
삐걱삐걱- 슈츠의 인공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갑옷이 차르르륵 소리를 내며 부서진 냉각 기관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이다!’
타타리고가 발러가 만든 틈을 파고들었다.
여러 발도 필요 없다.
단, 한 발.
전력을 담아 친 주먹 한 발이면 김건을 슈츠째로 산산조각 낼 수 있다.
타타리고가 호흡을 내뱉었다.
거인의 발이 지면에 꽂히고, 전 체중을 담은 스트레이트가 뿜어지려는 순간, 타타리고는 김건의 눈을 보았다.
그 눈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
최초의 한 합에서 타타리고가 했듯, 김건은 일부러 빈틈을 보여 공격을 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눈치채는 것이 너무 늦었다.
그의 주먹은 이미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날아가고 있었다.
김건은 피하지 않고 손으로 그 끝을 붙잡았다.
타타리고가 뿜어낸 힘을 받는다, 누적한다, 그리고 휘몰아친다.
공격을 받아 낸 김건의 몸이 회오리치며 직선으로 뻗어 나가던 주먹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것은, 에디 슐츠가 김건과 합작하여 완성시킨 발경.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보다 큰 힘으로 되돌려주는 기술.
그 시전 난이도는 극악.
실패하면 역이용은커녕 오히려 상대의 공격을 일부러 맞고 죽어 버리는 극한의 리스크를 지닌다.
하지만 성공했을 경우,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적의 한 수가 된다.
에디와 김건은, 그 발경법에 건곤대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김건의 손끝을 따라 날아가는 타타리고.
수 미터에 달하는 금속의 육체가 머리부터 시작해 고속으로 추락했다.
김건은 공격을 날린 타타리고의 힘을 이용해, 건곤대나이의 묘리로 그를 메다꽂아 버린 것이다.
콰아아앙!
거인의 체중, 그리고 힘이 그대로 돌아와 지면이라는 이름의 철퇴로 타타리고의 머리를 내리쳤다.
초합금이라 불러도 될 두개골이 단박에 쪼개지며 거인의 두부가 캔처럼 찌그러졌다.
폭음과 함께 솟구쳐 오르는 흙먼지.
지시를 내릴 두뇌를 잃어 척추 반사만 남은 몸이 부들부들 떨며 지면에 스러졌다.
“타타리고!”
단순 육체 능력이라면 그 아그니스마저도 대적할 수 없는 타타리고가 단 한 수에 죽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발러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채 숨을 들이켜기도 전에, 흙먼지를 뚫고나온 검은색의 갑주가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큭!”
이를 악물며 검을 뿌리는 발러, 팔을 들어 역수검으로 방어하는 김건.
그가 칼날을 흘리려 하자 발러는 바로 손목을 틀었다.
김건은 그 와중에도 반응해 왔지만 기가스의 몸을 두들기고 공격을 받아 내는 와중에 역수검이 휘어 버렸다. 잘못된 무기의 각도 때문에 기술이 실패.
콰앙!
팔과 대검이 튕겨져 날아가며 금속의 파편이 비산했다.
충격으로 부러진 한쪽 역수검이 날아가 지면에 꽂혔다.
발러가 검을 고쳐 쥐었다.
실력은 모르겠지만 무기의 질은 이쪽이 위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무기의 간격에서 해결한다.
발러는 바로 대검을 휘저어 공간을 차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건의 판단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이미 체중을 앞으로 실은 김건은 남은 역수검으로 대검을 미끄러트리며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서로의 주먹이 얼굴에 닿는,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육박전의 거리.
여기서 무기에 집착하면 당한다!
발러는 바로 칼을 버리고 자세를 갖췄다.
큰 동작은 필요 없다. 잘못하면 타타리고가 당했던 것처럼 그 기이한 기술을 맞고 한 번에 끝나 버릴 수도 있다.
그는 오히려 더 김건을 향해 몸을 붙였다.
체격과 체력, 그리고 내구도라면 여전히 발러가 더 위다. 김건이 다루는 장난감 같은 기계보다 떨어지는 육체를 가진 기억은 없다.
초근접 거리에서 두 사람이 양팔을 부딪혔다.
“쉭!”
발러가 옆으로 미는 호권을 날렸다. 김건을 그것을 받아 내며 곧장 주먹을 찔러 넣었다.
팔꿈치로 튕겨 내며 바로 손을 뒤집어 내려치는 발러. 뻗어 온 손이 그것을 차단.
차단과 동시에 손목을 잡아 오며 김건이 축을 뒤틀자 발러는 반 보 앞으로 나가 중심을 잡고 대응했다.
공격과 방어. 회피와 차단. 두 손과 두 다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전했다.
투타타타타타!!
두 사람은 딱 붙은 상태에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공수를 주고받았다.
공기가 터져 나간다. 각자의 갑주가 부딪치며 불똥이 튀기고, 갈려 나간 금속의 조각이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두 팔 두 다리, 인간형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이만한 근접거리에서의 공방은 기본적으로 정해진 공식이 있다.
어떤 공격이 날아올 때 어떻게 막고 반격할지, 그렇게 반격이 들어오면 어떻게 대응할지. 그렇기에 보다 빠르게 공수 교환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그저 몸에 입력해 둔 공식에 상황을 대입해 척추반사로 답을 출력해 내고 있을 뿐이니까.
발러가 자신 있게 나섰듯, 그 싸움에서 출력 장치, 육체라 부르는 하드웨어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서로가 똑같은 공식으로 문제를 풀어도 더 빠르고, 더 강력한 답안을 내는 쪽이 유리하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입력해 둔 공식의 갯수와 질의 차이.
얼마나 더 많은 수를, 얼마나 더 깊게 몸에 새겨 넣었는가.
그러나 그 공식을 몸에 입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랜 반복 수련이 필요하다.
결국, 노력의 승부다.
평소에 얼마나 무술에 마음을 쏟았는가. 얼마나 더 많은 연습을 하고, 얼마나 더 많은 연구를 했는가.
발러는, 그 부분에서 자신이 밀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뻗을수록, 팔을 움직일 수록, 저쪽의 수가 이쪽의 수보다 더 효율적이며 세련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발러는 오랜 삶은 살아온 화신이다.
그는 화신의 힘을 얻어, 인간보다도 짧은 그린스킨의 수명을 초월해 수백 년을 살았다. 그동안 끝없이 정진해 왔기에 최강의 그린스킨이 되었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여의주가 아니라 아그니스의 부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렸다.
그가 수백 년 동안 쌓아왔던 공부가, 수십 년짜리 공부에 뒤처졌다.
‘대체 얼마나…….’
대체 얼마나 노력을 거듭한 건가.
대체 얼마나 진지하게 싸워 이기는 법에 몰두해 있었던 건가. 그 기술의 깊이에 눈앞이 아득해져 갈 즈음, 김건이 양손을 떨쳤다.
파앙!
튕겨져 나가는 양팔, 드러나는 몸통.
발러의 자세가 무너졌다. 김건이 승부에서 이겼다. 그는 그대로 파고들어 발러를 향해 남아 있는 역수검을 휘둘러 왔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타이밍, 유려한 체중 이동, 낭비 하나 없이 곡선을 그리는 칼날의 궤도.
발러는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가진 진가를 깨달았다.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름다워…….”
짧은 탄식, 그것이 끝나기도 전에 낭창거리는 칼날이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잘려 나간 그린스킨의 머리가 백발을 휘날리며 저편으로 날아갔다.
고개를 돌려 다음 목표를 찾는 김건.
그 앞에 붉은 피부의 악마가 섰다. 검을 빼 들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와라!”
파이몬이 호흡을 내뱉는다. 그녀가 발러와 타타리고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건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세상은 티아마트의 투계와 맞먹을 정도의 아수라장이다.
강자는 살고 약자는 죽는 무한경쟁의 투기장.
모든 존재가 끝없이 목숨을 불태우며 싸움에 몸을 바치는 수라지옥.
그 안에서 빚어 낸 그녀의 기술, 초열검은 무적이었다.
아그니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초열검을 완성한 그녀의 일수를 견뎌 내지 못했다.
그건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도 유효하다.
벌써 네 명의 화신을 처리한 죽음의 사신이 묵광을 뿌리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파이몬이 자세를 잡았다. 많은 동료가 죽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이제야 그분에게 내가 더 뛰어난 존재, 더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
아그니스를 떠올린다. 상상하기만해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강력한, 힘의 상징.
이 한수는, 그분의 사랑을 받기 위한 초석이 되리라.
파이몬이 검을 고쳐 쥔다. 온몸에 힘이 충전되고, 근육이 꼬이며 다음에 뿜어져 나올 막대한 힘을 장전했다.
받아라, 초열검 1식…….
턱!
“아?”
기술이 나가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김건이 손을 뻗어 그녀의 칼 손잡이를 억누른 것이다.
급변 기동술, 절화.
김건은 급격한 이동속도의 변화로 파이몬의 감각을 흩트려 눈치채지도 못할 타이밍에 거리를 좁힌 것이다.
제아무리 강한 기술이라 한들, 발동되기 전에 제압당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는 법.
승부를 가른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본기의 차이.
김건이 팔을 휘둘렀다. 새파란 칼날이 눈앞에 닥쳤다. 당황한 파이몬은 지금의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잠깐…….”
싸악─!
말을 맺기도 전에 지나가는 칼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김건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악마의 얼굴 가운데에 가로로 금이 생겼다.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리는 악마. 그리고 그것이 행동을 마치기도 전에, 스르륵 미끄러져 내린 머리의 반쪽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