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34화
파이몬을 쓰러트린 김건이 발을 멈췄다.
슈츠를 입은 뒤 지금까지 호흡을 다섯 번은 들이켰을 까.
한계를 호소하는 폐를 진정시키고, 사방에서 울리는 온갖 이상 신호를 받아 감각을 재조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앞으로 남은 산을 넘기 위한 마지막 점검이었다.
의외로 신체의 손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화신들의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전투로 얻은 전신 타박상. 온몸에 멍이 들고, 뼈 몇 개에 금이 갔지만 지금 같은 혈전에서는 상처라고 볼 수도 없었다.
오히려 문제는 슈츠의 파손, 그리고…… 뇌의 과부하였다.
이미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드레날린 때문에 몸의 아픔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도 지독한 두통이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마력을 분해하는 진동의 사용으로 인한 부하, 그리고 슈츠를 조종하기 위해 투입된 약물과 전기 충격이 뜨겁게 뇌를 달구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점차 감각이 흐려지고 있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지만, 플래시가 반짝이듯 눈앞이 깜빡이곤 했다.
슈츠의 손상은 더 심각했다. 양팔에 달려 있던 역수검 중 하나를 잃었고, 나머지 하나도 뼈와 살을 쳐내고 강철을 벗겨 내고 두들긴 탓에 날이 많이 상했다.
무기라는 것은 본디 소모품. 마력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그 소모는 더더욱 빠르다.
아무리 명검이고, 아무리 내구도가 좋아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날이 다 빠져 버렸기에, 무기로서의 성능을 기대하긴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발러의 일격으로 날아간 완갑, 타타리고의 잽을 몇 번 받아 낸 것과 건곤대나이를 사용하는 와중에 미처 흘려 내지 못한 충격 때문에 내부에도 타격이 갔다.
결합이 어긋난 냉각장치에서는 계속해서 수증기가 새어 나오고 슈츠의 내부 온도도 지속적으로 상승 중이었다.
슈츠의 상태를 알려 주는 안면부의 인터페이스가 표기하는 가동 가능 시간은 앞으로 5분.
하지만 이미 센서를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김건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감각으로 앞으로 남은 것은 2분 남짓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상태는 가히 최악.
아니, 어떻게 보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다섯의 화신을 처치했는데 최악의 상태로라도 싸울 여력은 남아 있었으니까.
문제는 이 상태에서, 김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상대와 겨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죽인 화신들은 그저 조무래기. 진짜 머리를 해치우지 못한다면 이번 사태는 끝나지 않는다.
김건은 겨우 안정을 찾은 호흡을 내쉬며 바닥에 나뒹굴던 발러의 대검을 차올려 붙잡았다.
가볍게 허공에 휘둘러 무게 중심과 손잡이의 느낌을 확인한다.
그리고,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캇캇캇캇-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메마른 박수.
왕좌에 앉아 있는 아그니스가 손을 부딪치고 있었다.
“대단하군. 역시 다른 것들은 다 쓰레기에 불과했어. 네가 진짜다.”
주변의 마력이 사라졌는데도 정령은 여전히 불타는 갑옷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력의 영향으로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돼먹은 생명체인 것이다.
아그니스는 상체를 기울여 김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조금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군. 남에게 의존할 뿐인 나약한 자라고 판단을 내렸더니, 이 정도의 힘을 보일 줄이야.”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도 아그니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까보다 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들뜬 음성으로 정령이 말을 이었다.
“한서리를 살려 주마. 아니, 한서리와 같이 있게 해 주지. 지금의 네 힘을 보건대, 너희는 그냥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 게 좋겠어. 네가 원한다면, 한서리까지 내 아래로 받아들이겠다. 어떤가, 이 조건에도 내 신하가 될 생각은 없는 건가?”
그 대답은, 순식간에 밀어닥친 칼날이 대신했다.
아그니스가 움직였다.
그의 등 뒤에서 순식간에 뽑혀져 나온 보석의 대검이 김건의 칼을 맞받아쳤다.
카강!
뒤얽히는 칼날.
김건은 그대로 칼날을 틀어 검극으로 아그니스를 찌르려고 했지만 아그니스는 검을 맞댄 면을 살짝 끌어당겨 움직임의 중심점을 틀어서 방어했다.
김건은 지금까지의 기세를 몰아 억지로 공격을 이어 가려 했으나 실패, 아그니스가 칼날을 밀어붙여 오는 통에 그것을 받아치기 위해 힘을 뺐다.
두 검이 완벽하게 바인딩 되었다. 살짝만 손을 틀어도, 살짝만 손목의 각도를 꺾어도 곧바로 칼날이 서로의 목에 닿을 수 있는 상태.
하지만 김건이 물러나고, 선제권을 쥔 아그니스가 공격을 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검을 맞대고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김건을 압박하며 아그니스가 말했다.
“좋다. 그러면 죽여 주지. 간만의 호적수다. 이 자리에서 널 쓰러트림으로서 나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정벌에서는 마침내 삼계를 통일하게 되겠지.”
번쩍이는 보석의 눈이 불꽃을 이글이글 태우면서 선언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공세로 전환하려는 찰나, 갑자기 김건이 입을 열었다.
“이 승부의 결과로, 내가 네 신하가 된다고 하면?”
아그니스의 눈매가 꿈틀거린다. 정령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 “
그 순간, 김건은 승부를 걸었다.
이 와중에도 입을 쉬지 않는 아그니스의 방심.
그리고 김건을 탐내는 그의 욕망을 이용했다.
아그니스는 앞으로 힘을 줘 강하게 칼을 밀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검을 후퇴, 아그니스를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순식간에 검 끝을 휘돌려 반대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존하우, 사선 베기를 이용한 카운터.
곧장 반응해 검을 치켜드는 아그니스.
그는 가볍게 김건의 칼을 따라가 검신을 위로 감으면서 측면으로 이동. 김건의 검을 빗겨 올리며 동시에 감아 김건의 어깨를 내리쳤다.
자신의 검으로 김건의 공격 선을 틀어막았기에 반격의 걱정이 없는 깔끔한 카운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김건의 공격 수단이 대검뿐이었을 때만의 이야기였다.
김건이 검을 놓았다.
동시에 몸을 측면으로 세워 칼날을 피하며, 전질보로 뛰어들어 팔꿈치로 아그니스의 명치를 노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직까지 날이 살아 있는 역수검이 빛나고 있었다. 손상이 심하지만, 기습적인 일격을 노리기에는 충분하다.
“……!”
말로 흐트러트린 타이밍, 익숙한 대응을 요구하는 첫 수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대응함으로써 만들어 낸 방심, 그리고 남아 있는 보조 무기를 이용한 변칙 공격.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요소까지 계산한 세 가지의 연속 공격. 거기에 화신들을 상대하며 끌어올린 기세로 정점을 찍고 있는 기량을 더하니,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필살의 비기가 되었다.
그 아그니스조차 쉬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큭!”
하지만 따라간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어도, 아무리 스스로의 자신감에 도취되어 감각이 둔해져 있어도, 그가 갖고 있는 실력은 그 와중에도 힘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김건의 템포를 따라간 그가 손목을 뒤틀었다.
어깨 옆을 빠져나가려던 칼날이 급격하게 방향을 변경. 꺾어 베기로 김건의 목을 노렸다.
심장을 내주되, 목을 치는 한수.
같이 맞찔러 죽는 결과밖에 남지 않지만, 뒤늦게 따라간 일격으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대로 부딪혔으면, 김건과 아그니스, 두 사람이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을 맺었으리라.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가슴을 찔러 들어가던 김건이 공격을 물렸다. 머리를 숙이며 아그니스의 공격을 회피, 앞으로 굴러 그의 옆을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대검을 회수해 다시 자세를 잡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미 아그니스가 잡은 자세에 빈틈 따위는 없었으니까.
아그니스가 김건을 노려보았다.
“왜 거기서 공격을 멈췄지? 그대로 달려들었다면 날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김건은 웃었다.
“같이 돌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너랑 같이 죽을 순 없거든.”
그 말이 맺어지는 순간, 불길이 솟구쳤다.
이 나를 쓰러트리는데, 목숨조차 걸지 않겠다는 건가.
그따위 가벼운 각오로, 대의를 거스르려는 것인가.
진심으로 분노한 아그니스의 전신에서 화염이 넘실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빠르게 가라앉고, 이내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역시 못써먹겠군. 그 나약함 때문에, 너도, 한서리도 여기서 죽을 거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아그니스가, 처음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김건은 더 이상 그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타오르는 정령의 몸에서, 방심이 사라지고 욕망으로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오로지 차가운 살기만이 남았다.
아그니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최초로 김건의 앞에서 자세를 잡은 그가 택한 것은 검 끝으로 천장을 가리키는 상단세.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 대부분의 상황에 대응 가능한 최적의 형태.
그것을 마주하자 전신이 짜릿짜릿했다.
김건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과 맞서 싸웠지만 그런 그도, 눈앞에 선 정령만큼의 기량을 가진 자와 맞선 적은 없었다.
“…….”
김건은 살짝 허리를 빼고 칼날을 아래로 내렸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는 것에 특화된 방어의 자세. 그는 깊고 가늘게 숨을 뱉으며 아그니스를 주시했다.
끓어오르는 살기. 증폭하는 긴장.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마치 얼어 버린 것 같았다. 대기의 흐름조차 두 사람의 영역 내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 지독한 고요 속에서 김건은 아그니스를 주시했다.
아그니스의 실력은 그보다 위였다. 따라서, 다음 수를 거의 읽을 수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아주 희미한 잔재뿐.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다음 격돌이 끝났을 때, 이곳에서 서 있는 것은 한 명 뿐일 것이다.
그의 눈앞에 표기되고 있는 가동 시간 한계는 3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김건이 예측했던 시간까지, 앞으로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초조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진짜 승부가 갈리는 데에 필요한 건 0.1초도 안 될 테니.
그러니 여유롭게 시간을 쓴다.
실력이 모자라더라도 상관없다. 승부에 절대라는 말은 없으니까.
그러니 마지막 1초까지 다 써서, 그 희미한 잔재를 읽고 또 읽어서, 단 일격으로 괴물을 쓰러트린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둘 다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기세는 중앙에서 무서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바꾼 것은, 아그니스.
그가 치켜들었던 검 끝을 살짝 틀었다.
흠칫, 김건의 어깨가 떨렸다.
검 한 번 내리치지 않았는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순서에 호흡이 꼬였다.
지금까지 읽었던 수가 흐트러지고, 다시금 그것을 재정비하려는 순간, 아그니스가 벼락같이 그를 덮쳐 왔다.
“……!!”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내려친 일섬. 김건은 바로 칼날을 올려쳐서 막아 냈지만 타이밍이 비틀렸다. 검을 받아 내는 위치가 잘못되었다.
주도권을 빼앗긴다.
원래는 방어와 동시에 수평 베기로 전환해 반격해야만 흐름을 잡을 수 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휘리릭!
반격은커녕, 오히려 아그니스가 먼저 수평 베기를 펼쳐 방어를 뚫고 칼날이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주도권을 빼앗겼으니, 대응할 수밖에 없다.
아그니스와 마찬가지로 수평 베기를 시전해 맞받아치는 김건.
그러자 아그니스는 곧장 검을 내리눌러 공격을 막았다. 주도권을 빼앗겼으니 당연히 반응이 늦다.
그렇게 몸의 중심이 흔들린 순간, 아그니스의 공격 선이 김건의 몸에 닿았다.
아그니스가 손목을 튕겼다. 순식간에 검 끝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큭……!”
처음으로 생긴 유효타.
가까스로 슈츠의 완갑이 방어했으나 그 충격으로 곧장 상완부의 기동성이 떨어졌다.
더 느려지는 반응 속도. 하지만 김건은 이를 악물고 아그니스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곧장 검극을 꺾어 아그니스의 보석검을 비껴 내고 안쪽으로 칼날을 밀어 넣었다.
가볍게 후퇴하며 사선 베기로 막아 내는 아그니스. 다시금 두 사람의 검이 바인딩 상태를 이루고, 그제야 다시금 중점을 잡은 주도권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였다.
카각, 카가가가각!
칼과 칼이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기는 난타전이 아니다.
얽힌 검이 이리 꼬이고, 저리 뒤집히며 뱀처럼 뒤얽히는 초근접 승부.
바인딩 상태에서는 약간의 손 움직임만으로 상대의 전신을 노릴 수 있다.
순식간에 머리에서 다리, 허리에서 어깨를 오가는 공격선.
그것을 막는다. 공격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반격.
그러면 반격을 다시 반격하고, 회피에서 이어지는 공격, 공격에서 이어지는 회피.
대부분의 경우 검을 마주친 후에는 일순에 결판이 난다.
하지만 지금 검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양쪽 모두 기술의 극의에 다다른 자들이었다.
서로 공방일체의 기술을 펼치고 있으니 계속해서 공방이 이어진다.
그것은 마치 해가 떠오르고, 달이 지는 것마냥 자연스러웠다. 계속해서 몸을 뒤섞는 금속의 춤은 마치 스스로를 삼키는 우로보로스처럼 무한한 순환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나, 그 상태가 유지된 것은 고작해야 수십 초.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아그니스의 칼끝이 김건의 몸에 닿기 시작했다.
점점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갑주의 균열. 김건의 몸에 빠르게 상처가 늘었다.
방금 전, 김건과 맞붙었던 발러가 느꼈던 실력의 차이를, 지금은 김건이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정령이 대체 어느 정도의 사투를 벌여 왔는가. 김건은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넘어온 사선의 횟수가 달랐다. 지금까지 극복해 온 역경의 정도가 달랐다.
수많은 차원을 정복하며 쌓아 온 아그니스의 기량과 경험.
그 차이가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앞으로 수 초가 고작이다.
아직까지는 서로의 기량이 비슷해 빈틈이 적은 작은 기술만 주고받고 있지만 이 이상 흐름을 빼앗기면 곧바로 큰 것이 날아올 것이다.
그러면 김건은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그 뒤에는 자비 없이 종횡하는 칼날이 그를 산산조각 낼 것이었다.
단순한 전투 기술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는 김건.
어떻게든, 그게 뭐라도 좋으니 그가 아그니스보다 앞서는 것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가 아그니스보다 앞서는 것.
그것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일순에 짜이는 작전. 일순에 가다듬은 각오.
조상님, 아버지.
부디, 제게 무운을.
김건이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