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37화
확실하다.
김건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겉보기에 큰 외상도 없어 보이니, 지금 당장 생명이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알리시아의 눈에 보이는 한서리의 얼굴은 참혹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서리의 몸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푸른 마력이 몸을 감싸고 휘돌자, 빠르게 상처가 회복되어 갔다.
부러진 다리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부러진 이빨이 새로 돋아났으며, 얼굴의 붓기가 가라앉았다.
이전의 한서리에게서는 보지 못한 능력.
그것은 인간도, 용족의 것도 아니었다.
‘다른 화신들의 기술을 보고 익히신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알리시아가 입을 열려고 할 때, 한서리가 먼저 그녀를 불렀다.
“알리시아.”
한서리의 말소리는 똑발랐다. 흔들림 따윈 찾을 수 없고, 위엄이 감돌아 있었다. 알리시아는 얼른 부복하며 대답했다.
“네.”
“돌아가. 돌아가서 모든 게 끝났다고 알려. 적의 수뇌부는 전멸했고, 남은 이들 역시 곧 이 세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남은…… 이들까지도요?
아무리 우두머리인 화신들이 죽었다고 하나, 선계 침략군의 세력은 아직 건재했다.
그런 그들이 얌전히 물러갈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을 깨달은 알리시아, 그리고 그 뒤에 선 그린스킨의 표정이 굳었다.
한서리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마력의 파장을 떨쳤다.
화신의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퍼엉!
먼 거리에서 귀를 찢는 폭음이 들렸다.
알리시아는 그것이 물체가 음속을 돌파할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에서 초고속으로 떨어지는 물체가 있었다.
쏘아진 포탄처럼 지면에 처박히며 흙먼지를 튀기는 둥그런 물체.
여덟 개의 여의주가 한서리의 주변에 떨어진 것이다.
한서리는 그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온 신격이 여의주를 감쌌다.
그러자 옥색으로 빛나던 여의주가 점차 푸른빛으로 천천히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번져 가는 물감처럼 구슬을 감싸는 물빛.
그리고 그것이 구슬의 모든 부분을 덮자, 다시 한번 충격이 터지며 무지개색 빛살이 한서리에게 내리꽂혔다.
사방을 뒤덮은 휘광과 신격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알리시아와 그린스킨이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들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고요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한 화신의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등 뒤를 위성처럼 떠도는 푸른 여의주가 보였다.
알리시아와 그린스킨은 한서리가 한 개의 여의주를 지배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너.”
한서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그녀의 시선은 뒤편에 서 있던 그린스킨에게로 향해 있었다.
한서리의 눈을 마주한 그린스킨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눈앞의 화신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런 그를 굽어보며, 한서리가 말했다.
“이름이 뭐지?”
“러츠입니다.”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러츠, 네게 부족장의 권한을 주겠다. 그린스킨은 아직 쓸모가 있어. 너는 너희 군대를 정비해서 대기해라.”
갑작스레 전해진 명령. 하지만 러츠는 일언반구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토록 냉철하던 놈이 저리도 순순히 복종하다니. 알리시아는 아까 분지에서 러츠가 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르르릉, 굉음이 울리더니 지진이 일었다.
평평하던 지면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그 아래쪽에서 흙먼지와 함께 튀어나왔다.
눈을 돌려 주변을 확인하는 기가스.
그는 이내 한서리를 발견하곤 곧바로 머리를 숙였다. 우렁우렁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계약의 주인을 뵙습니다.”
하늘에서는 각자의 날개를 펄럭이며 새의 모습을 한 수인과 붉은 피부의 악마가 떨어져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기가스의 뒤를 쫓아 땅에서 튀어나온 촉수조차, 그 끝을 바닥에 누이며 경의를 표했다.
알리시아는 깨달았다.
용족과 한서리를 잇고 있는 권속의 계약. 그것과 똑같이 존재하던 계약을 전부, 한서리가 이어받은 것이다.
분지에 죽어 있던 화신들을 대신해서.
단일 종족으로서, 이제 멸종을 맞이한 정령을 제외한 다섯 종족이 한서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서리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알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알리시아는 숨을 삼키며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한서리는 아름다웠다.
마력으로 모든 상처를 지우고 몸을 재단장했다.
맨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 보았던 엉망진창인 모습은 간데없고 무지갯빛 신격을 내뿜으며 은발을 휘날리는 화신만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알리시아에게는 보였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속마음이.
언뜻 무표정해 보이지만 한서리의 얼굴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알리시아는 한서리가 엄청난 고통을 견뎌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와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알리시아가 손을 뻗으려 할 때, 한서리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알리시아의 어깨를 잡았다.
“고생했어. 네가 언령을 거부하고 그이를 보내 준 덕분에 상황이 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먼저 움직여 줘. 설명이라면, 나중에 다 해 줄 테니까.”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다.
그것을 내기 위해 얼마나 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을지, 알리시아는 가슴이 떨릴 정도로 알 수 있었다.
그런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알리시아는 어깨에 올라온 한서리의 손을 꼭 쥐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동의를 얻은 한서리가 다섯 종족을 향해 눈짓을 던지자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중력 방벽이 해제되며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리시아는 곧장 순간이동의 술식을 짜 올리며 한서리를 돌아보았다.
지금의 한서리는 너무나 강력해 보이면서도,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바람만 불어도 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게 불안해져서 입을 열었다.
“혹시…….”
한서리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 가볍게 웃었다.
“금방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
한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알리시아는 바로 순간이동을 발동했다.
황금빛을 남기며 알리시아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한서리와 나머지 다섯 종족의 현 대표들만이 남았다.
한서리는 우선 지면에 몸을 누이고 있는 크투그아의 개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촉수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희는 돌아가. 너희들의 세상으로.”
촉수는 그 끝을 까딱여 명령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마법을 발휘해 녹아들듯이 지면으로 사라졌다.
이걸로 크투그아는 아직 남아 있는 태평양 게이트를 통해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한서리의 눈이 나머지 종족들에게 향했다.
“너희들은 할 일이 많아. 내 명령에 반할 계획이 있거나, 내가 너희들의 화신이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다면 지금 말해라.”
증폭하는 신격. 그리고 냉랭한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종족째로 이 세계에서 완전히 없애 줄 테니까.”
“……!!”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의 한서리는 정말로 그 말을 실천할 능력이 있었다.
“어찌 그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마와 수인은 몸을 떨며 고개를 박았다. 반면 기가스와 그린스킨은 그저 부복한 상태로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한서리는 그런 그들의 차이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차분히 그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 * *
선계의 침략이 종료되었다.
돌아간 알리시아가 그 사실을 알리고, 인류와 용족들이 그 말의 사실 여부에 혼란해하는 동안, 한서리에 의해 통제되는 선계 침략군은 빠르게 움직였다.
전 지구를 통제하고 있던 중력장과 크투그아의 마력 중화가 해제되었다.
온 세상의 바다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크투그아가 태평양 게이트를 통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관측되어, ‘정말로 끝났나?’ 싶은 희망론이 고개를 쳐들었으나 아직 나머지 군대들은 히말라야 산맥에 건재했기 때문에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상황.
그 와중에 제 발로 인간들을 찾아온 각 종족의 대표들이 그들에게 전쟁의 종료를 선언하고 이후의 계획을 선포함으로써, 또다시 인간들의 세상은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 * *
그렇게 바깥세상이 혼란한 와중.
한서리는 조용히 거실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확인했다. 몸을 뉘인지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
앞으로 더욱 바빠질 것이다. 그것을 위해 푹 자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서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와 김건이 살던, 둘만의 보금자리.
한서리가 일어난 곳은 거실의 소파였다. 그녀는 눈자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아무리 화신이어도, 여의주의 힘을 얻어도, 온몸을 마력으로 변환하지 않는 이상 육체의 한계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녀는 무심코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밀봉 용기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에 붙어 있는 메모가 보였다.
‘오래되어도 괜찮은 보존식이니까. 언제든 데워서 먹으면 돼.’
오밀조밀, 또박또박 적혀 있는 정갈한 글씨.
김건의 필체였다.
“…….”
한서리는 못 박힌 듯이 한참이나 냉장고 앞에 서 있다가 겨우 몸을 움직였다.
밀봉 용기를 꺼냈다. 그 위에 붙어 있는 메모를 떼어 내곤, 적혀 있었던 것처럼 용기 안의 요리를 데워서 먹었다.
음식은 맛있었다.
맛을 느끼는 그 혀를 잘라 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홀로 적막한 식사를 끝낸 한서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두 사람이 함께 몸을 누이던 침대에 누워 있는 김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각종 생명 유지 장치들이 놓여 있고, 한서리가 직접 제작한 골렘이 곁에 서 있다.
한서리는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잘잤어?”
“…….”
대답 없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가볍게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하지만 김건은 깨어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예민한 남편이다.
평소라면 건드리기도 전에, 밖에서 움직이는 소리만으로도 잠에서 깼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뇌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니까.
모든 기억을 잃었을 뿐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이 회복 마법까지 방해하고 있어 의식조차 되찾지 못한다.
원망스러운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김건은 약속을 지켰다.
모든 화신들을 죽이고, 같이 돌아가고 싶다던 한서리의 소원을 들어 준 것이다.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한서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섯 개의 세계, 인간을 제외한 여섯 개의 종족을 손아귀에 쥔 기린의 화신, 한서리.
생명체라면 누구나 동경과 경외의 시선을 던질 존재가 되었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오로지 공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응어리진 울음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려 한다.
하지만 한서리는 참았다.
무너지지 않았다. 슬픔에 매몰되지 않았다.
무려 그이가 지켜 준 목숨이고 그이가 지켜 준 자신이다.
자책하는 건,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건 남편이 한 일을 폄하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었다. 절대로.
한서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나아가는 것이다.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남편이 자신에게 준 사랑에 걸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멈춰 있어서는 안 되었다.
마음을 다잡은 한서리는 겨우 호흡을 되돌린 후 다시금 남편을 바라보았다.
“금방 올게.”
다정하게 속삭이며, 남편의 머리칼을 쓸어 준 한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런 그녀가 향한 곳은 거실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가진 그곳에는 여덟 개의 여의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