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39화
한서리의 각오에, 알리시아와 세라스는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던 세라스가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듯 말문을 텄다.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뭐!? 아이가 있다고?”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자마자 선계의 침략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서리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한서리의 측근인 알리시아마저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볼 정도였다.
세라스는 한숨을 쉬었다.
“김건한테 들었어. 네가 아이를 가졌다고.”
“……!!”
소리 없이 경악하는 알리시아. 그리고 한서리는 조용히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세라스가 말했다.
“그래서, 아이는 어떻게 할 거야? 육아까지 하면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여행을 할 수 있겠어? 그게 아니면 설마…….”
문득, 세라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표정으로 의도를 깨달은 한서리가 말했다.
“버리지 않아.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었다. 한참이나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아이는…… 봉인해 뒀어.”
“봉인?”
“내 몸에 결계를 쳐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도록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해 뒀어. 여의주의 힘을 이용하니까 되더라. 한마디로, 자라지 않은 상태로 내 몸에 봉인된거지.”
세라스가 처음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건 너무…….”
“너무하다는 건 알아. 내 멋대로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지금은 낳을 수 없어. 이 아이를 낳는다면…… 내가 못 버틸 것 같아. 내 마음을 쪼개서, 그이를 위해 여행하며 아이에게까지 사랑을 주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 아이에게도 못할 짓이고.”
“…….”
“분명히, 비틀린 관계가 되어 버릴 거야. 내가 그이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한서리가 지금까지의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깊은 각오를 했는가.
그것을 실감하자 세라스는 차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혼란에서 빠져나온 알리시아가 말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단시간 내에 김건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면 될 일이에요.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그게 맞는 말이긴 하다.
세라스는 좋게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이야기가 정리된 것 같자, 알리시아가 물었다.
“그래서, 저희가 구체적으로 뭘 도와드리면 되죠?”
문득, 한서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이 바보가 진심으로 묻는 건가?’ 라는 얼굴로 말했다.
“뭘 돕긴. 나랑 같이 가자는 거지.”
온갖 차원을 넘나들어야 하는 대규모의 탐색이다. 그런 것을 하는데 대군은 데리고 다닐 수 없다 쳐도 최소한의 팀은 꾸려야 했다.
아무리 잘나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서리는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원했다.
계약을 통해 배신하지 않는 동료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여차할 때 도움이 안 될 것이다.
“??”
한서리의 말에 알리시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라스도 마찬가지로 바보 같은 얼굴로 물었다.
“……? 그 탐사가 얼마나 걸리는데?”
“모르지. 몇 년이 될지 몇백 년이 될지…… 어쩌면 몇만 년이 걸릴지도 몰라. 전 차원을 다 뒤져야 하니까.”
“그럼 그걸 찾기 전에 우리가 죽을 수도 있겠네?”
얘는 또 왜 이래.
한서리는 이마를 감쌌다.
“……여분의 여의주가 있잖아. 그 힘을 받아들여서 화신이 되면 돼. 화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면 수명 정도는 극복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인즉,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탐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와 달라는 것이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 거절해도 돼.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두 사람이라서 먼저 말한 거니까.”
세라스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싫은 건 아니야. 나야 뭐, 가족이랑도 연을 끊었고…… 결혼도 안 했으니까…….”
“저도 괜찮습니다만…….”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
한서리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그런데 반응들이 왜 그래?”
문득, 무언의 신호가 통한 세라스와 알리시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과 표정을 보고 그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는 걸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세라스는 머리를 빙빙 꼬며 말했다.
“아니, 네가 이렇게 솔직하게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서…….”
“조금은 인정받은 기분이 드는군요.”
이번에 말을 잃은 것은 오히려 한서리 쪽이었다.
“…….”
세라스가 쳐다보자, 그토록 당당하던 얼음의 여왕이 은근슬쩍 눈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세라스는 한서리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도 모르게, 김건의 모습이 떠올랐다.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저 전사로서의 실력만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세라스는 회귀한 직후의 한서리의 모습을 생각했다.
김건에게 집착하며 다른 이의 손길을 거부하던 과거의 그녀를 떠올렸다.
그때의 한서리는 위태로웠다.
만약 지금처럼 김건이 쓰러져 버리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제 그것은 전혀 쓸모없는 걱정이 되었다.
과거의 한서리는 누군가에게 감사할 줄을 몰랐다. 애초에 도움을 받지 않으니 감사할 이유가 없고, 모든 인간은 그저 거래 관계일 뿐이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토록 고고하던 여왕님이 이렇게나 변했다.
자존심을 굽히고, 이렇게 솔직하게 타인에게 약점을 밝히며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김건이 지킨 건 한서리의 몸만이 아니다. 그는 한서리의 마음까지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타인의 마음까지 지킬 수 있는 검.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심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그 검을 완성시킨 것은 또 누군가.
부서져 버렸던 김건의 모습을 기억한다.
하지만 부러졌다고 생각했던 검이 홀로 여섯의 화신을 베고 멸망을 막았다.
세라스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안다. 닳아 버린 김건의 날을 되살릴 수 있는 건 오로지 한서리밖에 없다는 것을.
부러웠다.
그리고 자랑스러웠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당당하게 절망과 맞서 싸워 나가는 두 사람이.
세라스는 손을 치켜들었다.
“난 할게. 너도, 김건도 내 소중한 친구고…… 김건은 내게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준 스승과도 같은 존재야. 이제야 그 은혜를 갚을 때가 왔네.”
“저도 하겠습니다. 팀장님과 김건…… 두 사람 덕분에 이 세상에 신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마찬가지로 손을 들며 말하는 알리시아.
세라스는 그런 그녀를 보고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순진하시네요. 신이 도운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그만큼 잘한 거죠.”
알리시아는 ‘어쭈? 이놈 보게?’ 라는 눈으로 세라스를 쳐다보았다.
“진짜 신이 있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만?”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그렇게 두 사람이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 한서리는 안도의 쉬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네…….”
“고맙긴.”
세라스는 피식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그게 뭐냐는 듯 바라보는 한서리. 반면 알리시아는 금세 세라스가 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세라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한서리에게 농을 건넸다.
“계획은 잘 세우시면서 이런 건 잘 모르시나 보군요. 용족인 저도 아는데.”
씨익, 세라스가 웃었다.
“계획이 세워졌으니까, 우리끼리 파이팅 한번 하자고.”
“음…….”
한서리는 언제나 지휘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쉬이 하는, 사기를 높이기 위한 의식에는 지식이 없었다.
그녀는 눈치껏 머뭇머뭇 손을 뻗어 두 사람과 손을 겹쳤다.
세라스가 말했다.
“모두 힘을 모아서, 그 바보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거야.”
“…….”
한서리는 입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다. 다만 다시 한번, 마음에 각오를 새겨 넣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같은 인류로서, 회귀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휘둘려 왔다.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는 이 세상의 위기에 쫓겨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세계는 완전히 안전을 찾았다.
그녀는 이미 이곳을 침공해 온 여섯 세계를 이용해 새로운 방위군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계산대로 되기만 한다면, 다른 선계는 물론이고, 벨제불과 티아마트가 다시 손을 뻗어 오더라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의 군세다.
만약 티아마트나 벨제불의 주인격이 접근해 온다면야 막을 수 없지만 그녀가 그것까지 책임질 수는 없었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줬다.
이 정도면 됐다.
한서리의 어깨에 짊어져 있던 모든 의무가 끝났다.
김건이, 남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어 줬다.
그러니까 가자.
행복을 찾으러.
“““파이팅!”““
* * *
그날을 기점으로, 한서리는 탐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제일 급하게 해야 할 것은 그녀 대신 여섯 세계를 진두지휘할 컨트롤 타워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한서리는 더 이상 그것에 노력을 쏟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대충 각 종족별 대표를 뽑아, 그들의 사이를 중재해 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목적은 지구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종족들이 인간들과 용족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몇 가지 안전장치 정도는 준비해 두었다.
척 보아하니 지금 상황에 불만을 가질 것 같은 악마와 수인들 대신 그린스킨과 기가스에게 계약의 힘을 조금 나눠 주어 문제아가 될지도 모르는 두 종족을 통제하도록 하고, 별다른 지능은 없으나 화신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크투그아에게 명령을 내려 만약의 일이 생겼을 경우 인간과 용족을 돕게 했다.
문제라고 하면 이번 사건으로 벌어진 인간과 용족 간의 신뢰 관계 정도였으나…… 그것은 가벼운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오직 시간만이, 그 갈등의 틈새를 메워 줄 것이었기에 그녀는 오히려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화해하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그것을 제외한 한서리의 모든 활동은, 모두 오랫동안 선계를 넘나들기 위해 필요한 물건과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일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은 이동 수단이었다.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그 어디를 가더라도 편하고, 쉽게, 탐사대를 날라다 줄 존재.
많은 이종족의 기술자들이 그녀의 부름에 응했고, 그런 그녀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세라스는 그녀가 애용하는 곤륜산의 수련실에 틀어박혀 한서리에게 건네받은 여의주의 힘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잘 안 되네…….”
마법에 능통하고 그녀보다 훨씬 더 마력 용적이 큰 알리시아는 금세 화신이 된 것 같았으나, 인간인 그녀가 화신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노력이 필요했다.
여의주를 중앙에 놓고 펼쳐져 있는 마법진.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마주 앉아 그 힘을 흡수하고 있던 세라스가 문득 눈을 떴다.
“뭐지?”
기린의 힘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강화된 그녀의 감각에, 뭔가 거대한 것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는 세라스.
그런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하늘 끝에서부터 대기권을 관통해 유성처럼 떨어지는 한 함선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