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43화
<<나는 선계의 관리자다.>>
테라핀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인즉, 그가 평범한 화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 말대로라고 하면 시간 역행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곧 그이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떨려 왔다.
설레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끓어 오르는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한서리는 자신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흥분을 감추며 차분히 다음 말을 이었다.
“네가 선계를 관리한다고?”
<<그래. 하지만 관리자는 나 혼자가 아니야. 지금도 많은 화신들이 선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있지.>>
“선계를 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일한다는 말이야?”
<<그렇다.>>
“그러면 한 선계가 다른 선계를 침략하거나 하는 것에도 제재를 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비록 선계화가 진행되는 도중이었다고는 하지만, 내 세계가 침략을 당했는데 왜 그때는 가만히 있었지?”
<<뭔가 잘못 알고 있군. 그 정령은 선계를 스스로의 의지로 통합시키려 한 것이지, 선계를 약화시키려 하지 않았어.>>
한서리가 아그니스의 선계 침략군을 가리켜 묻자, 테라핀은 콧김을 내뿜었다.
<<그들은 화신을 죽이지도, 기린의 계약을 쓸데없이 소모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이용하기 위해 화신의 힘을 다루기 편한 형태로 바꾸었을 뿐이지. 그 과정에서 각 세계가 다소 부서지거나 권속들이 죽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선계가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으니까.>>
“…….”
<<오히려 문제는 너희들이다. 너와 함께 역행해 온 인간. 그 인간이 여섯 화신을 죽여 버린 탓에, 기린의 힘이 더욱 약해졌어. 관리자들 중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상황을 예상했더라면, 제재는 그들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가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치고는 꽤 대답을 잘해 주는군. 내가 찾는 시간 역행은, 다시 한번 억지력의 폭풍을 불러 올수도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대담한 말이었다.
‘도와줄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없다면 빨리 관둬.’
라고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짧은 대화로 테라핀의 성격을 추측한 한서리는,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런 대담함이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문득, 거북이의 머리가 움직였다.
쾅, 쾅 부딪치는 주둥이. 그리고 거기서 떨어지는 암석의 조각.
한서리에게 그 모습은 어쩐지 그가 웃음을 터트린 것처럼 보였다.
테라핀이 말했다.
<<모든 관리자가 동일한 생각과 방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계를 이끌 뿐이다.>>
그 말로 확정되었다.
테라핀은, 이쪽을 도와줄 마음이 있다.
그 진정한 속내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굳이 말을 빙빙 돌릴 필요 없었다.
한서리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알려 줘. 어떻게 하면 시간 역행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지?”
<<그전에 묻지. 그 힘으로 뭘 할 생각이지?>>
이쪽은 정보를 숨겨서 이득을 볼 것이 없다. 한서리는 솔직히 대답했다.
“내 남편, 부서져 버린 내 남편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거야.”
<<시간 자체를 되돌리려는 건 아닌가. 필멸자의 육체를 잠깐 뒤로 돌리는 것 정도라면, 억지력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군.>>
테라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 주지.>>
“……!!”
이번에는 한서리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기대심이 차오르고, 숨결이 가빠졌다.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리시아와 세라스 역시 주먹을 꽉 쥐었다.
테라핀이 말을 이었다.
<<다만 이것만은 말해 두지. 시간 역행의 힘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린 세라스가 입을 막았다. 그 옆에 있는 알리시아도 조금이지만 실망한 기색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한서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에 모든 해답을 얻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실밥 하나.
아무리 실이 어렵고 복잡하게 얽혀 있더라도, 차근차근 따라가면 그것을 풀어낼 방법이 될 실밥의 끄트머리.
그 정도 단서만 얻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시간 역행의 마법을 쥐고 있는 것은 아마 선계 어딘가에 있을 한 기린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한서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명의 화신에게 시간 역행이 봉인되어 있다는 말인가?”
<<봉인이라, 그건 잘 모르겠군.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이 넓은 선계 어딘가의 한 화신은, 그 시간 역행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기린과 화신을 따로 두고 생각하지 마라. 기린이 곧 화신이고 화신이 곧 기린이다. 기린이 시간 역행의 기술을 갖고 있다면, 화신 역시 그것이 가능한 것이 당연해. 다만 그 대상이 존재하는 모든 화신이 아닐 뿐이다.>>
그 말을 들은 한서리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여행을 떠나기 전, 여의주의 정보를 탐색했을 때, 그녀는 여의주마다 읽어 낼 수 있는 기린의 정보가 각각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건가.
기린을 여러 개로 쪼개 놓은 것이 곧 화신. 그러니 기린이 가진 것이라면, 그것이 쪼개진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전례도 있어. 내게도 다른 화신들의 접근이 금지된 정보가 있으니까.>>
한서리는 그 금지된 정보가 뭔지 굳이 묻지 않았다. 테라핀이 그럴 의도로 말을 꺼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어딘가에 있을 그 화신을 찾으면 되겠군. 혹시 탐색의 범위를 좁힐 수 있는 단서는 더 없나? 선계의 관리자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테라핀은 눈을 깜빡여 유감을 표했다.
<<물질적인 단서는 없다. 다만 관리자로서 일하며 깨달은 것을 하나 알려 주지.>>
“깨달은 것?”
<<선계의 관리자는 되고 싶다고 되거나, 기린이 임명하거나 하는 자리가 아니야. 그저 관리자에 어울리는 화신이, 관리자가 될 뿐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자리에 인물을 앉히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 맞춰 자리가 따라간다는 말이다. 현존하는 선계의 관리자들은 모두가 그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그 일을 수행할 자들밖에 없다. 기린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그것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어느새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을 뿐.>>
한서리는 빠르게 테라핀의 말을 해석해 보았다.
“그 말은 기린은 모든 화신의 특성이나 성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거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니까 파악할 필요가 없겠지. 그리고 만약, 필요한 역할이 있다면…….”
<<그 필요에 어울리는 자에게 역할이 부여된다.>>
바꿔 말하면, 시간 역행의 힘을 가지고 있을 화신은 그 스스로가 그 힘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는 자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어디에, 누구의 손에 있든, 그 힘을 이용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그것을 끝으로 테라핀은 침묵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눈꺼풀을 닫더니 다시금 수면을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봐!”
한서리가 따라가며 불러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갈매기가 말했다.
<<그만두시죠. 더 말해 봐야 대답 안 하실 겁니다. 원래 테라핀 님은 속세에 관여하지 않거든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한서리가 멈춰 선다. 그녀는 아쉬운 듯 멀어져 가는 거북이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갈매기는 그들의 곁에 있었다.
<<이만큼 대화를 나눈 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그것도 당신이 상당한 업을 품고 있기에 가능했던 거겠지만요.>>
“업이라고?”
<<당신에게 쌓인 비틀린 운명의 잔해 말입니다. 불확정성을 강하게 하는 요인이죠.>>
“불확정성…… 예측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인가?”
<<그렇죠.>>
“예측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잖아.”
<<마찬가지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시간 역행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인지. 당신은 상당히 강한 불확정성을 가지고 있어요.>>
갈매기에게는 그 불확정성이라는 것이 어떠한 형태가 되어 눈에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노란색 동공에 검은 점이 박힌 조류 특유의 눈을 깜빡이며 한서리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리자들은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억지력 같은 존재들이거든요. 지키는 대상이 선계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죠.>>
한서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녀는 갈매기의 얼굴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러는 넌? 너도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넌 관리자가 아닌가 보지?”
끼루루룩, 갈매기는 부리를 크게 벌려 웃더니 날개를 활짝 펼쳐 보였다.
<<제가 화신으로 보입니까? 전 관리자가 아닙니다. 관리자인 테라핀 님을 오래 모시며 주워들은 걸 지껄일 뿐이죠.>>
“그런 식으로 관리자에 대한 정보를 뿌리는 것이 네 주인에게 해가 될지도 몰라.”
<<상관없습니다. 테라핀 님은 섭리를 거스르려는 마음조차 섭리에 포함되는 일이라 믿고 계십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일으키는 혼란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변화의 시발점이 될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시죠.>>
정말로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이 없다면, 아무런 이득도 없이 한서리에게 모든 정보를 알려 줬을 리가 없으니까.
한서리는 천천히 그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정보 고마워. 그에게 전해 줘, 언젠가 이 빚은 꼭 갚겠다고.”
갈매기는 웃었다.
<<빚이요? 그런 건 없습니다. 이 무료한 세상. 테라핀 님이 누군가에게 흥미를 보이는 일은 많지 않아요. 그걸 끌어낸 것만 해도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선물한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갈매기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럼, 부디 원하는 것을 이루시길.>>
인사를 마친 그는 그대로 테라핀의 뒤를 따라 그의 등위에 착지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테라핀은 이미 멀어져 수평선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삐익─ 하고 멀찍이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그림자처럼 몸을 일으킨 새의 무리가 그저 섬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북이의 등 위에서 날아오르고, 앞을 향해 나아가던 거북이가 고개를 숙이자 거대한 몸이 천천히 수면의 아래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그곳에 남은 것은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생명체의 흔적뿐이었다.
* * *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 위에 세 사람은 남겨졌다.
물거품만 남은 수면을 바라보며 알리시아가 말을 꺼냈다.
“그래도 오늘은, 상당한 수확이 있었군요.”
세라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리자? 그런 게 있었다는 건 몰랐는데. 용족의 기록에도, 다른 선계의 기록에도, 심지어 여의주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고.”
그들은 공중을 부유하고 있는 마기아의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한서리는 무릎 위에 올라온 크투그아를 쓰다듬다가 말했다.
“고의적으로 막혀 있었겠지. 우리가 시간 역행마법에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
“테라핀의 말대로라면, 기린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이 선계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어. 우리 화신들은 온 선계에 기린의 영향력을 퍼트리기 위한 단말기일 뿐이고.”
“그럼 관리자라는 것은 그 시스템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행정가 같은 것이겠군요.”
알리시아가 말을 받았다.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시간 역행은 그 시스템에 의해 위험 물질로 간주되어 숨겨진 거고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자 뭔가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세라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시간 역행의 기술을 찾으러 다니는 걸 싫어하는 관리자가 있을 수도 있겠네. 그들 입장에서, 우리는 언제 범죄를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 분자니까.”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한서리가 동의하자 알리시아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었다.
어쩌면 지금의 일이 단순한 탐사가 아니라 또 다른 화신과의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고민에 빠져 있는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마저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한서리가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녀는 궁금했다.
과연, 뱃속의 아이와 뇌가 망가진 김건까지 보살펴야 하는 한서리가 스스로 위험에 발을 들일 것인가.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갈등에 휩싸여 있을지도 몰랐다.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알리시아는 더 이상 한서리가 고통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한서리가 고개를 들었다.
알리시아는 무심코 그 입가가 일그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네. 짧아도 수백 년, 어쩌면 수만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녀의 우려는 틀렸다.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시간 역행의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상정 외의 위협과 마주친 한서리.
하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더없이 여유만만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