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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45화 (145/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45화

천사가 말했다.

“남편…… 그 아그니스를 죽인 놈을 말하는 건가? 너와 같이 시간을 역행한?”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대가로 그이는 모든 기억을 잃고 폐인이 됐어. 회복 마법 따위로 고칠 수도 없으니 남은 건 시간을 되돌리는 것뿐이야.”

천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으나 이내 차가운 비웃음을 띠었다.

“하, 거절이다. 고작 그 정도 감상적인 행동을 도와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그따위 개인적인 이유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으면 애초에 그렇게 봉인되지도 않았을 거다.”

“…….”

천사는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뭔가 했더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부른 거였군. 다시는 얼굴 마주치지 말자고.”

그녀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뭐라 할 틈도 없이 다시 찢어진 공간의 틈새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한서리는 딱히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흠. 아쉽네. 직접 마주하고 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바보같길래 그냥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 막 해도 괜찮아?”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세라스가 다시금 작동을 시작한 천사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한서리는 피식 웃으며 기계인지, 골렘인지 모를 천사상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렇게 정밀한 물건은 아닐걸. 선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차원 이동을 모두 처리해야 하는데 아까처럼 직접적으로 접촉을 시도한 것도 아니면 그냥 흘려 들을 가능성이…….”

<<다 들린다. 빌어먹을 년아.>>

거친 욕설이 천사상의 텔레파시로 쏘아져 나왔다.

천사상은 바로 주머니를 내밀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뒷담이라도 하고 싶으면 돈이나 쳐 내. 그러면 바로 꺼져 줄 테니까.>>

“으와…….”

정말이지 입이 더럽다.

세라스는 다시 한번 감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 성격이 더러운 사람은 많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스칼렛 발렌타인 정도가 아니고서야, 저 정도로 험악한 말투를 구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서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욕지거리를 하는 천사상의 주머니에 알리시아에게 건네받은 마정석을 넣어 주었다.

대금 지불이 완료되자 바로 공간 좌표를 설정해 주고 사라지는 천사상.

게이트가 완전히 반대편 공간으로 연결되자 한서리가 손짓했다.

“가자.”

그녀는 그러면서 먼저 마기아에 탑승했다.

표정이 구겨진 세라스가 그 뒤를 따라붙었다.

“야! 뭐 순식간에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잘난 척하더니 이게 끝이야?”

“바보는 조용히 하고 있어. 생각하고 있잖아.”

“뭐어?”

자존심이 상한 세라스가 빼액 떼를 쓰기 시작한다. 한서리는 익숙하게 그 말을 흘려 들으며 본인이 할 일을 했다.

그런 세라스의 모습을 본 알리시아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싸울 때 빼고는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서는 어쩔 때는 어린애보다도 더했다.

돌이켜 보면 김건도 똑같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은 훨씬 얌전했었다.

‘하기야…… 그런 어린애 같은 자존심과 단순함이 있으니까 그런 괴물들과 싸워 나갈 수 있었겠지.’

그녀는 그들이 지금까지 싸워 왔던 대상들을 떠올렸다.

벨제불의 화신, 클라우, 아수라, 티아마트의 반신, 그리고 아그니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상식을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합리한 자들.

테라핀은 아그니스가 선계를 위협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알리시아에게 그것은 변명처럼 들렸다.

잠깐 마주친 게 전부지만 놈은 위험했다.

통제 불가능의 존재라는 점에서 티아마트나 벨제불과 다를 바가 없다.

아마도 그는 선계의 관리자들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손에 위그드라실이 그렇게 박살 나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위그드라실뿐만 아니라 다른 관리자들도 놈에게 당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놈이니까 가능했던 일이지.’

아마도 그녀 자신을 포함해 한서리, 세라스 역시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선계의 관리자와 대적하게 될 것이었다.

시간 역행에 대해 파고드는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된다.

모든 관리자들이 테라핀이나 방금의 천사처럼 중립적이진 않을 테니까. 적극적으로 위협을 배제하려는 녀석도 분명히 있을 거다.

알리시아는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한서리는 지금까지 항상 패배해 왔다.

벨제불의 화신이 나타나는 걸 막지 못했고, 티아마트의 강림을 막지 못했으며 아그니스에게는 그저 농락당할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한서리를 존경했다.

아무리 정보와 입장의 우위가 있다 하더라도, 두 세계를 통합하고, 세계 경제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며, 외부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방위 체제까지 갖춘다.

거기에 더 나아가 권속화라는 세계 단위의 미래 계획까지 추진하는 건 범용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그럼에도 졌다.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건 한서리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고 모든 판단에 근거가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이지만, 그래서는 유리와 불리를 무시하고 움직이는 불합리를 당해 낼 수 없다.

하물며 그 불합리가 이쪽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면야…… 아무리 애를 써봐야 그저 농락당할 뿐이다.

하지만, 이번 일의 상대가 될 선계의 관리자들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존재들.

그리고 알리시아는 그런 합리적인 적을 상대로 한서리가 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기대감을 품고 자리에 앉았다.

차원 항구로 이동하는 동안 펼쳐진 공간의 일그러짐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작정 여기저기 들쑤시기를 반복하는 탐사는 필요가 없을 듯한데…….”

잠시 고민하던 한서리.

그리고 그녀가 내뱉은 말은, 알리시아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벨제불의 힘을 빌려야겠어. 선계가 아니라 명계로 넘어갈 방법을 좀 찾아보자.”

“예……?”

* * *

한서리의 하루는 언제나 똑같은 일과로 시작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우선 옆의 침대에 누워 있는 김건의 상태를 확인한다.

밤새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알리시아의 인형에게 그간의 몸 상태를 보고받고, 문제가 없다면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뒤 방을 나가 가볍게 아침 식사와 세안을 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나면 인형을 내보낸 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김건의 옷을 벗기고 물수건을 들어 그를 씻기기 시작한다.

단순 청결 유지라면 마법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직접 손을 대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김건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마사지를 겸하기 위함이며, 둘은 남편의 촉감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과거, 그녀의 몸을 주물러 주었던 것은 남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남편의 몸을 주물러 주고 있었다.

한서리는 마법적인 효과를 더한 마사지로 김건의 근육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전기 신호를 가하며 그의 전신을 주무르고, 동시에 닦아 주었다.

목욕이 끝나면 새 옷을 갈아입히고 그를 끌어올려 휠체어에 앉힌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아침 산책을 하는 것이, 한서리의 아침 일과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계를 누비면서, 한서리는 그 일과를 빼먹은 적이 없었다.

탐사 중인 선계가 일반적인 산책이 불가능한 곳이라도, 보호막 따위의 마법을 이용해 어떻게든 밖으로 나갔다. 화신인 그녀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있는 선계는 낮보다 밤이 긴 곳이었다.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걸으며, 한서리는 휠체어를 끌며 남편에게 이곳의 삶을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낮이 짧아. 거기다 물이 부족한 편이라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는대. 그래서 이곳의 선주민족들은 대부분 유목 생활을 하는 것 같더라.”

“…….”

“저기 하얀 털을 가진 짐승 떼가 보여? 유목민들이 풀어 놓은 가축이야. 우리 세계로 치면 양이랑 비슷한 거야.”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하늘에는 커다란 달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명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곳이라 광원이 적다. 그 덕에 하늘 위에 박힌 수천수만의 별이 다 보인다.

“언젠가 우리 아기한테도 저걸 보여 주면 좋겠네.”

그렇게 읊조린 한서리는 간간이 말을 던져 가며 휠체어에 앉은 김건을 이끌고 천천히 들판을 거닐었다.

그렇게 삼십 분쯤 지났을까, 산책을 나간 한서리를 찾으러 온 세라스가 그녀를 발견했다.

“…….”

숨이 다 막힌다.

말없는 김건을 옆에 두고 바위 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한서리의 모습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워 보였다.

세라스는 그 우울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서 작은 장난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살짝 마력을 끌어올려 오라로 구체를 만들었다.

강도와 탄성을 조절해, 마치 스펀지처럼 몽실몽실해진 오라의 공.

그녀는 그것을 조금 주물러 순식간에 그것을 귀여운 곰 인형으로 만들었다.

화신이 된 이후로도 노력을 거듭한 그녀는 이제 오라기술을 마스터했다고 봐도 좋을 위치에 올랐다.

김건처럼 아예 기술의 근간이 다른 경우는 제외한다.

다만 경, 형, 중. 그녀가 알고 있는 오라의 삼원칙 내에서 그녀를 이길 자는 없었다.

단순히 ‘형’이라는 주제만 놓고 보아도 과거에 만났던 아스타로트라는 마인보다도 더 뛰어난 제어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녀는 살금살금 한서리의 뒤로 다가가, 그렇게 만들어 낸 오라 인형을 휙 집어던졌다.

살기도 없고 최대한 기척도 죽였으니, 감각이 둔한 한서리라면 깜짝 놀라서 호들갑을 떨 것이다.

꺅꺅 소리를 질러도 좋고, 화를 내도 좋다. 그러면 잠깐이라도 우울함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던 세라스의 장난은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게 실패로 돌아갔다.

턱!

공중을 날아가던 오라 인형을 누군가의 손이 낚아챈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한서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세라스를 쳐다보았다.

“뭐 해?”

세라스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냥 장난친 거……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저건 뭐야?”

허겁지겁 변명을 하던 세라스가 경악한 표정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세라스가 던진 인형을 낚아챈 김건이 있었다.

세라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김건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의식도 없고, 기억도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혹시 뭔가가 돌아왔나? 싶어서 물어봤지만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반사 작용이야. 기억이 없고 약간 문제가 남아 있어서 그렇지 대부분의 신체 기능은 정상이니까…… 몸에 입력해 둔 반사 행동은 제대로 작동해.”

그러면서 한서리는 가볍게 손날을 날렸다.

부드럽게 올라온 김건의 팔이 그것을 차단. 한서리가 연속으로 가해 오는 공격을 모두 막아 낸다.

그 모습을 본 세라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숨을 토했다.

“아니, 그게 말로만 들었지 진짜로 될지는 몰랐는데.”

“그냥 수련 바보인거야. 몸에 박아 넣는답시고 계속해서 연습을 해서 습관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한 거지.”

한서리는 한숨을 쉬었다.

“수련을 쉬는 걸 본 적이 없어. 매일 몇 시간씩 수련을 한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틈만 나면 수련을 하고 연습을 했지. 그러고 보면 맨 처음에도 그랬어. 돌아오기 전, 서로 잘 알지도 못할 때 같이 고립되어서 도망치던 적이 있었거든.”

허탈한 미소가 한서리의 입가에 걸렸다.

“식사는 물론이고, 물도 부족해서 죽을 것 같던 그때, 그때도 자고 일어나서 수련을 하더라. 주변이 몬스터 천지인데 말이야.”

“…….”

“그때는 그냥 미친놈인 줄만 알았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꿈도 못 꿨고.”

한서리는 손을 뻗었다.

그것을 공격이라 판단하지 않은 김건의 육체가 가만히 있는 동안, 힘없이 벌어진 그의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아 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나를 지켜 줬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줬어. 그러니까 감사해야 할 일이지.”

“…….”

세라스는 침을 삼켰다. 괜한 장난이 오히려 분위기를 더 우울하게 만든 것 같아서, 그녀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만 가자. 알리시아 언니가 뭔가 성공한 모양이야.”

“성공했어? 마기 제어에?”

“응. 그런 것 같아.”

테라핀을 만난 지 1년.

한서리의 계획을 위해 그동안 진행해 왔던 연구가 드디어 성과를 보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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