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48화
“영린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세라스는 마주 인사를 하며 조심스럽게 눈앞에 선 화신을 살펴보았다.
흐드러지는 백금발, 이마 위로 솟은 외뿔.
그리고 녹색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수놓인 화복(華服)을 걸쳤다.
“기린족의 족장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기린족, 이라는 말에 한서리와 알리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린족이라고 하면…… 최초의 선계에 산다고 하는 종족 아닙니까?”
알리시아의 질문에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의 선계를 만들어 낸 마신, 기린은 오랜 과거 우리 기린족 중 한 명이 승천하여 된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듣는 사실에 놀란 세라스가 크게 눈을 떴다. 그녀는 옆자리를 쿡 찌르며 ‘정말이야?’ 라는 시선으로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한서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확실하지는 않아. 전설상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하지만 가능성은 꽤 높은 편이지.”
영린이 그 뒤를 이어 설명했다.
“수억 년 전 일이라…… 저희도 사정이 있어 멸망과 재생을 반복하다 보니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저 가능성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도를 닦아 우화등선한 기린족이 스스로 화신화해 기린과 융합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
수억 년,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멸망과 재생을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이미 세라스는 질려 버렸다.
머리가 굳어 버린 그녀는 그냥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소개를 마친 영린은 곧장 한서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시간 역행의 마법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
침묵이 흘렀다. 요정의 전언으로 미리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펄쩍 뛰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여기 모인 세 사람은 시간 역행의 힘을 가진 화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모두 각자의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조용히 영린을 바라보던 한서리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우리가 그걸 왜 찾는지는 알고 오신 것 같군요.”
“네, 메타트론한테 들었어요. 당신의 남편을 과거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고요.”
“그걸 알고 왔다면, 도와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가요?”
영린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이건…… 이 힘은 절대로, 함부로 써서 될 힘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최근 당신의 행보를 전해 듣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죠.”
세로로 찢어진 동공, 샛노란 홍채. 인간의 것이 아닌 눈동자가 매섭게 깜빡였다.
“당신은, 그 벨제불의 힘을 이용해 남편을 치료하려는 것 같더군요.”
“…….”
“보아하니 뭔가 문제가 있어서 기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되찾지 못하는 것 같은데…… 마기를 이용하면 기억은 몰라도 의식은 갖게 할 수 있겠죠. 전신을 완전히 침식하고 몸의 기억을 끌어내어 약간의 의사만 부여해 주면요. 벨제불이, 한 점의 뇌도 남아 있지 않은 해골을 스스로의 종으로 부릴 수 있는 것처럼.”
한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영린을 노려보았을 뿐이다.
영린은 두통이 있는 것처럼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그 힘은 위험해요. 그걸 그렇게 사용하게 놔둘 수는 없어요.”
“그러면 그냥 강제로 통제를 하면 될 거 아닙니까? 이렇게 직접 나설 이유가 있나요?”
“당신의 처분에 관해서 다른 말을 하는 관리자들이 몇 명 있어요.”
그들을 떠올리자 진절머리가 나는지, 영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개중에는 그 골칫덩이인 아그니스를 물리친 공을 사서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요. 그래서 합의를 봤습니다. 당신의 소망을 들어 주고, 이 일을 끝내는 것으로.”
“……!!”
거기까지 들은 알리시아와 세라스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그리고 영린은 그 기대감에 부응해 주려는 것처럼 다음 말을 이었다.
“계약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시간 역행의 힘을 사용해 당신 남편의 시간을 뒤로 되돌리겠다고.”
그건 말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던 것은 모두 화신이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선계 내에 퍼져 있는 기린의 힘이 움직이며 방금 영린이 내뱉은 말을 계약의 힘으로 묶어 버렸다.
“야…… 야……! 이거,!”
“팀장님!”
그것을 확인한 세라스가 흥분해서 한서리의 어깨를 흔들었다.
알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큰 목소리로 한서리를 불렀다.
이번에는 한서리마저 놀랐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영린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남편의 시간을 되돌려 주겠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한서리. 그런 그녀에게 영린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이렇게 계약까지 맺지 않았나요?”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한서리는 말을 잃은 듯했다.
의문 가득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영린이 말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조건이 까다로운 기술이라 아무 데서나 펼칠 수가 없어요. 이미 준비에 들어가긴 했지만 마법진을 준비하는 데에 며칠 걸릴 것 같군요.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여러분들을 기린족의 선계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한서리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습니다.”
“그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다시는 벨제불의 힘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약을 원합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제가 직접 나선 것이니까요.”
그에 한서리는 흔쾌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계약하죠. 다시는 벨제불의 힘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것 역시 말뿐만이 아니었다. 영린이 했던 것처럼, 그녀는 화신의 힘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계약을 맺었다.
“…….”
원하는 것을 얻은 영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한서리의 말이 끝났는데도 계약의 힘이 완전히 맺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봐요. 지금 뭐 하는…….”
“단, 내 남편에게 시간 역행의 마법이 사용된 이후에.”
영린이 뭐라 하기 전에, 멋대로 조건을 추가해 계약을 종료시켜 버리는 한서리.
그 후에 흐르는 잠깐의 정적.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이 일순 교차했다.
부풀어 오르는 분위기.
그리고 그것이 터지기 직전에, 영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한 조건이긴 하지만, 그런 계약의 조건 추가는 미리 말을 좀 해 주고 걸었으면 좋겠군요.”
그에 한서리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화신 분들과는 계약을 맺어 본 적이 많지 않아서요.”
그리고 두 사람은 잠깐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떼었다.
영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시죠. 최초의 선계라 불리는 땅, 천산(天山)으로.”
* * *
왜 한 세계에 천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나 했더니, 그곳은 정말로 특이한 곳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 오로지 산뿐이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돌산이 봉우리가 되어 서 있고, 그 위를 빼빼 마른 소나무와 안개처럼 깔린 구름이 덮고 있다.
신기한 것은, 사방에 깔려 있는 구름 위에 올라앉은 사람과 건물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여기입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영린이 그들을 이끈 곳은 봉우리 사이의 평탄한 지대를 깎아서 만든 마을이었다.
척 보기에도 수백 명은 살까 싶은 작은 마을.
최초의 선계라길래, 으리으리한 무언가를 상상했던 세라스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자 영린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 기린족은 다른 종족들처럼 큰 사회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조금 나이가 차면 대부분의 기린족은 심산유곡에 파묻혀 속세를 잊고 도를 닦는 데에 전념하죠.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절반이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이에요. 나머지는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고.”
영린에 말대로 마을에 들어서자 아이들의 숫자가 많았다.
용족인 알리시아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듦에 따라 여러 형태를 지니는 종족인지 인간 형태의 아이와 머리에는 사슴뿔, 온몸에 푸른 비늘을 단 아이가 같이 어우러져 깔깔거리고 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아이들만 있는 건 아니다. 척 봐도 성인으로 보이는 기린족들도 눈에 들어왔다.
하나 그들의 행태는 한서리 일행에게는 그저 이상할 따름이었다.
대부분이 건물의 지붕이나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옷차림도 대충 천 쪼가리를 걸친 형상에, 대충 기른 머리를 한데 묶어 늘어트리고 있어 외모들도 다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 볼품없는 옷차림과는 달리, 피부는 모두들 하얗고 윤이 나고 있어서 더 괴상해 보였다.
시끄럽게 떠들 분위기가 아니다.
알리시아의 팔을 붙잡은 세라스가 그들을 가리키며 작게 물었다.
“저건 또…… 뭐 하는 거야?”
“수행을 하는 것 같다. 우리 종족의 사제들이 떠오르는군. 대부분은 속세에서 멀어지는 것을 수행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저들은 아무래도 속세 속에 살아가며 오히려 그 갈망을 참아 내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으로 보이는군.”
“윽…… 그런 걸 도대체 왜 하는데?”
“나도 모른다. 딱히 종교나 신학에 대한 지식은 없어.”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영린이 말했다.
“모두들 깨달음을 얻어 우화등선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겁니다. 이 물리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한 삶과 지혜를 얻기 위해 더 높은 차원으로 자아를 끌어올리는 거죠.”
말은 그렇다고 하지만 전혀 못알아 듣겠다.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라스에게 한서리가 말했다.
“이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랑은 관계없는 이야기니까.”
현실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는 그렇게 단박에 피어오르는 상념을 끊어 버렸다.
그런 칼 같은 대처에, 세라스는 한서리의 말마따나 생각을 포기한 듯했고 알리시아는 그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며 영린을 살짝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저어 그들을 안내했다.
“따라오시죠. 손님들을 모시는 집이 따로 있으니.”
그렇게 세 사람은 영린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쪽을 거닐었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니 조금은 사람이 사는 듯한 모양새가 보였다.
키우는 가축을 끌고 다니는 모습도 있고, 조용히 노상에 앉아 만든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였다.
그러던 와중, 길을 따라 골목의 안쪽으로 꺾어 들어갔을 때였다.
문득, 영린이 발을 멈췄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왜 갑자기 멈췄냐고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발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골목 안쪽에, 한 마리 용이, 또아리를 틀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용족인 알리시아의 본체와는 다르다.
날개 따윈 없다.
뱀처럼 기다란 동체, 머리 위에는 사슴뿔이 달려 있고, 코에는 수염이 가득했으며 살짝 벌어진 입에는 뭔지 모를 영롱한 구슬을 물고 있다.
“……!!”
놀란 영린이 숨을 들이켰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눈을 크게 뜨며 앞에 있는 용을 보았다.
온갖 선계를 돌며 수많은 생물들을 관찰한 그들이 그저 그 생김새에 놀랄 리가 없다.
세 사람이 놀란 것은, 눈앞에 있는 생물이 뿜어내는 기이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뭔가가, 다르다.
격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 이성으로 상징되는 인간성 따윈 당연히 없고,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동물의 본능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만난 것들 중에 그나마 비슷한 것을 꼽자면, 벨제불의 화신, 티아마트의 반신, 그리고…… 처음으로 마주쳤던 선계의 관리자, 테라핀 정도일까.
인외의 존재.
대화나, 소통 따위를 당연하다는 듯이 거부하는 이형(異形).
그것을 마주하면 그 누구라도 일순 숨을 멎을 수밖에 없다.
꿈틀.
무엇에 반응한 걸까, 조용히 웅크려 있던 용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무지갯빛 섬광이 가득한 두 눈이 이쪽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