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49화
“……!!”
용이 이쪽을 쳐다보자, 영린은 곧장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무언가를 감추듯 배를 양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박는 특이한 자세였다.
그녀는 당황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예의를 갖추세요. 함부로 보지도 말고.”
“아니, 저 사람들도 잘 보고 있는데…… 왜…… “
세라스는 마을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용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지나가거나 가볍게 합장만 할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영린이 일갈했다.
“그만, 속세에 찌든 시선으로 바라봐서 될 존재가 아니야!”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
뭐랄까, 기분은 나쁘지만 저렇게까지 나오니 정말로 이쪽이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라스와 알리시아는 어물어물 영린을 따라서 절을 했다.
하지만 한서리는 여전히 용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봐요, 당신……!!”
그런 그녀를 발견한 영린이 소리를 높이려 할 때,
용이 움직였다.
순간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보니 코앞에 있었다.
용은 한서리의 앞에 멈춰 섰다.
의중을 읽을 수 없는 두 눈으로 조용히 한서리를 지켜보더니…… 이내 그녀의 주변을 한 바퀴 돌고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사라져 버렸다.
잠시후, 영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흐트러진 옷가짐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운이 좋군요. 당신들은 지금 기린족이 승천하는 모습을 본 겁니다.”
세라스가 물었다.
“방금 서리 주위를 한 바퀴 돈 것 같은데…… 그건 뭐예요?”
그 말은 고개를 박고서도 곁눈질로 용의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는 뜻이다.
영린은 매섭게 눈을 흘기며 엄하게 말했다.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모릅니다. 필멸자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요.”
“……이래 봬도 나도 화신인데.”
“그저 힘의 크기만 그럴 뿐이겠죠. 당신에게는 화신으로서의 격이 없어요. 그건, 남에게 받은 힘으로 화신이 된 자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
말을 듣다 보니 자꾸 이쪽을 아무것도 모르는 원숭이처럼 취급한다는 기분이 든다.
세라스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해 봐야 싸움밖에 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린은 잠시 한서리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가시죠.”
그러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그맣게 투덜거리면서 그 뒤를 쫓는 세라스. 그리고 알리시아는 제자리에 못 박힌듯 서 있는 한서리를 발견하고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그 용이 뭔가 하기라도…… “
“아니, 아무것도 안 했어.”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뭔지 모를 오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뭔가…….”
“…….”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한서리.
알리시아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겨우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떨쳐 버렸다.
“……아니야. 가자.”
* * *
영린이 그들을 안내한 것은 꽤 커다란 도당(都堂)이었다.
“천산은 차원 좌표가 불안정해 접근이 어려운 데다 외인을 들이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아서 사람들의 왕래가 적습니다. 손님을 맞을 만한 곳은 이곳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영린의 뒤를 따라 당내로 들어가니 동서남북을 지키듯 서 있는 네 개의 석상이 보였다.
세라스가 그것들을 가리켰다.
“저건…… 사방신아니에요?”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무, 주작, 청룡, 백호……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천산을 지키기 위한 수호신들이죠.”
“저희 세계에도 똑같은 게 있는데요.”
“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비슷하니까요. 선계 내에서는 의외로 문화권이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건 왜 부서져 있죠?”
이야기를 듣던 알리시아가 동쪽의 청룡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말이 청룡상이지, 이것들이 사방신이 아니라는 걸 몰랐으면 정체조차 몰랐을 정도로 청룡상은 크게 부서져 몸통의 아랫부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영린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청룡은…… 나가 버렸습니다.”
“나가 버렸다고요?”
“네, 스스로의 의무를 버리고 도망쳤죠. 자유를 찾아서라는 말을 구실로요.”
“…….”
영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전설상의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사신이라는 존재들이 있고, 그 중에서 청룡이 떠났다는 건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알리시아는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아까 용을 마주쳤을 때의 일도 있고, 영린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삼켰다.
“시간 역행의 마법을 발동시킬 결계와 마법진을 구축하는 데 며칠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리 말한 영린은 도당을 돌며 그동안 세 사람이 지낼 공간을 안내해 주었다. 또한 도당을 정리하고 있던 한 소년과 소녀를 불러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지내시는 동안 식사나 목욕 준비 등 시중을 들어 줄 아이들입니다. 묵언수행 중이니 대화는 삼가 주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하시면 되고, 처리하기 곤란한 요구는 이 아이들이 알아서 제게 연락을 할 겁니다.”
그렇게 도당의 안내를 마친 영린은 자리를 뜨기 전에 한서리가 물었다.
“함선을 근처에 두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가까이 두는 것 자체는 상관없지만…… 별다른 선착장이 없어서요.”
“피해를 주지 않도록 공중에 체공시켜 두겠습니다. 남편을 도울 자재나 생명 유지 장치도 모두 함선에 있고 해서요.”
“……알겠습니다. 큰 소리를 내거나 주변 사물을 파괴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영린은 곱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럼, 그동안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그것을 마지막으로 영린은 사라졌다.
“그럼…… 그냥 여기서 시간이나 죽이면 되나?”
세라스가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자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용하고 공기도 좋으니, 휴양하기에는 딱 좋겠어.”
그렇게 도당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반찬에 고기가 없다고 알리시아가 투덜거리긴 했으나, 그것 외에 불만은 없었다.
도당은 깨끗하고, 조용했으며 야외에는 온천이 있고 길게 뻗어 나가는 산맥과 사방에 깔린 수백 개의 봉우리 덕분에 풍경도 좋았다.
세 사람은 간만에 휴가라도 나온 것 같은 분위기를 즐겼다.
이번에는 한서리도 기분이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여유가 생긴 그녀는 내내 김건을 데리고 다니며 그와 함께 온천욕을 즐기고, 산책을 하며 평온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침 식사 시간에 한서리가 보이지 않자 세라스가 물었다.
“서리는?”
떫은 표정으로 가볍게 데친 산나물을 씹어 삼키던 알리시아가 대답했다.
“오늘은 김건과 식사를 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의식이 없는 김건이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아마도 방에서 한서리가 음식 하나하나 씹어서 직접 먹여 주고 있을 것이다.
영양분은 각종 마법적인 효과가 더해진 수액으로 충분히 공급할 수 있지만, 한서리는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면서 때때로 김건과 식사를 할 때가 있었다.
뭐,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세라스는 금세 한서리에 대한 일을 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크툰은? 여기로 오고 나서 보이질 않는데.”
“마기아에 있어. 팀장님이 뭔가 명령을 내리신 것 같더군.”
“흠…… 데리고 목욕이나 할까 했더니.”
세라스가 아쉬운듯이 중얼거리자 알리시아는 기가 차서 말했다.
“……그 녀석이 무슨 애완동물로 보이냐? 팀장님이 없었다면 널 잡아먹으려고 덤볐을지도 몰라.”
“뭐 어때, 지금은 안 그러잖아. 그러는 언니도 틈만 나면 마기아에 달라붙어서 쓸고 닦고 하잖아. 마치 애마라도 다루는 것마냥.”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며 빈둥거리다 보면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시간 역행을 도와줄 마법진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해서 구경을 가니 영린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내일이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 한번 보시죠.”
영린은 그러면서 마력을 증폭시키는 결계, 그리고 선계에 퍼져 있는 기린의 힘을 끌어모으도록 설계된 제단까지 보여 주었다.
“…….”
한서리는 물론이요, 알리시아와 세라스까지 꼼꼼히 그것들을 체크해 봤지만 별다른 문제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을 속이기 위한 함정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준비가 끝났는지 영린이 도당을 찾아왔다.
“아마도 이곳에서 지낼 마지막 날이 될 듯하니, 오늘 저녁은 특별히 대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대로 그날의 저녁 식사는 평소와는 달랐다.
밥과 나물뿐이던 밥상에 고기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만들 수 있는 숙성 요리. 그리고 술이 나왔다.
“음……!”
간만에 고기 반찬을 본 알리시아가 군침을 삼키자 영린이 말했다.
“수행을 하는 선인들은 몸에 탁기가 쌓인다 하여 고기를 먹지 않지만 그래도 고기 요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몸이 약하거나 성장이 느린 아이들에게는 고기를 먹이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병을 손에 쥐었다.
뚜껑을 따자 달콤한 향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천도복숭아로 담근 술입니다.”
그녀는 “한 잔씩 따라 드리죠.”라고 말하며 각자의 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꼴꼴꼴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는 뿌연 액체를 바라보며 한서리가 물었다.
“천도복숭아라…… 이걸 마시면 불로불사에 도움이 되기라도 하나요?”
“그쪽 세상에 무슨 전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효능은 없습니다. 다만 상당히 맛이 좋고, 천산의 강한 양기를 담고 있어서 몸의 탁기를 태워 없애는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린은 웃었다.
“다만, 그 양기 때문에 조금 졸음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잔에도 직접 술을 따랐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술잔을 쳐들었다.
“내일 무탈하게 의식이 종료되어, 남편분이 건강한 모습을 되찾기를 빕니다.”
그렇게 말한 영린은 두 손을 들어 아주 정중한 동작으로 술잔을 비웠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 분위기에 맞춰 각자의 잔을 비웠다.
“그럼 내일 아침, 제단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영린이 인사를 하고 물러가자 방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는 편안한 분위기가 되자 알리시아가 말했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그녀는 그러면서 빈 잔에 남아 있는 술의 향기를 음미했다. 함선에서 챙겨 온 포크를 놀리며 세라스가 말했다.
“음식도 맛있어! 누가 요리했는지는 몰라도, 평소의 애들이 한 솜씨가 아닌데?”
그런 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한서리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하늘. 삐죽빼죽 솟아 있는 봉우리 사이로 하얀 구름이 흐르고, 하늘에는 무려 여섯 개의 달이 떠다니며 어둠 속에서는 은은하게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풍류를 모르는 자라도 시구를 읊고 싶어지는 고즈넉한 분위기.
그 속에서 한서리는 옆에 앉혀 놓은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곧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다시 한번, 이 풍경을 보여 줄게.”
그녀는 작게 따른 술잔을 김건의 입가에 흘려 넣어 주었다.
간만의 알콜에 살짝 달아오르는 남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고는, 다른 사람들과도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서리, 알리시아, 세라스.
세 사람은 정말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술자리를 즐겼다.
한 잔, 두 잔, 재빠르게 잔이 돌다 보니 금세 술기운이 올랐다.
모두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알딸딸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세라스가 옷자락을 붙들고 흔들었다.
“더워. 양기가 들어 있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손부채로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던 그녀는 식탁에 엎드려 있는 한서리를 발견했다. 그녀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벌써 자?”
“피곤하신 거지. 오늘 하루 종일 김건의 수발을 들었으니.”
알리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세라스는 흔쾌히 잔을 맞부딪치며 또다시 술을 비웠다.
그리고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는데…… 문득 얼굴을 아래로 처박은 알리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언니도 취했어?”
그녀는 볼멘 목소리로 말하며 알리시아의 팔을 흔들었지만 알리시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다들 술이 약하네…… “
그렇게 투덜거리며 혼자 잔을 기울이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적은 아니라지만, 화신이 이렇게 쉽게 취할 수가 있는 거야?’
떠오르는 의문.
그리고 갑작스럽게 덮쳐 오는 위협.
세라스는 얼른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으로 술기운을 날려 버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며 마력이 제대로 제어되지를 않았다.
오히려 그 행위가 무언가를 자극했는지, 급격하게 눈앞이 휘돌며 참을 수 없는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그 순간, 세라스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균형을 잡을 수 없다.
식탁을 붙잡고 버텨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챙그랑!
그녀가 떨어트린 술병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며 그 안에 숨어 있던 향기가 단숨에 주변에 번져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맡은 세라스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스스륵 눈을 감고야 말았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세라스가 바닥에 쓰러진다.
적막이 흘렀다.
세 화신이 모두 정신을 잃었고, 의식이 없는 김건은 그저 인형처럼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뱀 한 마리가 방으로 기어들어왔다.
빨간 눈에 흰색 비늘.
척 보기에도 범상치는 않아 보이는 그 뱀이 미끄러지듯이 향한 곳에는 김건이 있었다.
놈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김건의 발치에까지 다가갔다.
가만히 있는 다리를 휘감더니, 순식간에 김건의 몸을 타고 올라가 그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샤아─
벌어지는 뱀의 주둥이 사이로 빛나는 이빨.
검게 번들거리는 독액.
그리고 그것이 김건의 목덜미를 꿰뚫으려는 찰나, 번개같이 움직인 손이 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
어디선가 놀란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 누구라도 의식을 잃은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뱀을 맨손으로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우드득-
막아 낸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뱀을 제압한 김건은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어 순식간에 뱀의 목을 분질러 버렸다.
켁 소리를 내며 힘없이 늘어나는 뱀.
그러자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둠 속에서 마법진의 불빛이 번득였다.
아무리 대단한 전사라도,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쏘아지는 번개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짜여진 마법.
그 안쪽에서 태어난 번갯불이 김건을 향해 번득이는 찰나였다.
콰아앙!
폭발음이 터졌다.
천장을 꿰뚫고 내려 꽂힌 금속의 기둥이 김건을 향해 질주하던 번갯불을 튕겨 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