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54화
콰아아앙!
“크오오오오!”
“우워어어어!”
크라켄의 거대한 덩치가 자유 낙하하며 혼돈의 개들을 들이받았다.
검은 타르 같은 몸이 퍽퍽 터져 나가며 젤리처럼 변하고, 크라켄이 휘두른 다리에 맞은 검은 개들이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어 쓸려 나간다.
하지만 혼돈의 괴물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사방에서 놈들이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크라켄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까득까득, 와작와작- 순식간에 커다란 근육과 살점이 해체당하고.
크라켄이 검은 괴물들의 무리를 관통하고 남긴 것은,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커다란 눈덩어리 하나뿐이었다.
혼돈의 개와 크투그아 무리가 어울리며 괴성이 사방을 울렸다. 찢어진 공간 사이로 미친 듯이 몰아치는 크투그아의 숫자는 수십만에 달하는 혼돈의 개들의 위세에 부족하지 않았다.
개와 촉수 괴물이 뒤섞이자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찢어진 촉수가 꿈틀거리며 튕겨나가고, 그 안에서 솟구친 파란 체액이 또 다른 색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촉수에 휘감겨 전신이 부러진 개와, 둥그런 원통형의 입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 믹서기처럼 갈려 나간 혼돈 덩어리가 검은 비가 되어 지면으로 낙하했다.
“무슨……!”
그 모습을 본 영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화신은 한 선계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한 희소한 존재다.
화신들이 그들이 존재하는 선계의 선주 종족을 지배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실제로 명목상의 지배일 뿐, 그들을 자유자재로 통솔하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설령 그걸 가능케 하더라도 수백, 수천 년에 걸친 오랜 공사를 들여야 했다.
하지만, 한서리는 화신이 된 지 고작 10년도 되지 않은 주제에 벌써부터 한 세계의 주민들을 완전히 장악하곤 자신의 군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혼돈의 괴물과 크투그아들이 피와 살점을 뿌리는 대전쟁 속에서 한서리는 오롯이 영린을 바라보았다.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텔레파시가 섞인 목소리가 폭음과 비명으로 가득한 난장 속에서도 똑똑하게 귀에 꽂혔다.
“네가 먼저 싸움을 걸고, 네가 먼저 위협을 가했어.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널 어떻게 하든 명분은 내게 있다는 거지.”
사파이어색으로 빛나는 눈이 차갑게 영린을 노려보았다.
“계약을 지키게 만들어 주마. 그 잘난 기린족이 고문에는 얼마나 견딜지 궁금한걸. 그게 싫으면 지금 당장 자결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다.”
“이 개같은 년이!”
분노한 영린이 달려들었다.
전신에 혼돈의 힘을 휘감은 그녀는 마치 사신들마냥 커다랗게 몸을 부풀리며 한서리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거대화한 혼돈의 팔이 한서리를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경솔한 행동이었다.
앞으로 튀어 나간 마기아가 혼돈의 팔을 막아 냈다.
세라스가 날린 대검이 사지를 쪼개고, 알리시아가 발사한 불기둥이 혼돈 속에 파묻혀 있던 영린의 몸통을 꿰뚫었다.
한순간에 혼돈으로 이루어진 몸이 분해되며 영린이 튕겨져 나갔다.
“……!”
알리시아의 공격에 스친 팔이 통째로 소실되었다. 조금만 더 공격이 깊었다면 전신이 날아갔을 것이다.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큰 타격을 받자 혼돈에 침식되었던 이성이 돌아왔다. 그녀는 재가 되어 버린 팔을 재생하며 이를 악물었다.
“큭!”
영린의 몸이 휘청하며 꺾였다.
물 위에 떨어진 잉크처럼 그녀의 육체가 기괴하게 번지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깜짝 놀란 세라스가 외쳤다.
“뭐야, 중력도 바꾸지 않고 어떻게?”
<<순간이동이 아니야. 공간이 휘어 있어. 아무래도 왜곡의 곡률을 타고 움직여 고속 이동을 시행하는 기술 같군.>>
영린이 있던 자리에 남은 흔적을 살펴본 알리시아가 분석했다.
한서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로 도발했는데도 도망칠 줄이야. 아직 생각에 여유가 있어. 아무래도 숨겨 놓은 한 수 정도는 남아 있는 것 같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혼돈의 개와 크투그아 사이의 전황을 확인했다.
서로의 힘은 동등. 하지만 머리를 잃어버린 혼돈의 개들은 전혀 통솔이 되지 않았다.
한서리는 짧은 명령을 몇 개 내려 크투그아의 진형을 정비해 그들에게 승기를 쥐어 준 뒤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시간을 끌면 좋지 않아. 어쩌면 이대로 도망쳐 버릴지도 몰라. 여기는 크투그아한테 맡기고, 추적하자.”
* * *
선인들만의 이동술인 축지가 있었기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영린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천산 내에도 수없이 존재하는 수많은 도당들 중 하나였다.
“허억……!”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무릎을 꿇은 그녀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혼돈의 힘을 쓴 데다, 전투에 의한 충격까지 더해져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큭, 으으…….”
진흙 같은 혼돈이 온몸에 달라붙어 있다. 그녀는 잘 관리가 되지 않아 먼지와 잡초로 가득한 도당을 검게 물들이며 바들바들 손발을 떨며 기었다.
도당 중앙에 놓인 청룡의 상에 다가간다.
청룡의 상은 부서져 머리는 없고, 몸만 남아 볼품없는 돌덩어리의 안쪽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영린이 손을 댄 것은 청룡의 상이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였다.
돌을 육각형으로 깎아 내어 세워 놓은 받침대.
그곳에는 작은 열쇠 구멍이 뚫려 있었다.
“헉, 허억……!”
영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품에서 꺼낸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딸깍하고 걸쇠가 풀리며, 받침대의 외각이 떨어져 나왔다.
그 안에는 옥색 구슬이 있었다.
마력이 담긴 구슬.
하지만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린은 곧바로 구슬을 꺼내어 그것을 바닥에 내리쳤다.
구슬에서 빠져나온 마력이 그려 낸 술식은 일종의 통신 마법이었다.
크투그아인 크툰이 그러했듯, 외세계로까지 신호를 보내는 마법.
잠시 후, 영린 앞의 공간이 갈라지며 작은 게이트가 생성되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가 빠져나왔다.
푸른 머리카락, 그 위로 솟은 사슴의 뿔. 늘씬한 키에 청색 장포를 걸쳤으며 손에는 하얀 부채를 들고 있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것은, 차원항구에서 한서리 일행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 유운이었다.
언제나 실실 웃던 가벼운 얼굴이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미소를 짓지 않은 유운의 얼굴에는 날 선 칼날 같은 예리함이 있었다.
“…….”
부채를 펄럭이던 유운이 발아래에 쓰러져 있는 영린을 발견했다.
늪에서 빠져나온 것마냥 온몸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그녀를 보고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무슨 사고라도 친 거야? 천산에 적습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학, 하악……!”
혼돈의 힘이 체력을 좀먹어 혀가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영린은 말을 잇지 못하고 허덕였다.
쯧, 하고 유운이 혀를 찼다.
그가 부채를 휘두르자, 푸른 번갯불이 내리꽂히며 영린을 감싸고 있는 혼돈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놀란 영린이 스스로의 손을 들여다봤다. 오염되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새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착, 소리를 내며 유운이 부채를 접곤 냉엄한 눈으로 영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유운의 얼굴을 보자 뭔가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영린은 두서없이 말을 쏟아 냈다.
“시간…… 시간 역행을 이용하려는 놈들이 쳐들어왔어! 날 협박해서…… 선계를 위협할 무기를 복구하려고…….”
그 한마디에 영린이 가리키는 대상이 누군지 깨달은 유운은 단칼에 영린의 말을 잘라 냈다.
“거짓말 하지 마. 그 녀석들은 네가 시간 역행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해.”
그는 잠깐 과거를 되짚어 보더니 금세 지금의 상황을 깨달은 듯 말했다.
“요즘 벨제불의 힘을 연구한다고 하더니…… 보나마나 제 발 저린 네가 먼저 손을 댄 거겠지.”
“…….”
한심하다는 시선이 영린을 향했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구나. 속세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영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난 이 천산의 족장이야! 지금이 아니라도, 내게 이 힘이 있는 이상 언젠가 날 찾아왔을 거야! 그걸 미리 없애려 한 게 잘못된 거야?”
“하는 건 좋아. 하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나까지 불러낸 걸 보면 남아 있던 사신들까지 당했나 보군. 혼돈옥의 힘도 사용하고. 거기까지 했는데도 처리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네 일처리가 허술했다는 거야.”
영린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바득바득 이를 갈며 유운을 노려볼 뿐.
그 눈빛을 받아 내며 유운은 혀를 찼다.
“넌 관리자에는 맞을지 몰라도, 천산을 지키는 역할에는 안 어울려. 족장은 이제 슬슬 다른 녀석에게 물려주는 게 좋겠다.”
그는 손을 저었다. 그러자 다시금 공간이 찢어지며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그는 차원문의 경계선에 발을 걸치며 말했다.
“난 간다. 네가 싼 똥이니까, 네가 직접 치워. 네가 쫓아낸 반푼이한테 부탁하지 말라고.”
그 말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는지 영린은 붉어진 얼굴로 벌컥 성을 냈다.
“내가 쫓아낸 게 아니라, 네가 도망친 거잖아!”
“아니, 쫓아 낸 거야. 내가 있는 한, 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야!”
말을 맺은 유운은 그대로 게이트를 통과하려고 했다. 영린이 뭐라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유운이 완전히 게이트 너머로 몸을 밀어 넣으려 할 때였다.
영린이 외쳤다.
“네 신부가 될게!”
우뚝, 유운의 발이 멈췄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영린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네 신부가 되겠다고! 넌 신부의 소원을 들어 준다며? 그러니까 그 새끼들을 죽여 줘!”
처음으로 유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영린을 노려보았다.
“그건 내 아내들을 모욕하는 말이야. 지금까지 날 이용하려고 내 신부가 된 사람은 없어.”
“그래서, 싫다는 거야? 이번엔, 거짓말 아니야! 필요하면 계약이라도 할 테니까!”
영린은 불쾌함을 나타내는 유운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야, 너, 정말…… “
유운의 얼굴에 경멸이 담겼다. 그의 표정은 마치 영린을 지금 당장이라도 씹어 삼킬 것처럼 사나웠다.
하지만, 그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곳에 나타나서 벌써 몇 번째인가.
유운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손을 들어 얼굴을 문댄다.
“됐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번 한 번만, 어리광을 들어주지.”
유운은 거칠게 영린을 밀쳐 냈다.
“뭐…….”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영린이 뭐라고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황금빛이 번뜩이더니, 그녀가 있던 자리를 거대한 검이 쓸고 지나갔다.
콰콰콰쾅!
거대한 황금빛 대검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날아와 도당의 중앙에 꽂혔다. 가운데에 선 청룡의 상이 산산조각나며 박살 난 바닥의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사람이 지면에 꽂힌 대검의 손잡이 위에 내려앉았다.
“아쉽네. 최소한 팔 하나 정도는 잘라 내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것은 황금빛으로 온몸을 두른 여자.
영린을 추적해 온 전사, 세라스 프레이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