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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58화 (158/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58화

기린의 힘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아그니스의 여의주에 그의 기억이 일부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한서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도한 인지 능력 증폭으로 인한 자아의 상실.

삼라만상의 모든것을 깨달으니, 오히려 자기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는, 기린의 저주.

그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한서리는 충분한 각오를 거친 뒤에 여의주의 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각오 따위는 그녀가 겪을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린의 진정한 힘이 몸에 깃들고, 그것이 감각을 증폭시키는 그 순간 조금의 지체도 없이 정보의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콰아아아아아앗!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한서리의 자아는 단번에 휘몰아치는 정보의 해일에 휩쓸렸다.

모든 것이 보이고, 모든 것이 느껴진다.

기린의 힘은 시공간을 넘어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 일차원과 이차원, 심지어는 사차원의 존재마저 인지하고,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우주가 탄생하는 장면이 보인다. 두 조각으로 나뉜 세포가 분열하며 그 안의 핵이 자라나 항성의 폭발을 일으키고, 그렇게 흩어진 파편이 나비 떼가 되어 사방에 비산한다.

그 폭발에서 퍼져 나온 빛에서는 물고기가 수면을 박차 오르며, 그가 떨어진 파문에서 태어난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다 이내 모든 것을 차갑게 굳혀 버렸다.

온 세계가 빛으로 가득하다. 또한 어둠으로 가득하다.

창조와 멸망, 탄생과 죽음.

그 모든 것의 끝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

그러나 그런 허무 속에서도 번득여 태어나는 빛이 있다.

암흑과 빛이 이루는 무한의 고리.

아아아아아아아!

모든 것의 종말을 본 자아가 절망의 비명을 지른다.

종말 끝의 탄생을 본 자아가 환희의 탄성을 터트린다.

벨제불, 티아마트, 기린, 신이라 불릴 정도의 힘과 크기를 지닌 그들이지만 그런 그들조차 전 우주를 놓고 보면 티끌에 불과하다.

한낮 인간에 불과한 한서리는 말할 필요도 없다.

티끌의 티끌의 티끌도 되지 못한다.

찰나의 하나, 육덕의 하나, 허공의 하나는커녕 청정의 하나만큼도 차지할 수 없다.

한서리라는 개인을 이루는 정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 우주라는 이름의 검은 대양에 흩뿌려졌다.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는 육체도, 기억도, 환경도 찾을 수 없다.

정착할 곳을 잃어버린 그녀의 영혼은 그저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의미가 없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의식의 덩어리가 되어 허무의 공간을 떠돌 뿐이다.

그렇게, 한서리 역시 지금까지 수많은 존재들이 그래 왔듯 기린의 힘에 잠식되어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채 먼지의 한 조각이 되었다.

그렇게 될 터였다.

무한히 떠돌던 그녀의 영혼이 그 허무의 공간 속에서 희게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것은,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온통 암흑뿐인 이공간 속에서, 홀로 오롯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봤지?’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내 앞에서, 내 아내를 위협하고 살아남은 놈은 없어.’

널찍한 등.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뒷모습이 보였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당신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처럼 싫은 표정 하지 마.’

너무나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검의 모습으로 벼려져 있었다.

기린의 힘으로 인해 크게 확장되었을 뿐, 지금 이곳은 어디까지나 한서리의 의식 세계의 안쪽이었다.

그 안쪽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것은 끝없이 몰아쳐 오는 정보의 폭풍우와 시공간의 해일에도 풍화되지 않고 고고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 빛이 한서리의 영혼을 이끌었다.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발견한 듯,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의식이 흰색 검을 향해 다가갔다.

‘가지 마…… ‘

가까이 가면 갈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확장된 감각 속에서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던 의식이 점차 형체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물론, 애들보다 당신이 나한테는 훨씬 중요하지만.’

세포가 인간으로 진화해 나가는 모습을 표현하듯, 작은 덩어리가 점차 자라나 길쭉하게 늘어지더니, 이내 팔과 다리를 갖추고 머리를 구성했다.

‘그런 소리를 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야.’

조악한 인형처럼 덩어리져 있는 팔에 관절이 생기고, 손가락이 뻗어 나온다.

둥그런 원형의 머리가 이목구비를 갖추며 기다란 머리카락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허공에 떠 있는 검에 닿았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되찾은 한서리의 입에서 한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고마워.”

당신은 정말 못 말릴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것은 한 방울의 눈물이었다.

김건이 남긴 기억.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한서리의 의식 깊숙하게 박힌 그것이 부표가 되어 한서리의 정보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한서리는 그것의 도움을 받아 온전히 스스로의 자아를 각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린의 주박은 겨우 그것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자아를 되찾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무한한 어둠의 한 곳에 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지했을 뿐이지, 현실의 그녀.

즉 의식이 돌아가야 할 육체의 위치가 어디에, 그리고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를 잃어버린 상태다.

그것을 찾는 것은 온 우주를 뒤져 그 안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모래 알갱이를 집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한서리의 손에는 그 무엇이라도 이길 수 있는 무적의 무기가 쥐어져 있었으니까.

최후의 보루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따라서 한서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당신과 함께라면, 그 어디까지라도 달려 나갈 수 있어.

검을 쥔 여자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만물이 섞인 진흙탕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많은 존재가 그녀를 덮쳐 왔다.

하늘을 베고, 땅을 벤다.

날아드는 혜성을 가르고, 타오르는 태양을 조각내며 폭발하는 초신성을 칼날로 흘리며 지나갔다.

온 우주를 넘고, 수많은 차원을 지나 무량대수의 시간선 속에서 오롯이 하나의 빛을 찾아내기 위해 달려 나간다.

무한의 찰나를 지난다.

억겁의 파도를 가른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에게 진실이 될 현재를 발견했다.

현실로 돌아온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발견한 것은 검게 물든 하늘과, 무너지기 시작하는 대지, 그리고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지면에 처박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천둥이 치며 이상 기후가 발생하고 있었다.

일그러진 공간이 빛을 휘어 내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진 중력이 주변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크으으으……!”

“이, 이러다 죽겠어……!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이 보이고 들리고 있어서 그게 누구의 것인지, 과거의 것인지 미래의 것인지 파악이 안 됐다.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현재를 기준으로 의식 속에서 필요 없는 정보를 모조리 제한하고 삭제.

그제야 한서리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 위에 생성된 검은 구체에서 형성되는 막대한 중력장이 주변 사물을 모조리 바스러트리고 있었다.

“한서리……! 정신 차려!”

세라스의 외침이 들렸다.

<<팀장님!>>

알리시아의 텔레파시가 머리를 찌른다.

마기아의 신음 소리와 크툰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이대로 가면 그들을 자신이 모두 죽여 버릴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한서리가 곧장 두 손에 모인 기운을 떨쳐 냈다.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간 구체가 일순간에 수만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천산의 하늘에 자리한 수많은 위성 중 하나에 착탄.

일순, 급격한 질량의 증가로 막대한 중력이 발생.

공간이 왜곡되며 주변의 빛이 모조리 위성의 한 곳에 찍힌 점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일시적으로 발생한 블랙홀의 중력에 견디지 못한 위성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 검은 괴수가 직경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별을 씹어 삼키는 데에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빨아들인 질량의 일부를 블랙홀의 양 끝점에서 제트의 형태로 분출하며, 지상에서 보이는 하늘이 말 그대로 절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일시적으로 생겨났었던 블랙홀이 아공간으로 사라지고.

그것이 남긴 에너지의 파장에 얻어맞은 별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쪼개져, 온 하늘에 유성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도한 영린의 입이 벌어졌다.

만약, 저것이 지표면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 그대로 천산이 소멸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금의 현상을 일으켜 낸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한서리는 온몸에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무지갯빛이 마치 비단마냥 몸을 감싸고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하늘 솟아오르니, 그녀의 모습은 마치 천상에서 강림한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서리가 눈을 돌렸다.

그 눈을 마주친 영린은 단숨에 한서리와 자신이 가진 격의 차이를 느낀다.

영린은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한서리가 기린의 화신으로서 주인격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일개 화신이 주인격에게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영린은 패배를 깨닫고 바로 게이트를 열어 도망치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한서리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서리가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자 행성의 축이 뒤틀리며 막대한 중력장이 발생, 천산이라 불리는 행성 전역을 대상으로 공간 이동이 차단되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섬섬옥수가 영린을 가리켰다.

스스로가 주인격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선계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에 직접 접근해 영린에게 봉인되어 있는 시간 역행의 힘을 끄집어내려 한 것이다.

“컥!”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다.

아무리 주인격이라 해도 많은 권한을 가질 뿐 기린이 모든 의지를 모아 구축한 시스템의 룰을 마음대로 뜯어고칠 순 없다.

하나 그 거부 반응의 여파는 남아 있었는지, 영린이 막대한 충격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녀를 지키는 유운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하아아앗!”

모든 검을 회수, 그리고 그 검들과 함께 번개가 되어 한서리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한서리가 손을 휘둘렀다.

별다른 충격도,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화신 간의 싸움에서도 겨우 생채기만 입었던 다섯 칼날이 허공에서 조각조각 흩어지더니 모조리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번개가 되어 질주하던 유운이 강제로 모습이 되돌려져 한서리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큭!”

목덜미를 잡힌 유운은 사방에 번개를 방사하며 저항했지만, 그의 공격은 지금의 한서리에게 무엇 하나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

한서리가 입을 달싹인 것만으로도 온몸의 마력이 모조리 빨려 나갔다.

그가 피워 올리는 번갯불이 허무하게 스러지고 온몸에 돋아난 비늘이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유운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크헉!”

몸 안으로 파고든 한서리의 정기가 온몸을 진탕시켰다.

유운은 코에서 핏물을 꿀렁꿀렁 쏟으며 이를 악물고 절대적인 힘을 쥔 여자를 노려보았다.

“…….”

한서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유운은 그녀를 포함한 일행 모두를 죽이려 했었다.

영린처럼 시간 역행의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니, 살려 둘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한서리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죽음을 직감한 유운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기술을 짜내고, 그런 두 사람의 마력이 충돌하기 직전에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사람을 살려 줘!”

그렇게 되돌아본 곳엔, 피와 뒤섞인 눈물을 흘리는 영린이 있었다.

“계약할게.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야. 네가 원하는 대로, 시간 역행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할게.”

그리고 그녀는, 패배를 인정하며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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