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59화
영린은 정말로 계약을 했다.
혼돈의 힘으로 그것을 전이시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의 한서리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기린의 계약이라는 것은 단순히 편한 도구일 뿐이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계약 따윈 필요 없어. 맹세해.”
“맹세?”
“그래, 이 천산과 기린족의 명예를 걸고.”
“…….”
그 말에 영린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그녀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였다.
“……알았어. 맹세할게. 시간 역행의 힘으로 네 남편을 과거의 상태로 되돌려 주겠어.”
“좋아.”
한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아귀에서 힘을 빼고 유운을 풀어 주었다.
피를 흘리며 유운이 힘없이 쓰러지자, 영린이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상황이 마무리 되자 더 이상 힘을 낭비할 필요도 없어졌다.
한서리는 온몸에서 뿜어내고 있던 정기를 정리했다. 그러자 비단옷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는 무지갯빛이 사라지며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차가운 미모가 돌아왔다.
한서리는 가볍게 한숨을 쉬곤 주변의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꼴이 엉망인 것을 발견하고는 손을 뻗었다.
가볍게 마력이 뿜어져 나오더니, 모두의 모습이 단숨에 멀쩡한 상태로 복원되었다.
단순 재생을 뛰어넘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한 회복 기술에 알리시아가 감탄한다.
세라스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한서리를 쳐다보았다.
“서리야…….”
그녀는 방금 한서리가 블랙홀을 생성해 위성을 날려 버리고, 행성 전체의 중력을 조작해 공간 이동을 차단했으며, 일격에 유운을 쓰러트리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정말 그것을 한서리가 한 것인지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지금 보면 그냥 평소랑 다를 바가 없는데, 갑자기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괜한 의문이 들었다.
정말,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녀가 알고 있는 친구가 맡는가?
그런 생각.
세라스는 꿀꺽 침을 삼키고 말했다.
“……괜찮아?”
그 불안함이 섞인 목소리에, 한서리는 단번에 세라스의 걱정을 알아채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한서리가 손을 젓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 고중력에 눌리지 않고 그저 바닥에 쓰러져 있던 김건이 그녀의 곁으로 날아왔다.
한서리는 그의 옷을 툭툭 털어 먼지를 날려 주었다. 그러곤 서늘한 남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이의 존재가, 지금의 나를 잡아 주고 있으니까.”
* * *
한서리가 다섯 개의 여의주를 흡수했다.
그녀 자신과 이전에 흡수했던 여의주 하나를 포함, 총 화신 일곱 명분의 힘을 받아들여 주인격의 권위와 막강한 힘을 획득해 단번에 유운과 영린을 제압.
그것으로 시간 역행의 힘을 둘러싼 천산에서의 사투는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렇게 시간 역행을 사용하겠다는 약조를 받아 낸 한서리가 영린을 바라보았다.
“하루 쉬게 해 주지. 내일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그것은 그저 평범한 한마디였을 뿐이다.
아무런 적의도, 살기도 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얻은 그녀에게 더 이상 영린과 유운은 적의를 보낼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영린은 온 세계의 모든 것이 그녀를 노려보며 대답을 강요하는 것만 같은 압박감을 받았다.
“허억……!”
분명히 감각상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왠지 숨을 쉴 수가 없다. 공포심이 치밀어 오르며 찌르르 손가락 끝이 울렸다.
“……정신 차려.”
영린은 그녀와 한서리의 사이에 유운이 끼어들고 난 뒤에야 겨우 한서리의 압박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붙잡고 심호흡을 계속하더니 이내 한서리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알았어. 내일까지 시간 역행을 시전할 준비를 마쳐 놓을게.”
“그럼 그동안 우리가 묵을 곳 좀 다시 안내해 줘. 전에 있던 도당은 다 박살이 나 버렸으니까.”
“…….”
한서리의 마법으로 멀끔해진 일행들과 달리, 유운과 영린은 격한 전투의 흔적으로 온통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패배했고 모든 주도권을 틀어쥔 것은 한서리였다.
선택지가 없는 영린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천산을 배회하며 새로운 장소를 지정하고 그들이 부릴 하인까지 준비한 뒤에야 겨우 그들의 시야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격한 전투에 지친 알리시아와 세라스는 자리가 정해지자마자 잠에 빠져들어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떴다.
졸린 눈으로 준비된 점심을 먹고는, 자연스럽게 그간 해 왔던 대로 식후에 즐겼던 온천욕을 위해 탕에 몸을 담그고 나서야 비로소, 목숨을 건 전투와는 억만 광년 만큼의 거리가 있는 지금의 상황에 이질감을 느꼈다.
“음…….”
바로 어젯밤의 이야기다.
천산의 사신과 혼돈의 힘을 다루는 영린, 그리고 선계 제일의 전사라 불리는 유운과 사투를 벌였다는 것, 그리고 한서리가 남아 있는 모든 여의주의 힘을 흡수하는 것으로 사건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무래도 현실감이 없었다.
알리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탕 속에 같이 앉아 온천욕을 하고 있는 한서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팀장님.”
“왜?”
“정말로 기린의 주인격이 되신 겁니까?”
한서리는 피식 웃었다.
“그래, 임시직에 가까운 느낌이긴 하지만.”
어제의 전투로 날아가 새로 재생한 팔에 이상이 없나 확인하던 세라스가 반응했다.
“임시직?”
한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최근에 시간 역행의 후폭풍을 얻어맞은 기린의 주인격이 소멸해 버리고 난 뒤에 공백기가 온 거지. 아마 선계에 뿔뿔이 흩어진 그 힘이 다시금 모이기 시작하면 아마 그게 주인격의 자리를 다시 되찾아 갈 거야.”
알리시아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한서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흠…… 겉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러자 한서리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 하늘에는 어제 그녀가 일으킨 대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어 여전히 하늘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고, 블랙홀이 방사한 제트에 맞아 파괴된 위성의 잔해가 행성의 중력권에 진입할 때마다 떨어져 간간이 유성이 발생하고 있었다.
한서리가 눈을 깜빡이자, 거짓말처럼 하늘에 음영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중력, 그리고 인력의 변화에 속이 울렁거리고 대기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하늘을 바라본 알리시아와 세라스는 감탄, 아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위성이 눈에 띄는 속도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경우는 몇 개 없다. 정말로 위성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거나, 아니면 천산이라는 행성의 자전 속도가 바뀌었거나.
놀란 세라스가 물 위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야! 야! 이건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그녀가 호들갑을 떨자 한서리는 다시금 신호를 주어 위성의 위치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스케일이 크다고는 하지만…… 별건 아니야.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능력을 봉인해 버렸거든.”
“그런데 이 정도라고?”
세라스는 경외심 어린 표정으로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한서리가 뭔가 다른 존재로 진화해 버린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능력을 제한해 인간성을 유지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마음이 놓인 세라스가 물었다.
“그런데 너, 무슨 생각으로 여의주를 흡수할 생각을 한 거야? 그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건 알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보다 못한 꼴이 될 수도 있었잖아.”
기린의 주박에 사로잡히면 자아를 잃은 채 그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무한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세라스는 그것만큼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서리는 그렇게 될 가능성을 앎에도 여의주의 흡수를 시도했다.
한서리가 말했다.
“이겨 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는 있었어. 위험하니까 굳이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지.”
“확신?”
“내가, 이 사람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옆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는 김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하는 김에 손으로 온천의 물을 떠서 김건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현재로 돌아오자마자 대부분의 기억을 지워 버려서 나도 정확한 건 몰라. 내가 어떻게 확장된 기린의 의식 속에서 자신을 찾고 이곳까지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
“…….”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이 사람이 없었으면 난 되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한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알리시아와 세라스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좋으시겠습니다.”
“그래, 둘이서 아주 잘 먹고 잘 살아라.”
* * *
그렇게 평온한 하루가 지나, 정말로 그들의 여행에 끝을 고할 의식의 준비가 끝났다.
이번에는 속임수 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시간 역행을 사용할 준비를 마친 영린이 그들을 호출했다.
맨 처음 그들을 속이기 위해 만들었던 제단과 달리 영린이 준비해 둔 것은 조촐했다. 그저 깨끗한 도당을 하나 비워 두고, 사방에 결계를 쳐 주변의 마력을 모아주는 역할 정도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세라스가 영린을 쳐다보았다.
“혹시 또 뭔가 수작을 부려 둔 건 아니겠지?”
“…….”
영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 와중에 또 그렇게 하겠냐?’ 라는 표정으로 한심하다는 듯 세라스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 눈초리에 불쾌해진 세라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뭐라 입을 열 때였다.
유운이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렇게 서로 날 세우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가 뭘 한들 저 친구의 손바닥 안이니까. 마음 편하게 가자고, 편하게.”
그 오만하고 차가운 전사는 어디 갔는지, 그는 한서리를 턱짓해 보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고는 세라스에게 말했다.
“어제는 정말 굉장한 하루였어. 세라스, 너한테는 다시 한번 놀랐다. 정말 위험했어.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싸웠다면 내가 졌을지도 몰라. 정말 대단한 실력이었어.”
대단하다고 강조까지 주어 말하니, 딴에는 칭찬이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세라스 입장에서는 그저 놀리는 것으로 밖에 안 들렸다.
‘이 자식이…….’
하여간 재수 없는 놈이다.
세라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유운은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칭찬에 약한가?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어때?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을…….”
“그만 입 닥치고 호법이나 제대로 서. 난봉꾼 새끼야.”
주절거리던 유운은 끝까지 말을 짓지 못하고 영린에게 귀가 잡혀 끌려갔다.
잠시 후, 모든 준비를 마친 영린이 마법의 대상인 김건을 제단의 위에 눕혀 두도록 했다.
“그럼, 시작한다.”
영린이 술식을 전개했다. 그녀의 몸에서 펼쳐져 나온 마법의 공식이 도당을 가득 메웠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고 방대한 술식이다. 그 규모에 깜짝 놀란 알리시아가 말했다.
“혼자서 이 정도 마법의 전개가 가능하다고? 이 정도라면 어제…….”
“이건 내 능력이 아니야. 기린이 내게 부여해 준 힘이지. 나도 사용만 할 수 있을 뿐, 술식의 동작 구성이나 원리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
영린은 그렇게 설명하며 계속해서 술식을 펼쳐 나갔다.
사방을 떠다니는 마법진을 손으로 조립하자 그녀의 앞에는 술식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시계가 자리하게 되었다.
까딱, 까딱, 소리를 내며 초침과 분침, 그리고 시침으로 이루어진 시계가 운동을 시작했다.
그 시계의 제어판을 잡으며 영린이 한서리에게 물었다.
“그럼, 시간을 얼마나 돌리기를 원하지?”
김건을 어느 시점으로 되돌릴 것인지는 미리 정해 두었다.
그가 한서리를 찾아와 여섯 화신을 상대하기 위해 그 기술을 하용하기 바로 직전.
너무 많은 시간을 돌려 버리면 그만큼 그가 쌓아 온 것들을 내버리게 된다. 몸에 문제가 없는 선에서, 한서리는 남편의 시간을 최대한 적게 돌리기를 원했다.
원하는 단위로 계산한 시간을 불러 주자 그것에 따라 술식의 시계를 설정한 영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설정은 마쳤으니까 이제 물러나. 쓸데없는 것이 끼어들면 술식이 오작동을 일으킬지도 몰라.”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도당의 밖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영린이 펼쳐 내는 힘의 회오리를 지켜보았다.
시간 역행을 위해 기린이 영린에게 부여한 그 능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주인격으로 각성한 한서리가 마음껏 행성의 중력을 가지고 놀듯, 막대한 크기의 힘이 하늘에서 내리꽂혀 영린 혼자서는 불가능한 규모의 마법을 발동해 나갔다.
우우우우!!
온 선계의 에너지가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천산이 울부짖으며 사방에 무지갯빛 정기가 번졌다.
영린의 앞에 구축되어 있는 술식 시계.
그것의 초침이 점차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천천히, 술식 시계의 초침이 까딱까딱, 반대 방향을 향해 그 끝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한 단계 뒤로 돌아갔을 때.
“…….”
무언가를 느낀 영린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