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60화 (160/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60화

덜컥덜컥-

술식의 초침이 진동했다.

뭔가에 걸리기라도 한 듯 덜커덕거리면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 충격은 영린이 펼치고 있는 술식 전체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지면이 몸을 떨었고, 하늘엔 빠르게 먹구름이 몰려왔다.

우우우우!

폭풍처럼 밀려온 먹구름들이 몸을 뒤섞자 스파크가 인다. 그리고 이내, 그 안에서 번뜩인 빛이 영린을 향해 꽂혀 내림과 동시에 번개가 된 유운이 틀어막았다.

콰르르릉!

한참이 지나서야 울리는 천둥소리.

이상 기후가 더 심해진다. 새카맣게 물든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번개를 한서리가 펼쳐 낸 공간 장벽이 막아 냈다. 이어서 그녀가 발을 지면에 내리꽂자 파도처럼 요동치는 지진이 멎었다.

“대체 뭐야?”

그제야 말문이 트인 세라스가 외쳤지만 그 질문에 답해 줄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큭, 으으읏!”

땀을 뻘뻘 흘리며 영린이 필사적으로 술식을 통제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시계 침을 움직이려 했으나 무리였다.

파직!

끼익 끼익 비명을 지르던 술식 시계의 초침이 일순 부러지더니 그 여파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주변을 둘러싼 마법진이 한순간에 바스라지며 그 안에서 터져 나온 에너지가 주변을 휩쓸었다.

“악!”

술식 가운데에 있던 영린은 그 충격을 모두 몸으로 받아 냈다.

튕겨져 날아가는 그녀의 몸을 유운이 받아 주었지만 이미 큰 타격을 받았다. 영린은 컥 소리를 내며 한 사발이나 되는 피를 쏟았다.

술식의 파괴로 뻗어 나가나는 충격파를 상쇄한 한서리가 영린을 향해 날아갔다.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인지, 영린이 실패하자마자 하늘에서 내리치던 번개와 지진까지 멈춘 상태였다.

그녀는 마력을 뿜어 영린의 회복을 도와주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억지력…… 억지력이 작용했어!”

영린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두려움 가득한 눈이 제단 위에 누워 있는 김건을 바라보았다.

“저놈…… 이미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신격이 깃들어 있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라스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신격이 깃들었다고?”

“그래! 억지력이 저놈을 감시하고 있다고!”

그 말을 듣자 알리시아가 뭔가를 깨달은 듯 신음처럼 이야기했다.

“그럼 김건의 회복을 막던 기운이 반마력이 아니라 억지력에 의한 것인가?”

“아니, 대체 왜? 억지력이 김건의 회복을 막을 이유가 있어?”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세라스. 그런 그녀의 의문에 답한 것은 한서리였다.

“균형을 깨 버렸으니까.”

어느 정도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녀는 의외로 차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이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을 벌였어. 마력을 소멸시키는 그 힘으로, 한낮 인간으로서는 일으킬 수 없는 결과들을 만들어 왔지.”

그건 안다. 회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대부분의 큰 사건들은 모두 김건의 ‘그 기술‘로 인해 끝맺음이 났으니까.

하지만 세라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억지력이 움직일 정도야? 아무리 그 힘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

영린이 말했다.

“그것뿐이 아니야. 지금까지 벌인 사건으로 신격에 준할 정도의 자격을 갖춘 존재가 시간 역행까지 수행하려고 하니까 가만히 있지 않는 거지.”

한서리 역시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한 개인이 신격을 얻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니야. 이 천산의 사람들이 스스로 화신이 되어 승천을 하듯이. 그들 역시 억지력의 간섭을 받을걸?”

그러면서 영린과 유운을 바라본다. 유운이 말을 받았다.

“그래, 선계 내에서의 활동은 괜찮지만 마력이 없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등, 균형을 깨는 행동에 대해서는 똑같이 억지력의 영향을 받아. 시간 역행이나 물질 창조처럼 섭리를 거스르는 힘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알리시아가 물었다.

“……그러면 전혀 방법이 없는 겁니까?”

한서리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힘을 보태면 억지로 시간을 되돌리는 건 가능할 거야. 문제는 그다음에 날아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거지. 이전의 역행에서 기린의 주인격이 지워졌듯이, 이번에는 내가 지워질지도 모르지.”

그 말을 들은 영린이 펄쩍 뛰었다.

“그건 안 돼! 이미 최근에 선계는 너무 많은 타격을 받았어! 다시 한번 주인격이 날아가 버리면, 티아마트와 벨제불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없을 거라고!”

벨제불이나 티아마트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선계 전체가 그들의 침략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떠올린 세라스와 알리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세라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거야? 지금까지, 그렇게 개고생을…….”

“그만둬라. 세라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세라스의 입을 알리시아가 틀어막았다. 그제야 세라스는 이 자리에서 제일 상심이 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리시아는 침통한 얼굴로 한서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지금 한서리가 짓고 있을 표정을 눈으로 본다면, 정말로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서리는 알리시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빌어먹을 세상. 정말 마지막까지 모험을 하게 만드는군.”

한서리는 욕설을 내뱉었다. 슬픔보다는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알리시아를 돌아본다.

“알리시아. 인형에게 사람의 의식을 옮기는 게 가능하다고 했지?”

“예…….”

예상외의 반응, 예상외의 질문에 알리시아의 어깨가 굳었다. 한서리는 다시 물었다.

“네 인형 기술로 사람의 의식을 옮기는 게 가능하냐고 물었어.”

“어…… 가능하긴 합니다. 저도 가끔 인형에 제 의식을 옮겨서 활동하곤 하니까요. 영구적으로 고착시키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난이도도 높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그러면 해 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인형을 하나 만들어 줘. 얼마나 걸리지?”

“만들어 둔 인형들을 뜯어서 조립하면 금방 되긴 합니다만, 혹시 만들어야 하는 인형이…….”

“뭘 물어? 당연히 이이의 의식이 들어갈 인형이지.”

“뭐!?”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세라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김건의 의식을 옮기려고? 하지만 시간 역행이 작동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 아니야?”

“작동할 거야. 나머지 육체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뇌만 과거로 되돌리면.”

그 발상에 영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조악한 수가 통할 것 같아? 억지력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우습게 보지 않으면? 맨 처음 시간 역행을 일으킨 건 아그니스의 의지였는데, 그 후폭풍은 오히려 기린의 주인격이 얻어맞았지. 억지력도 얼마든지 착각할 수 있어. 단순히 우리가 억지력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

아그니스의 예를 들자 할 말이 없어졌다. 영린이 침묵하는 가운데 한서리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억지력이 제한하고 싶은 건 남편의 ‘그 기술’이지, 김건이라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니야.”

알리시아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기술은 김건의 것이지 않습니까. 김건의 기억과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사용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해 보자는 거야.”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제단으로 다가가 김건의 팔을 만졌다.

“이이의 특출난 제어력은 그냥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극도로 낮은 마력적성을 가지고 태어난 건 오히려 축복이었을지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자신의 다른 재능을 개화시키기 위해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

“얇은 마력회로와 섬세한 신경계…… 그런 재능은 육체에 잠재되어 있는 거지. 뇌뿐만이 아니라, 육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야만 ‘그 기술’을 발동시키는 게 가능할 거야.”

그때, 잠자코 있던 유운이 말했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가 있어야 할 거라는 가정은 맞을 거야. 고도의 기술일수록, 고도의 성능을 가진 육체가 필요하니까.”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해. 전사의 기술이라는 건 가진 걸 최대 효율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거지,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아니거든.”

세라스도 유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보강했다.

더 이상의 반론이 나오지 않는다. 한서리는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속이는 거야. 억지력을.”

그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한서리는 영린을 돌아보았다.

“인형은 이쪽에서 준비할 테고, 오늘 중에 시간 역행의 술식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겠어?”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쉬고 나면 가능할 거야. 그런데 정말 그 방법으로 괜찮은 거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한서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뭔가 문제가 있어?”

“만약 네 생각이 맞아서 성공적으로 인형에 의식을 전송하는 데 성공하면, 네 남편은 그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냐고 묻는 건데.”

한서리는 이 녀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는 얼굴로 영린을 돌아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없어? 그건 삼계를 위협할 수도 있는 힘이라고! 그걸 얻기 위해서 되살리려는 거 아니야?”

“하아…… 말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그딴 건 하나도 필요 없어.”

“……그럼 뭐가 필요한 건데?”

한서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러곤 살짝 눈을 들어 유운을 향해 이 여자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듯한 눈짓을 했다.

“한서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고 싶을 뿐인 거야. 그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은 게 아니라.”

“…….”

유운이 설명을 했지만 영린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러니까 신부가 되느니 마느니 소리를 쉽게 하는 거지.’

유운은 깊게 한숨을 쉬었고, 한서리는 차갑게 말했다.

“네가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어. 체력이나 회복해. 인형이 완성되면 바로 시도할 거니까.”

“알았어.”

영린은 의뭉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가 김건의 모습을 한 인형을 만드는 데에는 반나절 정도가 걸렸다. 그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엉망이 된 제단을 정돈하고 영린이 술식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제단은 충분히 넓었다. 새로이 만든 인형을 김건의 옆에 눕힌 영린이 한서리를 돌아보았다.

“그럼 시간은 똑같이?”

“그래, 돌리는 시간은 똑같이 하되, 그 대상은 이 사람의 뇌에 한정할 것.”

“좋아. 설정했어.”

다시금 영린이 술식을 사용했다. 아까처럼 사방에 마법진이 퍼져 나가고, 빛의 선으로 이루어진 술식 시계가 그녀의 앞에 떠올랐다.

이전과 똑같이, 점차 움직임을 멈추는 시계.

그리고 영린이, 술식의 발화식을 발동하는 순간, 급속도로 시곗바늘이 뒤로 돌기 시작했다.

“됀다!”

억지력의 방해도 없다. 정상적으로 김건의 시간이 뒤로 돌아가고 있다.

그것을 확인한 한서리가 외쳤다.

“시간이 돌아가고 있어! 알리시아!”

한서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건이 쓰러진 이후, 그토록 흥분한 한서리의 모습은 처음으로 본다. 알리시아는 숨을 삼키며 얼른 김건의 머리맡에 달려들었다.

시간 역행이 끝나자마자 시간의 오차 때문에 연결 고리가 모두 끊어져 있을 김건의 뇌를 보호하고, 그것에서 의식을 빼내어 옮길 준비를 했다.

시계의 역행이 멈췄다.

모든 일을 마치고 스러져 가는 술식의 조각 속에서 영린이 소리쳤다.

“끝났어!”

“알았다!”

알리시아가 의식의 전송을 시작했다.

김건이라는 이름의 인간, 그를 이루고 있는 기억과 인격을 마력이라는 연결 통로를 통해 미리 준비해 둔 인형의 뇌에 옮겨 담는다.

기본적으로는 디지털로 이루어진 저장 매체에서 데이터를 옮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작업.

하지만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보를 이동시키는 데에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순조로이, 의식의 전송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콰르르릉!

갑자기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이전과 똑같이 지진이 일며 먹구름이 일고 사방에서 아우라가 번져 나오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일인지, 억지력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번개와 플라즈마의 폭풍을 두들겨 맞으며 세라스가 소리쳤다.

“뭐야! 이건 또 왜 이러는데!”

“제기랄!”

유운이 양손을 모아 떨치자, 반구형으로 일어난 번개의 방벽이 주변을 지켰다.

“크으으윽!”

그는 이 상황에서 제일 큰 도움이 될 한서리가 뭘 하고 있나 싶어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그녀가 가만히 있는 이유를 깨닫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천산의 온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광량에 눈이 멀 것 같다. 온통 새하얗게 빛나는 빛줄기 속에서, 천산을 지키는 족장으로서의 감각을 발휘한 영린은 이내 무시무시한 것을 발견했다.

억지력에 의해 공간을 가로지르고 날아온 우주 폭풍이 천산 전체를 덮치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제일 가까운 항성에서 발생한 태양풍.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가진 그것이 행성을 전부 태워 없앨 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만약 한서리가 블랙홀을 만들어 내고, 마음대로 행성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면 천산의 지표면은 벌써 지옥으로 돌변했을 것이다.

“아아아아아!!”

한서리가 일으킨 장벽이 그 절멸의 재해로부터 행성 전체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주인격이라고 해도 이 이상의 일을 바라는 건 무리다.

영린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이토록 억지력이 날뛰는 이유를 추측했고,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육체를 날려야 해!”

시간 역행의 술식을 펼친 덕에 마력 탈진이 일어나 설 수조차 없다.

그녀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며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손이 남아 있는 세라스를 향해 외쳤다.

“의식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켰다고 해도, 되돌아온 의식과 육체를 다시 결합하면 작동할 수도 있으니까 날뛰는 거야! 김건의 육체를 지워서 없애! 그것밖에 없어!”

마침 김건의 육체로부터 의식을 빼내는 작업이 끝났다. 알리시아는 그렇게 빼낸 의식을 인형에 안착시키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그러면 영린의 말대로 그저 껍데기만 남은 김건의 육체를 없애 버리면 될 일이다.

세라스는 곧장 극대소멸공격을 짜 올렸다.

양손에 모인 열파. 그것을 날린다면 인간 하나의 몸을 지워 버리는 것은 일순이다.

하지만 그것을 뿜어내기 직전에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정말 저걸…… 없애 버려도 되는 건가?

아무리 의식이 빠져나갔다고는 해도, 친구의 육체인데?

세라스는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서리는 억지력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답답해진 영린이 가슴을 쳤다.

“너희들이 원하는 건 그의 능력이나 육체가 아니라고 했잖아! 어서 없애 버려!”

그 말은 맞다. 한서리 일행이 김건을 되살리려고 했던 것은 그의 무력이나 능력을 원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김건의 의식을 인형에 옮겨 되살리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도 별생각 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막상 김건의 흔적을 지워 버릴 상황이 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라스는 지금까지 무인으로서의 김건을 바라봐 왔다. 약한 육체에도 굴하지 않고 전설적인 위업을 이루어 낸 그의 힘을 동경했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까지 왔다.

저 육체를 없애 버리면, 다시는 그가 동경하던 김건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러면…… 그걸 과연 김건이라고 할 수 있나?’

의문이 떠오른다. 망설임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세라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크게 눈을 뜨고 있는 한서리가 보였다.

서로의 눈이 마주칠 뿐인 찰나의 시간, 두 사람은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눈으로 세라스가 묻는다.

너는, 지금까지 너를 지켜 온 무적의 검을 잃어버리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무기로서의 김건.

그 정체성을 없애 버려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한서리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호한 의지가 세라스의 망설임을 날려 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그래, 진짜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세라스가 동경해 왔던 것은 단순히 그의 무력이 아니라 김건의 영혼, 그가 가진 긍지와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였으니까.

결심을 내린 세라스가 손을 내뻗었다.

그녀로부터 뻗어 나간 불기둥이 한순간에 김건의 육체를 집어삼켰다.

지금까지 수많은 신격들을 집어삼켜 온 육체가 먼지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일순.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억지력의 폭풍이 멎었다.

부자연스럽게 발생한 자연 현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물러나고, 구름이 걷힌 파란 하늘 위에서 태양이 내리쬔 빛이 제단을 비췄다.

모든 작업을 끝마친 알리시아가 지쳐서 주저앉는다.

그리고, 김건의 형태를 한 인형의 눈이 뜨였다.

당황한 듯한 시선이 주변을 누비고, 이내 한곳에 멈췄다.

김건은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그것을 듣는 순간, 한서리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거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와 시선을 맞추고 그의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다시 한번 그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한서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모든 자제심이 무너진다.

기린의 주인격이 되고, 세계의 법칙이나 마찬가지인 억지력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손에 얻었음에도, 한서리는 김건의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

한서리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되돌아온 자신의 남편을 끌어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