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61화 (161/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61화

한서리 일행은 지구로 돌아왔다.

아그니스의 선계 정벌군이 만들어 놓은 대형 게이트로 마계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화신이 많은 그들 일행도 별다른 억지력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지구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서리의 힘으로 힘을 회복한 마기아가 지상에 착륙했다.

막상 도착하자 왠지 어색하다.

모두는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세라스가 물었다. 한서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용족의 마을로 가자. 인간 측이랑은 끝이 좋지 않았으니까.”

용족의 마을로 가자 한서리가 용왕이던 시절의 측근 몇몇이 마기아를 알아보았다. 덕분에 그들은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과거, 한서리와 알리시아가 거의 살다시피했던 용왕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배려인지, 집무실은 예전 모습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소파에 앉은 알리시아가 닳아 버린 소파의 끝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짜로…… 돌아왔군요. 이제 고작 5년인데, 수십 년은 지난 느낌입니다.”

“언니도 그렇게 느껴? 천 년을 넘게 살았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세라스가 그렇게 말했다. 한서리와 김건은 그 모습을 보며 그저 웃었다.

“돌아오셨군요.”

한서리를 보좌하던 비서, 엘리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용족들은 복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곤 한다. 그녀의 복장을 본 알리시아가 깜짝 놀랐다.

“뭐야, 너…… 그 옷…… 차기 용왕 후보라도 된 거야?”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용왕의 자리는 공석이니까. 아크룩스 장군님이 대리해서 임시직을 맞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비워 둘 수는 없잖아?”

어깨를 으쓱인 엘리가 한서리를 돌아보았다.

“제 입장에서는 용왕님이 복귀해 주시는 게 더 좋긴 하지만요.”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생각 없어. 책임을 떠안는 역할을 하는 건 이제 질렸거든.”

“아쉽네요.”

엘리는 웃으면서 어디선가 꺼내온 술병과 잔을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알리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술이 엘리가 몇백 년간 애지중지하며 직접 숙성시킨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을.

“설마, 그거 까려고 가져온 거야?”

“응. 돌아오시면 대접해 드리겠다고 약속했거든.”

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서리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제일 먼저 김건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꼴꼴꼴, 병에서 술이 흘러나올 때마다 진한 향기가 콧속을 맴돌았다. 김건은 술잔을 받아 들며 엘리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제 기억상으로는 엘리 씨와 인사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금 떨떠름하긴 하네요.”

“5년이나 잠들어 있던 거나 마찬가지니까.”

한서리가 그렇게 말을 받았다. 엘리는 공손히 술병을 움직여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술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모두들 술을 홀짝이는 가운데 엘리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용왕님이 떠나신 직후에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지구는 꽤 안정된 상태입니다.”

한서리가 눈을 치켜떴다.

“혼란스러웠다고?”

“네. 용왕님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악마종과 수인들이 지구를 집어삼키려 들었거든요.”

“그 자식들…….”

세라스가 이를 갈았다. 한서리는 술잔을 흔들며 말했다.

“기가스와 그린스킨들이 제법 도움이 되었나 보네? 크투그아는 계속해서 내 시중을 들고 있었으니까.”

“네, 그들이 힘을 합쳐 준 덕분에 큰 피해를 보지 않고 두 종족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는 피식 웃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습니다. 공통의 적은 언제나 멀어진 집단과 집단의 사이를 좁히는 좋은 접착제가 되니까요. 그 덕에 인간과 용족의 사이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린스킨과 기가스들과도 교류를 시작했고요. 노제 프레데리카가 각 종족 간의 화합을 다지는 데 많은 힘을 썼죠.”

“……노제 교수님은 잘 계시나 보네.”

“말이 잘 통해서 저도 좋아합니다.”

엘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굳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마계화의 진행이 빨라서 생각보다 빠르게 티아마트와 벨제불이 손을 뻗쳐 왔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건 이제 문제없을 거야. 팀장님이 기린의 주인격이 되셨으니까. 이제는 얼마든지 권속화의 계약을 할 수 있어. 이곳이 완전히 선계에 포함되면 놈들도 그리 쉽게 넘어오진 못할 거야.”

알리시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용왕님께서, 기린의 주인격이 되셨다고요?”

놀란 엘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반응에 신이 난 세라스와 알리시아는 그 이후로 한참 동안이나 그간의 선계탐사에서 있었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회포를 풀고 나니, 이제 앞일에 대해 논의할 차례가 왔다.

엘리가 말했다.

“세상을 호령하며 떠들썩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새 신분을 만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야지. 그 난리를 쳤으니, 좋든 싫든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나아.”

한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된 세라스가 물었다.

“그러면…… 혹시 지금까지 알던 지인들이랑 만날 수도 없는 건가?”

“그건 아니야. 아마 엘리가 각각의 지도자들에게 우리가 돌아왔다는 것에 대해 공유를 하면 각자 알아서들 필요한 만큼 정보 통제를 할 거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면 지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한들, 별다른 문제는 안 될 거야.”

알리시아가 설명하자 세라스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어. 나도 딱히 기존의 신분에 미련은 없으니까.”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각자가 사용할 새 신분은 제가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만 해 주세요. 여기 계신 분들은 세계를 지킨 영웅이니까요.”

알리시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우리들도 포함되는 건가?”

자신과 세라스를 가리키며 묻는다. 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도 훌륭한 화신이 되었잖아? 그러니까 지금 점수를 따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걸 꼭 내 앞에서까지 이야기해야겠어?”

“언니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먹는 경우가 많으니까.”

한서리가 떠난 뒤, 차기 용왕 후보로 일컬어지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 * *

엘리가 새 신분을 준비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김건과 한서리는 바로 사회로 나가지 않았다. 그간 겪은 일이 너무 많아, 서로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신분을 숨긴 채 당분간은 인적이 드문 한 섬에서 조용히 휴양 생활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뒤, 엘리가 마련해 준 두 사람의 별장에서 세라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나랑 알리시아 언니는 같이 선계 여행을 조금 더 해 볼까 해. 목적성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거든.”

“좋네. 크툰도 데려가는 거지? 필요하면 연락해, 좌표만 찍어 주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미소를 지으며 한서리가 답하자 세라스는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됐거든? 너한테까지 도움 받을 정도로 위험한 짓은 안 할 거니까.”

그러곤 한서리의 앞으로 다가오는 세라스. 쪼그려 앉은 그녀는 만삭이 되어 부풀어 오른 한서리의 배를 향해 말을 걸었다.

“다음에는, 이모가 좋은 선물을 가져올게.”

“만져 봐도 돼. 다음에 왔을 때는 아마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있을 테니까.”

한서리의 허락이 떨어졌다. 세라스는 잠시 친구의 배를 쓰다듬다가 일어났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정리하며 말한다.

“아이 낳고, 몸조리 좀 하고 나면 메리안부터 찾아가. 보고 싶어 하더라.”

“알았어.”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준비를 마친 세라스를 바라보며 작게 손을 흔든다.

“나가진 않을게. 잘 다녀와.”

“그래, 다음에 보자.”

인사를 마친 세라스가 현관으로 나가는 것을 김건이 배웅했다.

“아쉽네. 간만에 왔는데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지.”

“됐어. 나 같은 노처녀가 끼어 봤자 부부 생활에 방해밖에 안 될 테니까.”

세라스는 주먹을 꼭 쥐며 이야기했다.

“언니랑 약속했어. 이번 여행이 끝날 때는 꼭 남자 한 명씩 잡아서 데려오기로. 선주민족으로 인간형들이 있는 선계를 주로 돌아다닐 거니까 충분히 멋진 놈으로 골라 잡을 수 있을 거야.”

“잘됐네. 다음에 오면 소개시켜 줘.”

“…….”

역시, 이 자식은 매사에 너무 진지해서 농담이 안 통한다.

세라스는 정말로 김건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눈치 좀 챙기라는 듯 눈을 흘겨 보지만, 김건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멀뚱히 이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벽창호인 건 여전하네.’

세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닫기 전에, 문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건을 가리키며 선포했다.

“기대해.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아마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 있을 테니까.”

그토록 도발적인 시선을 마주하는 건 얼마 만인가.

“…….”

인형의 육체에도 체액은 흐른다. 김건은 간만에 온몸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령 진짜 싸울 것이 아니더라도, 이럴 때는 도발 한마디 던져 주는 것이 싸움꾼의 미덕이다.

입술이 다 간질거렸다.

하지만 김건은 그 욕구를 억눌렀다.

그는 도발 대신, 이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기대할게. 그럼 다녀와서 보자.”

세라스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젠 아빠가 다 됐네.”

이내 미소를 짓는 세라스. 그녀는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지내.”

그것을 마지막으로 세라스가 떠났다.

김건은 터덜터덜 걸어서 넓은 별장의 거실로 돌아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찻잔을 정리하고 있던 한서리가 배시시 웃었다.

“갔어?”

“응. 남편감을 구하겠다고 의욕이 만만하던걸.”

김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서리를 도로 앉혀 놓고 설거지를 했다.

흔들의자에 앉은 한서리는 발을 굴러 천천히 몸을 흔들며 말했다.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보는 눈만 좀 낮추면.”

“세라스가 그렇게 눈이 높았나? 남자 사귀는 모습을 못 봐서 모르겠네.”

“에이, 당신이라는 사람을 옆에서 계속 지켜봤는데, 어지간한 남자가 눈에 차겠어?”

“……내가 그런 기준이 될 정도의 매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매력 있어. 무려 기린의 주인격이 보장하는 거야. 당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봐. 내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인정할게.”

“정말 폭군이 따로 없네.”

한서리는 악마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김건은 헛웃음을 지으며 정리를 마쳤다.

손의 물기를 닦아 낸 김건. 그는 뭘 할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서 팔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아는 한서리가 웃었다.

“왜, 세라스가 가기 전에 무슨 도발이라도 했어?”

“다시 만날 때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을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 승부사의 기질이 불타올랐어? 본인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어?”

“…….”

김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운동을 계속한다. 그에 한서리는 쿡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웅─

별다른 술식을 펼친 것도 아닌데, 김건의 주변이 무중력 상태가 되며 그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렇게 열심히 해 봐야 소용없다니까.”

세라스가 했듯, 한서리가 도발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김건도 참지 않았다.

“글쎄?”

그는 그러면서 오라를 분사해 무중력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알리시아가 그랬듯이, 인형이라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 과거처럼 정밀하게 마력을 제어할 수는 없지만 전사로서의 감까지 다 죽어 버린 건 아니었다.

중력을 되찾은 김건은 발을 박차며 순식간에 한서리를 향해 접근해 들어갔다. 공격 의도는 없지만 거리를 좁히는 것으로 우위를 보여 줄 생각이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고속으로 움직이는 와중에 발소리 하나 울리지 않는 기민함.

전사로서 김건의 실력은 여전히 인류의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한서리는 단순한 종이 아니라 생물로서의 격을 뛰어넘어 있었다.

한서리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김건의 몸이 별장의 안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김건이 상황 변화를 의식했을 때, 그는 상공 수천 미터의 하늘에 있었다.

콰아아아아!

울려 퍼지는 바람 소리.

몸이 추락하며 미친 듯이 옷이 휘날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변이 번쩍이자 어딘가의 바닷속에 도착해 있었다.

“……!!”

부그르르르르

그의 입에서 빠져나온 공기 방울이 솟구치고, 놀란 물고기 떼가 코앞에서 휘몰아친다.

그 와중에 다시금 휘익- 하고 풍경이 바뀌더니 이번에는 모래가 가득한 사막에 떨어졌다.

“큭!”

그 와중에 할 수 있는 거라곤 꼴사납게 모래사장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낙법을 취하는 게 고작이었다.

가까스로 허공에서 몸을 틀어 양발이 먼저 지면에 닿도록 했지만 이불처럼 부드럽게 쌓인 모래산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빨아들이고야 말았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입안으로 모래가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김건은 별장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옷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진다. 젖은 몸에 달라붙은 모래가 온몸을 꺼끌꺼끌하게 만들고 있었다.

입안에 들어온 모래를 뱉어 낸 김건은 눈가에 달라붙은 모래와 머리카락을 치우며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

엉망진창이 된 남편의 모습을 본 한서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녀가 손을 털자 허공에서 바람이 일고, 몸에 달라붙은 수분이 움직여 한순간에 김건을 멀끔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한서리가 마력을 움직여 바닥을 더럽힌 물과 모래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자, 김건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웃고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렇게 놀리지 마. 평생 해 왔던 습관이자 마음가짐이라……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

한서리는 새침한 표정이 된 남편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너무 크게 방향을 틀으려 하니까 그러는 거야. 차라리 격투가라도 되어 보는 건 어때? 요즘 복고가 대세라,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는 격투기가 은근히 인기 있다고 하던데. 스포츠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전투는 놀이가 아니야.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고지식하긴.”

한서리는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흔들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부드럽게 고집쟁이 남편을 달랜다.

“이제는 무기 김건이 아니라, 인간 김건으로 살아야지.”

“……그 말을 들으니까 뭔가 기시감이 드는데?”

“당신이 먼저 한 거야. 배우자 갱생 프로젝트를 실행한 건.”

악동같이 웃는 아내.

그 모습을 보자 절로 너털웃음이 나왔다.

김건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심스럽게, 부풀어 오른 배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그럼 우선은…… 좋은 아빠가 되는 걸 목표로 할까.”

부드러운 말.

부드러운 손길에 한서리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그녀는 남편의 손등에 손을 겹치며 작게 속삭였다.

“쌍둥이야. 앞으로 두 달 정도 뒤면 나올 거야.”

“검사도 안 했는데, 정확하게 아네.”

“보면 알잖아. 이제 투시나 미래 예측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으니까.”

“쌍둥이라…… 일란성? 이란성?”

“이란성. 아들이랑 딸이야.”

“딱 좋네. 이름이라도 미리 지어 둬야겠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조용히 시간이 흘러갔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열린 창틀이 끼익끼익 울고, 커튼이 휘날리며 햇빛이 내비쳤다.

아까 마신 차의 향기가 아직도 주방에 남아 솔솔 피어오고 한서리가 올라탄 흔들의자의 그림자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너무나도 평온한, 나른한 분위기.

그 속에서, 김건이 문득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당신인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한서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웃으며 대답했다.

“질문이 애매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기린의 주인격이 되었잖아. 아그니스의 말로는 삼라만상을 다 깨닫게 된다던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서.”

되돌아온 이후 계속해서 관찰해 왔다.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아내가 기린의 주인격이 되었다고 하지만, 김건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어디까지나 그에게 아내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밖에 안보였다.

그저 막대한 능력을 지녔을 뿐, 어디를 봐도 이 세상에서 제일 신에 가깝다 하는 고등한 존재로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아내가 기린의 주인격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고등한 존재가 인간을 흉내 내고 있거나,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진짜 한서리가 아니거나.

그 질문에 한서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서 내 본체는 선계 저편에 있어.”

움찔하고 김건의 어깨가 떨렸다.

이제는 조금 더 솔직하게 스스로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된 남자의 눈에 공포가 감돈다. 김건은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당신은?”

“이것 역시 ‘나‘야. 마신들이 여러 인격을 가지듯, 나도 쪼개진 거지. 쉽게 말하자면, 한서리의 화신이라고나 할까?”

“그럼…… 진짜 당신은…….”

“걱정할 필요 없어.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여기 있는 것도 진짜 ‘나’니까.”

한서리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우는 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남편의 볼을 쓰다듬으며 진실을 말해 주었다.

“이건 다 당신 덕분이야. 지금까지 내가 당신과 쌓아 온 경험과, 기억…… 그것이 나라는 인격을 보존할 수 있게 해 줬어. 당신이라는 명확한 지향점이 있기에, 나는 이렇게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화신을 남길 수 있었던 거야.”

한서리는 웃었다.

“오히려 잘된 일일걸?”

“뭐가?”

“당신이 죽기 전까지 난 안 죽어. 설령 이 몸이 소실된다고 해도, 이게 본체가 아니니까 얼마든지 정보를 모아서 다시 복구해 낼 수 있거든. 다만 당신이 죽으면……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지향점을 잃어버려서 인간으로서의 나는 허공에 흩어져 버릴 거야.”

“그럼 당신 혼자서 무한하게 살아가게 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본체는 너무 크게 진화해 버려서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 내 의식이 기본 재료가 되긴 했지만 사실 그걸 키운 건 기린의 의지란 말이지. 편의상 본체라고 말할 뿐, 애초에 그건 기린의 주인격이지, 한서리라고 지칭할 수 없는 거야.”

한서리는 후후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니까 죽지 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

김건은 그녀의 말을 전부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아내라고는 확실히 인지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안도감이 찾아왔다.

“고의는 아니지만 정말로 일심동체가 됐네.”

한서리가 고개를 숙인다. 그는 의자 옆에 꿇어앉은 남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장난치듯이 말했다.

“그럼…… 우리 얼마나 살까? 당신도 육체가 인형이 되었으니까, 내가 유지 보수만 잘 해 주면 우주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살 수 있을 거야.”

“그건 좀…… 그 정도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럼 얼마나?”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아내가 보채 오자, 김건은 가볍게 그 말을 받아 주었다.

“글쎄, 그럼 일단 백 살까지만 살아 보고 생각할까?”

“백 세? 꽤 구체적이네. 왜 그런 숫자가 나온 거야?”

“백년해로라는 말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가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보기 드물게, 김건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쯤이면 우리도 서로한테 질려서 진절머리를 일으키고 있을지도 몰라. 알리시아 씨도 그랬다고 하던걸.”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왜?”

자신감 넘치게 부인하는 한서리에게 김건이 묻는다.

한서리는 웃었다. 그러곤 배에 얹어져 있는 남편의 손을 끌어올려 가슴에 안았다. 그에게 스스로의 온기를 전달하며 말했다.

“이미 억겁의 시간을 보냈는데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니까.”

언뜻 농담이나 과장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말.

하지만 아내가 겪었을 일을 아는 김건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탄식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한서리가 손짓을 취한다.

그 의미를 알아챈 김건은 몸을 일으켜 아내의 머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한서리는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김건을 올려다보았다.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럼, 답례의 키스.”

분명, 그것은 억겁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도 싼 것이리라.

하지만 김건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구애하는 아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 기대감이었으니까.

그리고 김건은, 그 사랑스러운 기대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