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70화
외전 9화 그때 그 사건 (9)
아무리 나무늘보라도 목숨이 위험해지면 동작이 빨라지는 법이다.
한서리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다리를 건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녀를 노리는 맹수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굶주려 있었다.
“캬아아아악!”
이 세계의 시체 청소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스캐빈저라는 별칭이 붙은 몬스터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며 한서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
한서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전에 스캐빈저를 무시하다가, 놈들에게 붙잡혀 뜯어 먹힌 사람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가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치더니, 까맣게 몰려드는 괴물 무리에게 둘러싸인 채 고깃덩어리로 변해 가는 모습은, 많은 경험을 거친 그녀도 진저리를 칠 만큼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근데 지금, 그녀 자신이 몸으로 그 꼴을 재현할 참이었다.
“제기랄……!”
아무리 애를 써도 놈들보다 빨리 절벽을 건널 수가 없다. 줄에 매달린 상황에서는 호위용 골렘을 소환할 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까지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공격 마법을 가지지도 못했다.
최악의 미래를 떠올린 한서리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내려앉는 그때, 그녀가 매달린 줄이 일정한 리듬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한서리가 그 진폭의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외줄을 곡예사처럼 밟으며 뛰어 오는 김건을.
타타타탓!
김건은 맨몸으로 가느다란 로프 위를 내달려 순식간에 한서리의 머리 위에 도달했다.
그는 놀라운 균형 감각을 발휘해 바람에 휘날리는 줄다리 위에 꼿꼿이 섰다. 그러곤 채찍을 꼬나쥔 채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스캐빈저의 무리를 쳐다보았다.
“빨리 가! 내가 막아 줄 테니까!”
그러면서 손을 떨치자, 번개처럼 쏘아져 나간 채찍의 끝이 맨 처음으로 날아들던 스캐빈저의 머리를 쳐 날렸다.
“케에엑!”
다행스럽게도 스캐빈저는 하나하나가 강력한 개체는 아니었다.
김건이 날린 채찍 한 방에, 총이라도 맞은 것마냥 괴물이 추락했다.
김건은 계속해서 채찍을 날려 가까이 다가오는 스캐빈저들을 쳐 냈다. 그가 전투를 벌이자 안 그래도 불안정한 줄다리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흔들렸다.
“꺄아악! 아악!”
그 무슨 놀이기구를 탄들, 지금처럼 스릴이 넘치진 않을 것이다.
줄다리가 출렁거릴 때마다 한서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도 마냥 누군가에게 보호만 받는 공주님은 아니었다.
좀 추하긴 했지만, 그녀는 여왕이라 불렸던 인물답게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팔다리를 놀려 다리를 건너는 것을 계속했다.
그렇게 한서리가 다리를 건너는 동안, 스캐빈저 무리와 격돌한 김건은 더욱 격렬한 움직임으로 싸움의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쫘아악!
공기를 찢고 날아간 채찍이 스캐빈저를 떨궜다.
채찍의 사거리를 뚫고 덤벼든 놈의 대가리를 호권으로 쳐 날리며, 정면으로 그를 들이받는 괴물의 공격을 막아 낸다.
독수리만 한 생명체의 돌격에 그의 몸이 줄다리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그대로 채찍을 날려 빠르게 머리 위를 스쳐 가는 스캐빈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것을 강하게 끌어내리며 허공에서 몸을 튕겨 올린다. 자신이 끌어 내린 탓에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괴물의 머리를 무릎으로 쳐 날리곤, 다시 한번 채찍을 뻗어 줄다리를 붙잡고 그네를 타듯이 원심력에 몸을 맡겼다.
휘이익!
줄다리를 기준으로 원형을 그리는 김건의 몸.
채찍의 끝을 놓은 그가 허공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순식간에 줄다리 위에 안착했다.
“후욱─!”
김건의 입에서 깊은 숨이 토해진다. 다시금 날아다니기 시작한 채찍이 연달아 스캐빈저의 머리를 떨궈 냈다.
단순한 힘이 아니라 정교한 기술과 몸놀림이 필요한 지금.
김건은 그가 가진 전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외줄 하나에 의지해 수많은 괴물들과 싸워 나갔다.
하지만 그 싸움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제자리에 멈춰 싸우는 김건. 그리고 계속해서 다리를 건너는 한서리.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자 김건을 내버려 둔 채 한서리를 향해 달려드는 스캐빈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캬악!”
그중 한 놈이 괴성을 지르며 한서리를 덮쳐 갔다.
“치잇……!”
그것을 발견한 김건이 혀를 차곤, 몸을 날렸다. 그대로 채찍을 날려 한서리에게 부리를 들이대는 괴물을 쳐 냈다.
짜악!
그의 공격은 적중했다. 하지만 그 처리가 조금 늦었고, 덕분에 균형을 잃고 떨어지던 스캐빈저의 몸이 로프에 걸렸다. 그렇게 줄에 걸린 놈이 사방으로 뾰족한 부리와 발톱을 날리며 난동을 피우자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줄다리가 순식간에 끊어졌다.
“으아아악!”
절반으로 끊어진 줄다리. 그중 한쪽을 붙잡고 있던 한서리가 비스듬하게 떨어지며 거세게 절벽에 어깨를 들이받았다.
“……!”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며 별이 반짝였다. 다행히 미리 걸어 둔 버프가 몸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도, 줄을 놓고 떨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한서리야 한쪽 끝을 붙잡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살았지만, 줄다리 가운데에서 싸움을 벌이던 김건은 상황이 달랐다.
그가 꼼짝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눈을 크게 뜬 한서리가 크게 외치며 바깥쪽을 돌아보았다.
“김건!”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공중에서 스캐빈저들의 무리와 뒤얽힌 김건이 보였다. 그의 발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김건의 눈에는 주변에 움직이는 모든 것이 발판으로 보인 것 같았다.
타타탓!
채찍이 용솟음친다. 남자의 몸이 번개처럼, 그리고 구름처럼 움직였다.
김건은 자신을 공격해 오는 스캐빈저들을 이용했다. 채찍으로 당기고, 발로 걷어차며 구름다리를 달려 건너듯, 사뿐사뿐 도약해 순식간에 한서리가 매달려 있는 절벽의 정상에 착지했다.
아니, 저게 사람의 움직임인가?
경악한 한서리가 입을 쩍 벌렸다.
“케엑!”
두 사람이 자신들의 영역인 공중을 벗어나자 스캐빈저들은 자신감을 잃은 듯했다.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 그들은 다른 먹잇감을 찾아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채찍을 둥글게 감아 갈무리한 김건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그는 그러면서 끊어진 줄다리의 반쪽을 붙잡았다. 한서리의 버프로 강화된 그는 쉽게 팔을 당겨 한서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
한서리가 겨우 지면에 발을 디딘다.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이후로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건만 그녀는 수십 킬로가 넘는 행군을 마친 사람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하아, 하! 제기랄, 죽는 줄 알았잖아……!”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휘청거리는 한서리를 김건이 부축해 주었다. 한서리는 김건의 허리에 매달린 채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간담이 약하군. 이 정도 일은 전장에서 일상인데.”
일상인 건 맞다. 하지만 뒤에서 진형을 조절하며 버프의 출력을 조정하는 것으로 싸움에 참여해 오던 한서리는 이 정도로 살벌하게 현장의 살기를 체감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한서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뽀로통한 얼굴로 김건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전위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당신들 신경 줄이 두꺼운 건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엄살떨지 마.”
김건은 그렇게 말하며 한서리를 떼어 내려 했다.
그때, 한서리가 말했다.
“잠깐만, 잠깐만 기대게 해 줘.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못 서 있겠어.”
그녀는 그러면서 나뭇등걸에 매달리듯, 김건의 상체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
한서리를 향해 뻗어 가던 김건의 손이 우뚝 멎었다.
몬스터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일 때도 긴장 한번 하지 않던 남자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지친 한서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한서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김건을 붙든 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다리의 경련이 잦아든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김건에게서 손을 뗐다. 아직도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 언저리를 두들기며 말했다.
“하아…… 시작부터 이게 뭐람. 미안해. 시간 낭비하게 해서. 이제 가자.”
그리고 그녀는 왠지 모르겠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는 김건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봤다.
이 무신경한 남자가 이토록 긴장하고 있는 건.
의아해진 한서리가 물었다.
“뭐 해?”
“……아니다.”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일언반구도 없이 먼저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
한서리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그 등 뒤를 따라갔다.
* * *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다.
절벽을 건넌 뒤로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일자로 정렬되어 있다. 파란색 하늘, 초록과 황색이 뒤섞인 땅. 그리고 그것이 맞닿아 만들어진 지평선. 언덕은커녕 나무 한 그루 보기가 힘들다.
이제부터는 마냥 걷기만 하면 된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서, 이미 지평선을 넘어가 있을 본대를 따라잡기만 하면 되었다.
말이 초원이지, 사막이나 다름없이 척박한 공간이라 주변에는 몬스터도 거의 살지 않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생명체가 드문드문 있는 오아시스와, 짧게 자라나는 풀로만 연명하는 게 가능한 작고 온순한 것들이었다.
할 일은 단순하다. 딱히 위험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지옥을 마주한 것은, 그저 그 할 일이 무지막지하게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헉! 헉!”
골렘을 타고 달리던 한서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뜨겁게 내려쬐는 햇볕, 그리고 건조한 공기 때문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력을 소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저 그 위를 계속 내달리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급속도로 소비되었다.
이미 김건이 준 보존 수프도 모두 마셔 버렸다. 그런데도 금방 목이 말랐다. 숨이 가빠 입으로 호흡을 하니 침도 더 빠르게 말라붙어 갈증을 가속화시키는 것 같았다.
각성제를 먹고 밤을 샌 탓도 있겠지만 한서리의 체력이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컸다.
41킬로그램.
근육도, 지방질도 없이 빼빼 마른 그녀의 몸에는 저장되어 있는 에너지가 거의 없었다. 거기에 이틀간의 야영 때문에 스트레스와 피로도 역시 극에 달해 부담을 가중시켰다.
“학, 하악……!”
입으로 숨을 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벌리지 않으면 숨이 막혀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따끔따끔하게 눈을 찔렀지만 그것을 훔칠 기운도 없다.
말라비틀어져 가는 한서리를 본 김건이 말했다.
“잠깐 쉬지.”
“하아─!”
한서리는 대번에 드러누웠다.
그녀는 행군에 익숙하지 않았다. 높은 직위에 있는 그녀는 대부분의 이동을 차량으로만 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지휘관으로서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평정을 가장했겠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보는 사람도 없고, 김건은 그녀의 행동을 떠벌리고 다닐 만큼 입이 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헉, 허억─!”
완전히 정신 무장이 풀어진 한서리는 숨을 할딱이며 온몸으로 힘들어 죽겠다는 것을 표현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타인에게는 그런 표현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김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만 출발하지.”
어…… 벌써?
“…….”
한서리는 바보 같은 말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눌러 참으며 침착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돼 먹은 건지, 방금 누운 것 같은데 벌써 정해진 휴식 시간인 10분이 지나 있었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하며 한서리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고, 쉬고, 달리고, 쉬고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원래라면 체력 안배를 했을 테지만 식수가 없기 때문에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온몸의 체력을 짜내어 오아시스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정점에 떠올랐던 해가 점차 기울어 갔다.
그리고 그것이 슬슬 지평선 끝을 향해 갈 때.
한서리는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느꼈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목이 탄다. 입안이 바짝 말라 침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마력이 빨려 나가서인지 단전이 있는 아랫배가 찌를 듯이 아팠다.
휴식 시간이 되었는데도 앉을 수가 없다. 한 번 앉아 버리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이제는 아까처럼 거창하게 숨을 들이켤 수도 없다. 살짝 입을 벌리고, 쌕쌕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지러웠다. 뭉툭한 무언가로 머리를 쾅쾅 치는 느낌이었다.
한서리는 소환을 해제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골렘에 매달린 채 눈을 깜빡였다.
물, 물 생각이 간절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시간 이동을 하며 체력을 소모한 탓에 더욱 빠르게 탈수 증상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김건이 다가왔다. 한서리는 살짝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한서리 자신에 비해서는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를 것이라고, 한서리는 생각했다.
김건은 계속해서 달렸을 뿐만 아니라 더 오랫동안 물을 입에 대지 않았다.
체력과 참을성이 좋아 티 내지 않을 뿐, 그 역시 여유로운 상태는 아닐 것이다.
말없이 다가온 김건은 허리춤을 뒤지더니 한서리에게 자신의 수통을 내밀었다.
설마 물이 남아 있나? 싶어서 한서리는 얼른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보려는 찰나.
“물 없어. 마시려고 꺼낸 거 아니야.”
사정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김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목이 엄청나게 아픈 데다 말 할 기운도 없었던 한서리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걸 뭐 어쩌라고?
인상을 쓰면서 눈을 찡그리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김건은 어렵지 않게 그 의도를 알아들은 듯, 이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거기에 소변을 담아 와. 아직 탈수 증상이 심하진 않으니까, 안 나오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