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72화
외전 11화 그때 그 사건 (11)
한서리는 찰팍거리며 손으로 호수의 물을 떠 올려 몸을 씻었다. 그러다가 슬쩍 눈을 돌려 김건을 바라봤다.
그동안 뭐든지 능숙한 모습을 보이던 김건이 시선 둘 곳을 모르고 헤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바보처럼 그러고 있지 마. 당신이 그러니까 나까지 의식하게 되잖아.”
“……미안하다.”
“씻고는 싶은데,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여기까지 와서 무방비로 있다가 죽고 싶지도 않고. 아까 나한테 소변을 내놓으라는 말은 쉽게 하더니, 이건 왜 그렇게 어색해하는데?”
“……그거랑 이거랑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않은가?”
“똑같아. 어쩌면 아까 당신이 나한테 시킨 짓이, 누군가한테는 알몸을 보이는 것보다 더 치욕적일 수도 있고.”
김건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서리는 새침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친구나, 동료 중에 여자가 없었어? 너무 눈치가 없는데.”
“레인저 중에는 없어. 장기 잠복이나 특수한 임무 등은 여자의 몸으로 수행하기 힘든 것들이 많으니까. 친구는 있었지만…… 전쟁이 터진 이후에 만난 거라 그렇게 많은 교류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나마도 얼마 못 가 다 죽었고.”
“아카데미에서는? 아카데미에서 연애하는 사람들도 많았잖아.”
“그때는 기술을 연구하느라 바빴어. 거기에 돈이 없어서 학비를 벌어야 해서 일도 많이 했고.”
“어지간히 지루한 인생을 살았네. 당신도.”
그래도 말을 몇 마디 나누자 어색하던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김건은 차분하게 주변을 살폈고, 한서리는 빠르게 몸을 씻어 냈다.
목욕을 한 뒤, 빨랫감을 널어 둔 두 사람은 판초로 대충 몸만 가린 채 피워 둔 모닥불 앞에 앉았다.
오는 도중 비상식을 조금 먹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 못했다.
운 좋게도 경계를 서는 와중 김건이 잡은 물고기가 있었기에 따로 식량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넙데데한 돌덩어리 위에 올려진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따뜻한 열기와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자 아침에 있었던 스캐빈저와의 혈투와, 하루 종일 이어졌던 지옥 같은 행군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자.”
김건이 단검으로 발라 낸 물고기의 속살을 잎사귀로 만든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고마워.”
한서리는 순순히 그것을 받았다.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속살을 입안에 넣고 씹는다. 쫄깃한 식감이 이빨에 걸리고, 살짝 녹아내린 기름이 혓바닥 위를 굴러다녔다.
“맛있어…….”
냉정하게 생각하면 정말 별것도 아닌 음식이건만, 그 순간만큼은 한서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번에는 김건도 꽤 많은 고기를 먹었다. 그가 마력 거부 반응 때문에 앓아눕는 모습을 봤던 한서리가 물었다.
“괜찮겠어? 배고픈 건 알겠지만 그러다 탈이 나면 어떻게 하려고?”
“오늘은 나도 체력 소모가 심했으니까. 충분히 지방과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못 버텨. 게다가.”
“게다가?”
“이 물고기는 먹어 본 적이 있어. 그때 먹었던 양은 기억하고, 딱히 문제도 없었으니까 비슷한 양을 먹는 건 괜찮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기를 씹어 삼켰다.
진짜로 이전에 먹었던 양을 기억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선에서 입에서 고기를 끊더니, 그다음에는 남아 있던 비상식량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조절을 하다니.
정말이지, 지독한 인간이라고 한서리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 자신도 그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긴 했지만 말이다.
얼추 배를 채운 한서리는 검댕으로 가득한 손을 뜯어 둔 수풀에 문지르며 말을 던졌다.
“이제 내일이면 본대에 도착할 것 같은데. 당신,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거야?”
“별생각은 없어. 원래 있던 레인저 팀으로 다시 들어가겠지. 단독 행동을 한 걸로 욕이야 조금 먹겠지만……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니니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이번 작전은 실패한 것 같고, 지구에서 며칠 쉬다가 다른 선계로 파견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은 별다른 목표는 없다는 이야기지?”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김건.
그것을 본 한서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면 당신, 내 밑으로 올 생각은 없어?”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쑤시던 김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의아한 눈을 한서리에게로 향했다.
“……무슨 소리야. 간부 중 한 명이긴 하지만…… 따로 당신에게 배속된 부대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 부대를 가지지 않았던 건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어. 내 빌어먹을 집안이 사고를 친 탓에, 난 신뢰도가 꽤 낮은 상태로 간부진에 들어갔거든. 내 직속부대를 만들어 봐야 견제만 당하고 피곤해지니까, 일부러 세력을 형성하지 않은거지.”
한서리는 웃었다.
“하지만 그 생활도 이제 끝났거든.”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타오르는 불을 바라본다.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가도, 난 다시 간부진에 들어가지 못할 거야. 이미 그들에게 버림받았으니까. 그들도 날 불편해할 테고, 나도 놈들이랑 웃으면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지 않아.
그러면 남는 건 두 가지야. 다른 간부의 밑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용병 노릇이라도 할 셈인가?”
김건의 물음에, 한서리는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세계인 지구는 마계의 침략에 의해 멸망해 가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조직과 인력이 통합되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종말에 맞서는 가장 큰 명령 체계 자체는 존재하나, 여전히 사람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개중에는, 오로지 자기자신만을 위해 움직이는 떠돌이 늑대 같은 자들도 존재했다. 지구의 상황상 직접적으로 자신들을 용병이라 지칭하진 않지만, 사실상 용병인 집단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한서리가 말했다.
“모아 둔 자금도 있고, 인맥도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팀을 꾸리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김건은 흠, 하고 콧소리를 냈다.
“괜찮을 거 같기는 하군. 영웅들 사이에서도 당신은 평이 좋은 편이니까. 계약 조건만 괜찮으면 충분히 사람들이 모일 거야.”
그렇게 말하자 한서리는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이 좋다고? 내가 좀 깐깐한 스타일이니까, 대부분은 싫어할 줄 알았는데.”
“좋아. 일단은 병신 같은 명령으로 아군을 전멸시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성격이 좀 까다로운건 상관없어.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지휘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호불호보다 능력을 더 중요시한다고.”
“……그래? 어딘가의 누구들과는 다르네.”
한서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간부들은 한서리를 버림패로 써도 된다고 판단했다. 그들 입장에서 한서리 자신은, 그저 잔소리만 많은 방해물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밑의 사람들에게는 평이 좋은 편이라니.
그건 위와 아래의 사람들의 생각에 간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어쩌면, 멸망의 시기가 가까워졌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서리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고민을 하던 그녀는 문득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의 김건을 발견했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김건은 아까 경계를 섰을 때처럼 상당히 미적거리더니, 겨우 입술을 떼었다.
“네 평이 좋은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게 뭔데?”
“……다들 네 생김새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더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한서리는 의아해서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김건은 한참을 뜸을 들였다. 답답해진 한서리가 입을 열려는 참에,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하는 이야기다. 대부분은 네가, 예쁘게 생겨서 좋다고 하더군.”
피식.
한서리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녀는 킥킥 웃었다.
“난 또 뭐라고.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당연히 외모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야.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쪽에서 내게 메리트가 있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계산에도 포함되어 있고.”
“이미 알고 있다니 잘됐군. 쓸데없는 소리였다.”
서둘러 이야기를 마치려 하는 김건의 태도를 한서리가 감지했다.
그녀의 입가에 지금까지 없던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은 왜 한 거야?”
“…….”
대답하지 않는 남자.
한서리는 느물느물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혹시,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풀어 주려고 한 말이야?”
“그건 아니야.”
김건은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한서리의 눈에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서 슬쩍 떠보는 말을 던졌다.
“그럴 필요 없이, 당신이 내 팀에 들어오겠다는 말만 해 주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것 같은데? 당신, 꽤 쓸모가 있어 보이거든. 힘이 없는 거지, 기술이 없는 게 아니니까. 내 기술이랑 상성도 잘 맞고. 성격 답답한 것도 마음에 들어. 어딘가에 매수될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아서 좋아.”
“생각은 해 보지.”
김건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닫았다.
일부러 대화를 피하려 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철부지 어린애 같아서 한서리는 계속해서 웃는 낯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김건은 그 시선조차 거북한지 슬쩍 엉덩이를 돌려 아예 바깥쪽을 바라보도록 몸을 돌려 버렸다.
‘부끄러워하긴.’
어떨 때는 노인 같기도, 어떨 때는 아이 같기도 하다.
이제야 김건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좀 알게 된 것 같아서 한서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숨어 있던 장난기가 동한다. 문득 좋은 질문거리가 생각났다.
‘당신은 관심 없어? 내 외모에?’
그 말을 하면 꽤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지만 어쩐지 말문이 막혀서, 한서리는 끝까지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 * *
다음 날, 두 사람은 새벽부터 강행군을 시작했다.
이전 날의 일로 그냥 버프를 건 김건이 한서리를 업고 달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그날도 똑같은 방법으로 장거리를 달렸다.
해가 떠오르고, 그것이 하늘 꼭대기로 솟아오르는 동안 점점 초원의 수풀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끝없던 지평선이 우뚝 솟은 산과 언덕, 그리고 나무들로 채워져 갔다.
초원과 숲의 경계. 삭막한 초원의 끝점이 되자 점차 눈에 보이는 생물의 숫자가 늘어났다.
공룡족이라고 모든 생물이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서운 괴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군데군데 솟아 있는 나무 때문에 사각도 있다. 언제 무슨 괴물에게 기습을 당할지도 모르니, 두 사람은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 속도를 줄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오늘 이 시점에 본대가 머무르기로 한 포인트에 도착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최대한 먼 곳을 살펴보던 한서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쯤이면 슬슬 본대의 깃발이 보여야 하는데…… 안 보여.”
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초를 서는 사람도 안 보인다. 아무도 없어.”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한다. 한서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발을 멈췄다.
“더 이상 가 봐야 소용없어. 본대는 이곳에 없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신의 예측이 틀린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초조해진 한서리가 잘근잘근 입술을 씹는다. 예상외의 상황에 그녀가 고민하고 있자 김건이 말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와도 되겠어?”
“왜?”
“뭔가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실히, 지금은 정보가 필요하다.
한서리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김건은 금방 어딘가로 사라졌다.
김건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와 말했다.
“당신 예측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닌 것 같아. 본대가 이동한 흔적이 있어.”
그는 한서리를 흔적을 발견한 장소로 이끌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별다른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바닥에 찍혀 있는 차량의 바퀴 자국. 길을 만들기 위해 베어 둔 나무둥치. 사방에 깔려 있는 수많은 발자국.
누가 보더라도 인간들의 무리가 지나갔다는 흔적이 숲의 외각에 새겨져 있었다.
김건이 차량에 긁힌 나무줄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오래 지난 건 아니야. 어제쯤에나 지나간 걸로 보이는데.”
“그러면 내가 계산한 위치가 맞다는 거야…… 그런데 왜 깃발 같은 게 안 보이지?”
“일단은 예정대로 가 보지. 포인트에 도착하면 뭔가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게 좋겠어.”
합의를 본 두 사람은 본대가 지나가면 남긴 흔적을 따라서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완연히 짙어진 수풀을 젖히고 빠져나오자 갑자기 시야가 크게 트였다.
그리고 보인 광경.
“염병할.”
“…….”
한서리가 욕설을 내뱉는다. 김건이 침음성을 삼켰다.
누가 봐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숲 속의 공터.
그리고 그곳에는 부서진 차량, 그리고 인간과 괴물들의 시체가 타는 냄새를 내며 굴러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