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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75화 (175/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75화

외전 14화 그때 그 사건 (14)

브라키오.

넙데데한 몸뚱이에 짤막한 네 다리. 그리고 긴 목을 가졌다.

언뜻 보면 납작한 넙치에 기린의 목을 달아 놓은 것 같은 기이한 생김새다.

육식은 하지 않고, 긴 목을 이용해 높게 자라 있는 나무의 잎사귀를 하루 종일 뜯어 먹기만 하는 온순한 생물.

하지만 그것은 보통 때의 이야기.

브라키오는 이 선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룡족 중 하나였다.

브라키오의 등딱지에 붙어 있는 발광판이 발열하기 시작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재질로 이루어진 등껍질.

거기서 발생한 빛이 긴 목에 듬성듬성 자라 있는 골판을 타고 오르다 이내 머리 위에 집결.

길게 솟아 있는 뿔에 번갯불이 반짝였다.

─────!!

소리 없이 뿜어진 푸른색의 광선이 애꾸의 몸에 직격했다.

“……!”

비늘을 태우고 살을 녹이는 고열에 애꾸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하나, 둘, 셋, 넷…….

무리에 속한 브라키오들이 준비되는 대로 애꾸를 향해 광선을 발사해 갔다.

인간 입장으로 치자면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몸을 지지는 격이라고나 할까.

즉사할 위력은 아니지만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공격이 연달아 애꾸의 몸에 꽂혔다.

“카아악! 크아아아아아악!”

애꾸의 온몸에서 치이익- 살 녹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김건의 유도에 이끌려 새끼를 공격하게 된 놈이 브라키오 무리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 내며 몸부림쳤다.

애꾸의 추격이 멈췄다. 브라키오들의 시선 역시 사라졌다.

“가자!”

브라키오 새끼의 배 아래에 붙어 있던 김건이 한서리의 손을 붙잡고 빠져나왔다. 한서리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것을 돌아보며 물었다.

“새끼는? 내버려 둘 거야?”

“우리한테나 치명적이지, 덩치가 큰 공룡족한테까지는 아니야! 며칠 고생하면 나을 거야!”

그렇게 외친 김건이 다시금 한서리를 업었다. 채찍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고, 김건이 발을 박찼다.

방금 했던 것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원숭이처럼 뛰어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애꾸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 * *

지구로 귀환할 게이트는 무성한 숲속 가운데에 있었다.

본대가 남기고 간 흔적을 뒤쫓으며 김건이 숲을 내달린다. 그의 등에 업힌 한서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숲의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따돌린 건가?”

“그러길 바라야지.”

그렇게 대답한 김건이 숨을 들이켰다. 혹시나 더 있을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그리고 앞서 간 본대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 질주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리는 김건 대신 오감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하던 한서리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저기!”

무성한 수풀과 나무의 위. 한서리가 가리킨 곳에 높게 서서 펄럭이는 깃발이 있었다.

그것은 혹시나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간의 조난자와 실종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설치된 본대의 표식이었다.

김건 역시 그것을 발견했다.

치지지지직!

바닥을 긁으며 발을 멈춰 세운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자라도 전력 질주라는 것은 그리 오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시간에 많은 거리를 주파하기 위해 많은 체력을 소모한 김건이 숨을 토해 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며칠간의 고된 일정으로 그 역시 피로가 상당히 누적된 것 같았다. 제 발로 선 한서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괜찮아? 더 이상 달리기 힘들면, 나머지는 내 아이스골렘을 타고 가자.”

김건에게 건 최고 출력의 버프를 장시간 유지한 탓에 마력도, 체력도 넉넉지 않았지만 한서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계속해서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며 고생을 한 것은 김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회복할 수 있어. 잠깐만 쉬었다 가자고.”

“그래.”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직 물이 남아 있는 자신의 수통을 김건에게 건네었다.

김건은 고맙다는 듯이 수통의 물을 마시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휴식을 취했다.

한서리는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고 쉬었다.

“…….”

그녀는 살짝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더 멀어지긴 했지만 본대의 깃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정말로 이것도 끝이 나는구나.

요 며칠간의 여정이 짧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서리는 김건을 돌아보며 웃었다.

“고생했어. 바보 같은 여자 한 명 구하려다가.”

김건이 흘끗 눈을 들어 한서리를 쳐다본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을 위해서 한 게 아니야. 날 위해서 한 거지.”

그건 무슨 소리인가.

한서리의 눈썹이 조금 떨렸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김건을 바라보았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고?”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슬럼프에 빠졌다고 이야기했었지? 그래서 원래 잘 쓰던 걸 제대로 못 쓰게 됐다고.”

“그 말도 안 되는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는 기술 말이지.”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한서리도 안다.

진동을 이용한다는 기술.

물속에서 적을 탐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소리를 전달하며 심지어는 소변에서 오염 물질을 분리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응용이 가능할 정도다.

한서리는 그것을 가능케 하려면 대체 어느 정도로 세밀하게 마력을 제어해야 할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김건이 말을 이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난 그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어.”

“그래서, 완성은 했어?”

“그래. 하지만 막상 완성하고 나니 기분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더군.”

“…….”

그건 한서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평생을 타인에게 이끌려 살아온 그녀가, 평생을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궁금증은 있었다. 자신과는 다른 목표를 찾으며 살아온 사람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한서리가 물었다.

“……왜?”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별건 아니야. 막상 완성하고 나니, 대체 내가 이걸 완성하려고 지금까지 왜 그 난리를 쳤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그 기술을 완성하는 것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었던 건 아니야? 세계 제일의 전사가 되고 싶다던가…… 뭐 그런 거.”

“그런 목표는 없었어. 이런저런 핑계는 만들어 뒀었지만 막상 만들고 나니까 알겠더군. 난 그저, 조상님과 아버지가 내게 물려받은 기술을 완성시키고 싶었을 뿐이야.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말한 그것을, 가능으로 만들어 보이고 싶었어.”

김건은 자조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쉬운 기술이 아니거든. 그것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하니까…… 점점 실력이 떨어지더라. 그리고 이제는, 실전에서는 도저히 써먹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김건. 그러던 그의 눈이 문득, 한서리를 향했다.

“그때 당신이 보인 거야.”

“나?”

“그래, 조작된 제비를 뽑고는 도축장에 끌려온 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당신 말이야.”

내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희생양으로 버려지는 건 싫지만, 남들 앞에서 모자란 모습을 보이는 건 더 싫다.

분명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한서리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김건이 피식 웃는다. 그는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무술가의 집안에서 자랐지. 어렸을 때부터 무술이라는 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배워 왔어. 그때 그 기억이 되살아난 거야.”

남자의 말에 생기가 감돈다. 그의 눈이 별빛처럼 번쩍였다.

“내 기술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 그리고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본분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의 의도를 깨달은 한서리가 물었다.

“그래서, 날 지켜 주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냥 나 자신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래도 고마운걸.”

한서리가 말했다. 푸른 머리칼과 푸른 눈망울을 가진 여자가 김건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날 도와주고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 설령, 그 선택이 당신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

침묵이 흐른다.

잠잠하게 깔린 무언의 공기 속에서 무너졌었던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훗.”

정적을 깬 것은, 한서리의 웃음소리였다.

“그래서, 슬럼프는 빠져나온 것 같아?”

김건 역시 웃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조금 나아진 것 같기는 한데, 실전에서 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 자신이 없어.”

“그러면 잘됐네.”

“잘됐다고?”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은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거니까. 어제 말했던 것처럼 내 팀에 들어와. 그리고 내 호위를 맡아 줘.”

“……호위를 맡아 달라고?”

“무언가를 지키는 것이 본분이라며? 날 지켜 달라는 소리야. 그렇게 하다 보면 무언가가 보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한 한서리의 얼굴에 문득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내가 지킬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당신에게 증명해 보여야겠지만 말이야.”

“…….”

“뭘 주면 날 지켜 줄래? 돈? 아니면 명예? 뭐든 말해. 한물 가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 있어. 당신이 원한다면, 어지간한 건 다 얻을 수 있을 거야.”

김건은 고민했다.

“나는…….”

그러던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김건이 발작적으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일어나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고 있던 한서리를 밀쳤다.

“……!?”

나동그라진 한서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김건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발견했다. 어느 샌가, 그녀의 어깨에 뾰족한 가시가 자라나 있다는 것을.

“어…….”

한서리가 어디선가 날아온 가시가 자신을 관통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가시가 꽂힌 어깨를 중심으로 핏줄이 불거지며 푸른 기운이 퍼지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재빨리 움직인 김건이 허리춤에서 꺼낸 해독제를 한서리의 팔뚝에 주입하자 푸른 기운의 확장이 멎었다.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상비약의 약효로는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제대로 된 치료를 위해선 이 선계에 대한 마법 및 화학 작용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으, 아…….”

통증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한서리가 팔을 붙잡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그런 그녀의 앞을 김건이 가로막았다.

채찍을 꺼낸 그는 팽팽하게 잡아당긴 그것을 이용해 수풀을 꿰뚫고 날아온 가시를 쳐 냈다.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고통이 가득한 울림이 등줄기를 섬뜩하게 만든다.

파스스스, 수풀이 뒤흔들리고 그 안쪽에서 커다란 몸집이 빠져나왔다.

탄내가 났다.

하얗던 비늘이 온통 검게 타고 피멍으로 물들어 엉망진창이 되었다. 녹아내린 지방이 진물과 함께 뚝뚝 떨어진다.

지쳐서 벌어진 주둥이에서는 쌕쌕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침이 흘러내렸다.

나타난 것은 애꾸였다.

브라키오 무리의 광선 공격에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머리가 반쯤 녹아내렸고 온몸은 화상과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크르르르…….”

하지만 한쪽뿐인 놈의 눈에 어린 살기는 그대로였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 굶주린 호랑이가 제일 흉폭하다.

짐승이라는 것은, 목숨의 위협을 느낄 때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지금의 애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하다.

그 앞을 막아선 김건이 말했다.

“버프 걸어. 최대로.”

“윽…… 윽…….”

신음 소리를 흘리면서 한서리가 버프를 걸었다. 하얗게 떠오른 서리가 김건의 몸을 감쌌다. 지독한 고통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져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쿵저러쿵 따질 때가 아니었다.

버프의 출력을 확인하며 김건이 말했다.

“그리고 가. 치료 못 받으면 죽어. 본대에는 의사가 있으니까. 정신이 있을 때, 아이스 골렘을 타고 달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격하게 숨을 들이켠 한서리가 내뱉었다.

“싫어……! 돌아가려면, 같이, 가……! 힘을 합쳐서, 저 새끼 죽여 버리면 되잖아!”

“우리끼리 다투고 있을 시간 없어. 조금만 더 늦어도 당신은 죽어.”

“그래도……!”

“날 믿어. 어차피 당신이 구사 가능한 공격은 대부분 안 통해. 그리고, 내가 죽어서 당신을 살리겠다는 게 아니야.”

김건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의지가 담긴 목소리는 삶을 포기한 사람의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이놈을 죽이고 당신을 쫓아갈게. 그러니까 가. 당신을 지키지 못한 걸 내게 후회하게 만들지 마.”

“……!!”

한서리가 이를 악물었다.

김건의 말은 옳았다. 그녀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 어……!”

한서리가 손짓하자 응집된 마력이 형체를 갖추더니 아이스 골렘 한 기가 지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본 애꾸가 살짝 고개를 물리며 경계하는 기색을 취했다.

한서리는 아이스 골렘을 조작해 자신을 업게 하며, 김건의 등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따라와야 해! 반드시!”

아이스 골렘이 뒤돌아 달렸다.

한서리의 모습이 수풀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김건은 홀로 서서 복수심으로 불타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날 죽이고 싶겠지?”

김건은 자세를 잡았다. 양쪽으로 쥔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떨리는 소리를 냈다.

“잘됐어. 나도 널 죽이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떠오른 것은 사나운 미소.

“덤벼. 여기서 끝을 보자.”

김건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

그 동작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인지, 애꾸가 온몸의 갈기를 곤두세우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발톱이 지면을 박차며, 상처투성이 짐승이 돌격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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