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79화
외전 18화 우리 엄마는 한량 (2)
게임을 접는다는 말에, 나탈리아는 펄펄 뛰었다.
“에에? 안 돼요! 우리 길드에 언니 한 명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왜 없어요! 게임 파괴자라는 둥, 성격 파탄자들만 모인 사이코패스 집단이라는 둥, 온라인상으로 온갖 욕은 다 먹고 다니는데! 지금이야 언니가 똑바로 방향성을 잡아 주니까 괜찮지만, 여기서 언니가 빠지면 그냥 게임에서 깽판만 피우고 다니는 쓰레기들 되는 거라고요!”
목소리가 꽤 절박했다.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한서리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다른 사람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오늘, 우리 딸내미한테 게임 폐인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아, 그건 좀…….”
그 말을 듣자 나탈리아도 기세가 죽었다.
한서리는 애끓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학교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애들 엄마들보다 못생겼다는 소리까지 들었어!”
“……어, 그게, 음.”
어쩐지 나탈리아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남의 기분을 맞춰 주는 데에는 도가 튼 녀석이라, 바로 괜찮다고 말해 줄 줄 알았는데.
한서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뭐야, 설마 너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거야?”
“에이~ 아니에요~. 언니가 얼마나 예쁜데.”
곧바로 부정하지만 이미 말투에서 지어 낸 말이라는 것이 티가 났다.
한서리는 차갑게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음~ 으으음~ 그러니까 그게…….”
계속해서 말꼬리만 늘리는 나탈리아.
녀석의 콧소리를 듣고 있자니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이 금세 한심해졌다.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말하지 마. 이 지지배야.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다 알겠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자 겨우 나탈리아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잠깐 한숨을 쉬고 말했다.
“못생겨졌다, 뭐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다만 요즘 좀 풀어졌다는 느낌은 있어요. 제가 맨 처음 언니가 차려입고 나온 걸 봤을 때 어떻게 생각한 줄 알아요? 어디 유명한 재벌 집 딸인 줄 알았어요. 아니면 무슨 왕족의 후예라던가.”
“…….”
“그런데 요즘 보면 그냥 동네 아줌마들처럼 하고 다니잖아요. 언니 예쁜 건 아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보면 무뎌진다고요. 같이 사는 가족이면 생김새보다는 차림새나 평소 행실로 판별하는 경향이 강해지니까…… 못생겼다는 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특히 애들 입에서는.”
평소에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그래도 사람 볼 줄은 아는 녀석이다.
나탈리아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한서리의 표정이 당장에 심각해졌다. 그녀는 마우스를 조작해 채팅방의 나가기 버튼으로 커서를 가져갔다.
“……일단 뒤처리는 알아서 해. 난 간다.”
“아! 그런데 진짜 게임 접을 거예요? 그러지 마요~ 지금까지 같이 잘했잖아요~.”
“몰라. 제기랄, 지금 너희들한테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자동 사냥은 제가 돌려 둘게요. 그러니까 언제든 다시 들어와요~!”
능글맞게 상황을 넘기려 하는 나탈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서리는 채팅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시간을 확인한 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외출복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 * *
집 밖으로 나온건 간만이었다.
푸스스한 머리칼을 정리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는 한서리. 그리고 그녀가 찾아간 곳은 김건이 일하는 학교였다.
정오를 지나 해가 꽤 기울어 있는 시간대였기 때문에 이미 정규 수업은 끝나 있었다.
학교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복도를 지나, 교무실 안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다음 날 사용할 교육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김건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김건이 이쪽을 돌아봤다. 한서리는 말없이 얼른 나오라는 듯 손짓만 해 보이고선 교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무슨 일이야?”
일을 마친 김건이 나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서리는 의아해하는 김건의 손을 잡아끌었다.
“할 말이 있어. 따라와.”
그녀가 김건을 끌고 간 곳은 디저트집이었다. 그들 가족들이 자주 배달을 시켜 먹곤 하는 단골 가게다.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건넨 한서리는 말없이 자리에 가서 앉았고, 김건은 피식 웃으며 카운터에서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를 주문했다.
한서리의 블랙 카드가 있었지만 김건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것을 스스로가 일해서 번 돈으로 처리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김건은 그가 일해 번 돈이 들어 있는 계좌로 결제를 마쳤다.
그건 어떻게 보면 한서리의 노림수였다.
그냥 사 먹는 거랑, 남편의 시간과 노동의 결과물로 산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특히 먹을 것의 경우에는, 후자의 것이 훨씬 더 각별한 맛을 지닌다는 것을 한서리는 알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주문한 디저트가 나왔다.
이 집은 아이스크림이 맛있다.
한서리는 말없이 남편이 사 준 아이스크림을 수저로 떠먹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뭔가 일이라도 해야 하나? 요즘 무료하긴 한데.”
마음이 통한 배우자라는 건 이래서 좋다.
앞뒤 없이 툭 뱉은 말이었지만, 김건은 한서리가 무슨 의도로 그 말을 한 건지 바로 이해한 듯 웃었다.
“무료한 거 맞아? 한창 재미있게 즐기는 것 같던데. 당신이 뭔가에 그렇게 몰입해서 하는 건 처음 봤어. 그 대상이 게임이긴 하지만.”
한서리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그녀는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재미있단 말이야.”
“하루 종일 몬스터만 때려잡는 게? 아니면 사람들을 제한없이 괴롭히고 다니는 게?”
“둘 다야. 생각없이 시간만 투자해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난다는 걸 참을 수가 없어. 까부는 놈들을 뒷일 생각하지 않고 죽이고 다녀도 문제가 없다는 것도 좋고.”
김건은 아내가 어떤 식으로 게임을 즐기는지 떠올려 보았다.
게임 속에서의 한서리는, 그야말로 폭군이었다.
모든 행동의 결과가 ‘죽인다.’ 로 이어진다.
몬스터는 당연히 죽이는 것이고, 그 대상에는 플레이어들도 포함되었다.
적이니까 죽이고, 까불면 죽이고, 마음에 안들어도 죽인다.
그냥 죽이고 끝이 아니다. 조금 심기가 불편하다 싶으면, 다른 사람들의 손까지 빌려 24시간 추적해 가며 찾아가서 죽였다.
그들이 게임을 그만둘 때까지 말이다.
게임 내의 이권이 집중되어 있는 사냥터 따위를 통제하며 갑질을 하는 것은 일상에, 점령한 지역의 세금을 시스템에서 설정 가능한 최대치로 올린 뒤 사람들의 원성을 듣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악마를, 게임이라는 우리 안에 풀어 놓은 느낌이다.
김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런 종류의 게임들이 게임상에서의 능력을 게임에 투자한 비용에 비례하게 설정해 두다 보니 한서리가 더욱 쉽게 날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지금은 용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 및 인간들과 교류를 시작한 그린스킨, 기가스들이 감사 및 존경의 표현으로 기린의 주인격인 그녀에게 각 종족들이 가진 공금 계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조 단위로 거래가 오가는 계좌이니, 평범하게 사는 개인 입장에서는 무한에 가까운 자금이다.
한서리의 폭주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 폭주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오히려 게임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물고기들끼리 놀라고 호수를 파 놨는데, 어디선가 들어온 이무기가 물고기를 다 잡아먹고 물을 튀기고 다니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전에 찾아온 게임사의 사람이 제발 그만해 달라고 무릎까지 꿇었을 때는 진지하게 아내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통이 큰 아내는 그때도 그냥 넘쳐흐르는 돈을 써서 그 입을 다물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서리는 그런 것 보다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무시를 받았던 것이 더 크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잔뜩 뿔이 나서는,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대체 내가 왜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당해야 해? 난 화신이야! 보통 화신도 아니고, 기린의 주인격이라고! 이 세상이 멀쩡하게 굴러갈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인데! 감히 어떤 년이 유미를 홀린 거지? 찾아가서 혼 좀 내 줄까?”
공개된 장소에서 큰 목소리로 떠들 말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목소리를 차단하는 마법 따위는 숨 쉬듯이 펼칠 수 있는 데다가, 한서리는 이미 무소불위라는 말이 어울리는 능력을 손에 넣었으니까.
김건은 피식 웃었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
가볍게 아내의 말을 받아 준 그는 평온한 기색으로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만약, 비슷한 어조의 말을 그가 가르치는 아이나, 재하, 유미가 했다면 혼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를 혼내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유미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도,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당신 덕이긴 해. 모두에게 알릴 수 없지만.”
“…….”
“그래도 그걸 아는 내가 여기 있잖아. 당신은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좀 편하게 살아도 되지. 너무 좋은 엄마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애들이 삐뚤어지지 않도록 키우는 건, 내가 확실히 할 테니까.”
부드러운 목소리.
그것을 듣고 있자니 언제까지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라고……!!”
한서리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아침에 유미가 보였던 것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당신 탓이야! 당신이 맨날 오냐오냐만 해 주니까……!”
그렇게 울분을 토한 한서리는 화풀이하듯 아이스크림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내가 잘못했어.”
김건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덜어 한서리의 컵에 넣어 주었다.
한서리는 누굴 먹보로 아냐는 듯 찌릿, 김건을 흘겨보았지만 그녀의 손은 충실히 남편이 덜어 준 아이스크림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서리가 두 사람분의 디저트르 다 먹어치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비어 버린 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뭔가 하긴 해야겠어. 당신이 괜찮다고 해도, 애들한테 마냥 한 사람 몫도 못하는 백수 취급받기는 싫어.”
김건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도 뭔가 하는 게 좋다고는 생각해. 게임도 좋지만…… 아무래도 집에만 있다 보면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니까. 심신 양면에서 안 좋아. 일을 하다 보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거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기 관리도 되겠지.”
“그런데 뭘 할지 잘 모르겠어.”
그게 한서리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뭔가 할 생각은 들었는데, 막상 하자니 할 만한 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김건이 먼저 의견을 내 주었다.
“가볍게 가게라도 하나 차려 보는 게 어때? 당신 사업수완이야, 익히 알고 있으니까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테고.”
“싫어. 요즘 길드 관리하는 것만 해도 귀찮아 죽겠단 말이야. 돈 관리도 지겹고, 사람 관리는 더더더욱 싫어. 사업과 관련된 건 안 할래. 한다고 하면,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안 해 봤던 걸 해 보고 싶어.”
한서리가 일을 찾는 것은 어떠한 수입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건이 다시 한번 말을 던졌다.
“그러면 어디 회사에라도 가 보는 건 어때? 평범한 직원으로 일해 본 건 한 번도 없을 거 아니야.”
“누구한테 명령 듣는 건 더 싫은데…….”
사장은 하기 싫고, 사장한테 한소리 듣기는 더 싫은 모양이다.
그럼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김건은 멍청하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김건은 순발력이 있었다.
그는 금방 다른 직업들을 찾아내 한서리에게 제안해 보았다.
“그러면 예술 쪽은 어때? 가수라던가, 화가라던가.”
“흐음…… 그렇게 딱히 끌리는 느낌은 없는데.”
정말이지 까다로운 여왕님이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어떤 건 관심이 없으니.
그런 아내의 투정에, 김건은 난감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