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80화
외전 19화 우리 엄마는 한량 (3)
한서리도 자기 자신이 꽤 성가신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꼼지락거렸다.
“이런 거, 어렸을 때도 고민해 본 적 없어.”
김건은 웃었다.
“고민하는 게 좋은거야. 선택지가 있다는 말이니까.”
“그건 맞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인생은 거의 운명에 이끌리다시피 살아왔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세계가 멸망하거나 했으니까.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김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봐. 애들 변덕에 휘둘릴 필요는 없으니까.”
아침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김건은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한서리는 괜히 심술이 나서 물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어른스러운데? 당신도 애들 키워 본 적은 없잖아?”
“글쎄, 도장을 운영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애들 상대는 많이 해 봤으니까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어깨를 으쓱이는 김건.
그는 그러면서 한서리의 어깨를 짚었다.
“돌아가자. 곧 식사 시간이니까.”
* * *
모두가 집에 돌아왔다.
“…….”
한바탕 사건이 있었더니 분위기가 어쩐지 붕 떠 있다.
아침의 일로 김건에게 주의를 들은 유미는 조금 우울한 기색이었다.
유미는 언제나 침착하고 올곧은 아빠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김건에게 혼이 나면 금세 주눅이 들곤 했다.
“자. 이건 유미 꺼.”
“와! 함박스테이크다!”
하지만 미리 그런 상황을 예측한 김건이 저녁 식사를 전체적으로 유미의 입맛에 맞추어 꾸몄다.
그리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물으며 가볍게 몇 마디 칭찬을 섞어 주었더니 유미는 금세 기운이 살아나서 눈이 똘망똘망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유미가 재하에게 다가갔다.
“체스하자!”
넙데데한 체스판을 끌어안고 그렇게 말하자, 재하는 단박에 싫은 표정을 지었다.
“……싫어. 맨날 네가 이기잖아.”
“기물 몇 개 빼 줄게! 같이 하자!”
“귀찮은데…… 그냥 패드로 온라인 매칭 돌려.”
“다른 사람들이랑 하면 재미없어. 응? 오빠아앙!”
“이럴 때만 오빠지…….”
원래 유미는 재하에게 체스하자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재하가 체스를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재하는 유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랭킹 점수가 오르고 나서는 지는 판이 늘어나서 그러는 거지.’
최근에 유미는 급격하게 실력이 늘었다.
신이 나서는 온라인 매칭에서 날뛰고 다니더니, 점수가 쭉쭉 올라서는 근래에는 아마추어로서는 최고봉, 프로 기사에 준하는 사람들과 매칭이 잡히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지는 판이 늘어났고, 그러다 보니 잃어버린 자신감을 충전하기 위해서인지 한참 하수인 재하에게도 종종 체스를 권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화풀이용 샌드백이 되어 달라는 소리였다.
이럴 때 의지가 되는 건 한서리밖에 없다. 한서리는 프로급 실력을 갖춘 데다가 접대 게임에도 능숙해서 금세 유미의 기분을 맞춰 주었기 때문이다.
“엄마…….”
재하는 도와 달라는 듯 엄마를 바라보았지만 한서리는 뭔가 고민에 빠진 듯, 멍하니 식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저녁시간 때부터 계속 저 상태다.
아무래도 아침에 유미가 한 말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재하는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김건과 눈이 마주쳤다. 김건이 입 모양만 가지고 말했다.
‘주말에, 영웅 공원 데려다줄게.’
재하는 영웅을 동경하는 아이였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별도 반에 편성되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한 조기 교육을 받고 있었다.
게이트의 발생 건수는 줄었지만 선계 통합으로 인해 타 종족들과 뒤얽혀 살게 되었기에 지구에서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한 혼란한 시기에 치안을 바로잡는 것이 바로 영웅.
재하에게 영웅은, 온갖 범죄자들과 사악한 타 종족을 제압하는 멋진 사람들이었다.
김건의 회유책이 먹힌 모양이었다. 유미를 돌아본 재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딱 한 판만이야.”
“한 판은 너무 적어! 다섯 판은 해야지!”
“……세 판. 더 이상은 양보 못해.”
“이이잉!”
아이들은 투닥거리면서도 서로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웃으며 아이들을 지켜보던 김건은 두 사람이 자리를 잡는 걸 확인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서리는 그 뒤로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러다 날 새겠다 싶어서 철썩철썩 자신의 뺨을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몫인 설거지와 주방의 뒷정리를 마친 뒤, 김건과 마찬가지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하곤 그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은 두 사람의 침실 겸 개인 공간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꽤 넓었다.
한서리는 모니터도 많이 사용하고 각종 장비들이 많아 별도의 방에 컴퓨터를 놓았지만 김건은 안방에 자신의 컴퓨터를 두었다.
김건은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아 웬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두 남자가 링 위에서 글러브를 끼고 박투를 벌이고 있었다.
요즘 인기몰이 중인 컨텐츠, 마력 제한 격투기의 동영상이다.
그건 김건의 취미였다.
마력을 봉인한 상태로 몸만 가지고 치고받는 격투기의 영상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각 선수들의 잘못된 습관이나 자세를 짚어 교정해 주는 일이다.
평범하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은 싸움꾼으로서의 자신에 미련이 남은 듯했다.
그렇게 영상을 분석하고 각종 자료를 첨부하여 레포트를 작성하는 걸 보면 말이 취미지, 일이나 다름없다.
돌아와서도 일을 하다니, 한서리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만 김건 자신은 그것까지 포함해서 상당히 즐거운 취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서리는 안방의 침대에 누워 빈둥빈둥 굴러다니며 남편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오늘은 왠지 남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언제 일을 끝내고 자기랑 놀아 주나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기야! 나, 하고 싶은 거 생각났어!”
“뭔데?”
작업을 하던 김건이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그런 그를 향해, 한서리는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 격투가가 해 보고 싶어!”
“……??”
김건은, 잠시 충격에 빠졌다.
그가 입을 열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한서리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김건을 마주 보며 다시 말했다.
“격투가라는 직업을 해 보고 싶다고.”
“……너무 뜬금없는데. 대체 왜?”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 이런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 보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한서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이쪽은 당신이 가르쳐 줄 수 있잖아. 나, 당신한테 배우고 싶어. 가르쳐 줘.”
장난기 가득한 그 얼굴을 보니 무슨 꿍꿍이인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김건은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말했잖아. 싸우는 건, 장난이 아니라고.”
“누가 사람 죽이는 기술을 가르쳐 달래? 내가 하고 싶은 건 격투가지, 싸움꾼이 아니야. 공개된 장소에서, 정의된 규칙하에 행해지는 스포츠! 그런 거라면 조금 장난처럼 접근해도 되잖아.”
“…….”
김건이 무술에 있어서 진지한 것은 거기에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지키든, 죽이든 어느 방향이든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확실히, 스포츠라는 범주에까지 그 기준을 적용시킬 수는 없었다.
논리의 빈틈을 찔리자 김건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격투가가 되고 싶다고?”
“왜, 당신을 가지고 놀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그래?”
후후후 웃으면서 한서리가 다가온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아 있는 김건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가느다란 팔을 쭉 뻗는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손가락으로 사다리 타듯 남편의 어깨를 사뿐사뿐 뛰놀다가, 이내 깍지를 껴서 그를 그러안았다.
그러곤 오랜만에, 숨기고 있던 파란 눈망울을 꺼내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최소한, 당신한테 뭔가 배우고 싶다는 건 진심이니까.”
그러면서 천천히, 남편을 향해 얼굴을 가져간다.
그때였다.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앙! 엄마아! 아빠! 오빠가 또 나 때렸어─!”
“야! 네가 좀 질 것 같으니까 먼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쓴 거잖아! 한 번 쥐어박은 것 가지고 엄살부리지마!”
“엄마아! 엄마!”
그러곤 와당탕탕, 뭔가가 뒤집어지는 소리가 났다.
“…….”
“…….”
김건과 한서리가 지척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에 눈에 스쳐 지나간 것은 체념의 빛.
두 사람은 얼른 떨어져서, 거실을 향해 뛰쳐나갔다.
* * *
그 주 주말.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러 나간 사이에 김건과 한서리, 두 사람은 가벼운 체육복 차림으로 김건이 다니는 학교의 체육관에 섰다.
안 그래도 사람이 없는 시골인 데다 미리 대관 신청까지 해 두었기 때문에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뭐부터 하면 돼?”
김건은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팔 굽혀 펴기 한번 해 봐. 당연하지만 마력은 사용하지 말고.”
“몇 개나?”
“……열 개만 해 봐.”
“열 개? 겨우?”
한서리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손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게 팔을 굽혀 상체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으읏……!”
이를 악물며 팔에 힘을 주지만 아래로 내려간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상태로 몇 초간을 버티다가 이내 퍼져서 바닥에 누워 버렸다.
“이, 이거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
호흡이 거칠어진 한서리가 무릎을 모아 앉았다. 김건은 그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동요도 없이 다음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 윗몸 일으키기라도 해 볼래? 똑같이 열 개만.”
“알았어.”
한서리는 김건이 시키는 대로 지면에 몸을 뉘였다.
김건이 그녀의 다리를 잡아 주자,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던 한서리가 후읍! 숨을 토하며 배에 힘을 주었다.
“이이잇!”
거창하게 기합 소리를 내 보지만,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리는 게 전부였다.
또다시 쭉 뻗어 버리는 한서리.
그녀는 대자로 늘어져서는 가쁘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학, 학! 왜, 왜, 안 돼지? 옛날에는 이 정도는 가뿐했는데!”
옛날이라 함은, 과거 영웅으로서 활동하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김건이 물었다.
“그때는 몇 개 정도 했는데?”
“……한, 열 개정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체력 테스트도 있었는데, 잘도 그걸 통과했네.”
“난 특기생이었으니까, 테스트는 그냥 패스할 수 있었다고.”
집안에 돈이 많아서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김건은 쯧쯧 혀를 찼다.
“지금 해 봐서 알겠지만, 당신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너무 떨어져. 격투가로 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지, 지금은 오랫동안 쉬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그래! 조금만 운동하면 금방……!”
“안 돼, 타고난 몸 자체가 전투에 어울리지 않아. 근육이 잘 붙는 체질도 아니고, 골격도 너무 작아서 체중을 불리기도 힘들어.”
김건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재능이 없어. 격투가를 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야.”
한서리는 불퉁해진 얼굴로 말했다.
“체력이 모자라면, 기술로 커버하면 되잖아.”
“기술로 커버한다라…… 그것도 어느 정도 밑바탕이 갖춰졌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일 대 일 결투에서 신체적인 능력치 차이는 절대적이야.”
“아니, 그게 F급 마력적성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온 사람이 할 말이야?”
그냥 들어오기만 한 것이 아니다. 김건은 그 F급 마력적성으로 선계 최강의 전사를 쓰러트린 사람이었다.
기술로 기본적인 성능 차이를 씹어 먹어 오던 사람이 갑자기 현실적인 소리를 하니, 한서리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자 김건은 웃었다.
“난 자신이 있었으니까.”
“무슨 자신?”
“마력적성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을 압살할 수 있다는 자신. 감각, 반응, 판단, 움직임…… 기술은 그중 한 부분에 불과해.”
“…….”
한서리는 언젠가 친구인 세라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김건과 무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콱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한서리가 딱,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