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82화
외전 21화 우리 엄마는 한량 (5)
아내가 정말로 세계를 노릴 의지를 보이자, 김건은 학교에 휴직계를 내곤 말했다.
“어느 정도 기초가 잡힐때까지는 내가 도와줄게.”
한서리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기초가 잡힐 때까지는? 그러면 그다음은 당신이 안 가르쳐 주는 거야?”
“말했잖아. 이 분야는 전문가가 아니라고. 정해진 규칙이 있기 때문에 실전이랑은 기술의 운용이 달라. 당연히 전투시의 심리도 다르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내가 다 잡아 주기는 힘들어.”
한서리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다.
“흐음…… 난 당신한테 배우고 싶은데.”
“걱정하지 마. 나도 계속 도와주긴 할 거고, 내가 가르쳐 주기 어려운 부분에서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테니까. 그리고, 애들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잖아?”
“끄응…….”
아이들 이야기를 하자 한서리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단기간 내에 한서리를 격투가로 만들기 위해 일정을 짜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집안과 아이들에게 쏟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빈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도 구해야 했다.
김건이 말했다.
“그냥 메리안한테 맞기는 게 좋지 않을까? 애들도 메리안은 잘 따르는 편이니까…… “
“안 돼. 메리안이 문제가 아니라 메리안네 애들이 문제야. 우리 애들이 걔네들을 박살 내 놓을걸. 특히 유미가.”
괜히 아이들을 일반적인 학교에서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다.
메리안네 아이들도 영특한 편이었지만 유미나 재하만큼은 못하고, 무엇보다도 부모를 닮아 성정이 순했다.
그런 아이들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유미와 벌써부터 어른인 척 행세하는 재하와 붙여 놓아 봐야 다툼밖에 안 생길 것이다.
그런 것들을 설명하며 한서리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나탈리아가 딱이야. 아무것도 안 하는 백수거든. 그래도 은근히 사교성도 좋고, 아이들도 잘 돌보니까.”
“그 사람, 독신 아니었어? 아이들을 잘 돌보는 건 어떻게 알아?”
“예전에 길드 사람 중 누가 일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의 아이들을 며칠간 돌봐주는 걸 봤거든. 거기다가…….”
“거기다가?”
“녀석이, 딱 좋아. 지금의 유미를 맡기에는.”
“…….”
김건은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아내가 충분히 생각을 해서 아이들을 맞길 대상을 골랐다는 것을 확인하곤 더 이상 반론을 늘어놓지 않았다.
턱을 쓰다듬던 그가 말했다.
“그럼 훈련 시작하기 전에 아예 집으로 초대하는 게 어때? 아이들한테 소개도 시켜 주고, 감사인사로 식사대접도 할 수 있으니까. 당신 친구라니, 나도 한번 만나고 싶네.”
“그래, 시간 한번 잡아 볼게.”
* * *
나탈리아는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가진 미녀였다.
옷차림도 말끔하고, 자세도 올곧아 누가보더라도 게임폐인이나 백수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누가 고른 사람인데.’
김건은 다시금 아내의 선구안을 되새기며 나탈리아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재영입니다.”
“나탈리아 마르코바입니다. 시민 언니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김재영, 한시민.
그건 김건과 한서리의 가명이었다.
과거, 인류의 적이 되었던 그들이 기존의 신분을 사용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과거의 모습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얼굴도 성형을 거쳤다. 신분 역시 태생부터 모조리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과거의 지인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나탈리아는 악수를 하며 김건을 살폈다.
‘이 남자가 언니의…….’
그녀에게는 한시민이지만, 한서리는 그녀가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같이 하다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가지고 있는 재능, 그릇의 크기 등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나탈리아가 지켜본 바로 한서리는 왕으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 현대이니 망정이지, 과거에 태어났으면 여자의 몸이라도 수백만을 죽이고 영웅이 되었을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한서리가 남편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여자를 온순하게 만든 남자라.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악수를 한 채 김건을 쳐다보았다.
“쯧.”
하고 한서리가 불쾌하다는 듯이 혀를 차기 전까지 말이다.
김건은 나탈리아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곧 저녁인데, 식사는 하셨나요?”
“아뇨.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까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준비가 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김건이 주방으로 들어간다. 나탈리아는 그 등을 바라보았다.
생김새는 평범한 남자지만 말투, 그리고 분위기가 몹시 부드러우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그 묘한 아우라에 가점.
가정적인 면에 가점.
한서리는 조금 불만 어린 표정으로 남편의 점수를 매기고 있는 나탈리아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데리고 거실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불러 소개를 시켜 주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통성명을 하고 잠시 기다리니, 식사준비가 다되었다고 김건이 나왔다.
나탈리아는 그렇게 한서리의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준비된 음식은 모두 맛이 있었고, 가족들간의 분위기도 좋았다.
“자기야, 오늘 요리가 더 잘됐네!’
“아빠, 아빠, 이거 뼈 좀 발라 줘!”
“…….”
그러한 분위기의 중심에는 김건이 있었다.
성격이 강한 한서리와 유미도 그에게는 얌전한 양이고, 조용히 있는 재하 역시 계속해서 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
자연스럽게 가정의 중심이 되는 구심력.
야수같이 난폭한 여성진을 사로잡는 매력.
그리고 누구 한 사람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포용력.
주의 깊게 한 가정의 식사를 지켜본 나탈리아는 판단을 마쳤다.
그리고 후식이 나올 때, 김건에게 찻잔을 받아 들며 그에게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아버님,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
그런 그녀를 맞이한 것은 난감해하는 김건의 미소와, 더없이 차가워진 한서리의 말이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죽는다──, 한서리는 목을 손으로 그어 보였다.
“아이, 참. 언니는 저를 뭘로 보고.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멋진 분이라는 말이었어요.”
“…….”
나탈리아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그리고 나탈리아가 김건에 대한 평가를 마쳤듯, 김건 역시 그녀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쉬이 남을 재 보는 성격이라 누군가에게는 인정머리 없다는 평가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쉽게 다른 사람의 성향을 맞춰 줄 수 있는 관찰력과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임기응변을 가진 재치 있는 사람이다.
확실히, 다소 괴팍한 면이 있는 아이들을 돌보기에도 적합한 인물이었다.
김건과 한서리, 나탈리아는 잠시 주방에서 담소를 나누다가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나탈리아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후다닥 주방을 빠져나간 아이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응?”
두 아이가 하고 있는 것을 본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탈리아가 한서리를 찔렀다.
“언니, 언니, 요즘 애들도 체스를 해요?”
“유미가 보드게임을 좋아해. 가족끼리 자주 보드게임 같은 걸 하는데…… 다른건 금방 질린다고 그만두는데 체스는 유독 열심히 하더라고.”
“흐응~. 그렇구나.”
나탈리아의 눈빛이 번뜩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김건은 놓치지 않았다.
나탈리아가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흥미로운 기색으로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자, 유미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언니도 체스 둘 줄 알아요?”
“어, 응? 둘 줄은 아는데…… “
“그럼 같이 해요!”
유미의 눈이 반짝인다.
“내가 졌어.”
동생의 억지에 붙들려 있던 재하는 아직 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새로운 제물을 발견한 유미가 희희낙락하며 펼쳐져 있던 체스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기물을 만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탈리아가 문득 물었다.
“체스를 한지는 얼마나 됐어?”
“음…… 2년쯤요.”
“체스는 가족들이랑만 두니?”
“아뇨, 보통은 컴퓨터로 온라인에서 사람들이랑해요!”
“그래? 그럼 혹시 elo 레이팅 점수가 몇이야?”
elo 레이팅 점수란, 체스를 하는 사람의 실력을 각종 수학적 방법을 통해 수치로 표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탈리아는 지금 네 실력이 얼마나 되냐고 물은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유미가 다시 한번 나탈리아를 쳐다보았다.
일곱 살 꼬마아이의 입에 문득 음흉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저요? 그렇게 높진 않아요. 1800정도예요.”
대단히 높은 점수였다.
7살 아이 기준으로는 천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탈리아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떠돌았다.
“그 나이에 독학으로? 대단하네.”
유미가 나탈리아의 표정을 살핀다.
어떤 면에서는 어린아이들만큼 눈치가 빠른 존재도 없다.
유미는 알아보았다. 나탈리아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미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러곤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2000점은 금방 뚫을 걸요. 전 아직 나이도 어리니까, 금방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10살 전에는 마스터 칭호를 다는 게 목표예요.”
“10살에 마스터? 힘들걸.”
“힘들다고요? 뭐, 평범한 애들한테는 무리긴 해요.”
“그럼, 유미 너는 평범하지 않다는 말이니?”
“평범하지 않죠. 어지간한 동네 애들이랑은 답답해서 말도 안하거든요.”
그 말을 들은 나탈리아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웃는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모양만 가지고 이야기했다.
‘이러려고 절 부른 거예요?’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입술을 모아 소리없이 말했다.
‘박살 내 버려. 울려도 괜찮으니까.’
알았다는 듯이 윙크를 하는 나탈리아.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다시 유미를 돌아보았다.
“그럼 어디, 언니랑 한판 둬 볼까?”
“좋아요!”
유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생각이 만만인지 승부욕이 불타는 표정으로 나탈리아를 바라보았다.
널 산산조각으로 박살 내 주겠다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런 꼬마아이의 기세에 미소 지으며, 나탈리아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검은색 말을 집었다.
체스에는 백색 말과 검은 말이 있으며, 규칙상 백색 말이 먼저 시작하도록 되어 있다.
선뜻 검은 말을 집었다는 것은 선수를 양보한다는 것.
나탈리아는 말한 것이다.
넌, 나보다 아래라고.
그것을 본 유미의 입술이 조금 떨린다. 하지만 아이는 기특하게도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유미는 입을 꼭 다물고 자신의 말을 배치했다.
서로의 기물이 제자리를 찾고, 제한시간의 설정을 위해 유미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나탈리아가 자신의 진형을 잠시 지켜보더니 문득 말했다.
“실력 차이가 나니까. 핸디캡을 좀 줘야겠네.”
그러고는 자신의 기물 중에 퀸과 룩을 제거했다.
여러 체스의 기물 중 가장 강력한 수단 두 개를 뺀다.
비유를 하자면, 일 대 일의 진검승부에 앞서 자신의 한쪽 팔을 스스로 잘라 내는 것과 같았다.
“아?”
유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아이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듯 나탈리아를 바라보았다.
나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왜, 이것 가지고는 부족해? 그럼 이거 하나 더 떼줄게.”
그러면서 앞줄에 있는 폰을 하나 더 치운다.
“……!!”
그것을 본 유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