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83화
외전 22화 우리 엄마는 한량 (6)
“그걸 다 빼고 저를 이기겠다고요?”
유미는 상당히 흥분한 것 같았다. 나이답지 않게 최대한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보였지만 완벽하게 제어하진 못했다.
나탈리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농담을 하는 것 같니?”
“……저, 매칭으로는 마스터 선생님들이랑 해도 그렇게 쉽게 지진 않아요.”
“그럼 내기할까? 만약 여기서 네가 이기면, 지금 이 자리에서 체스 협회에 연락해서 네 점수를 올려 주고, 네게 캔디데이트 마스터를 줄게.”
씨익, 자신만만한 미소가 나탈리아의 입가에 떠오른다.
“나, 협회에서는 은근히 발언권이 있거든.”
아무래도 나탈리아는 체스에 상당히 조예가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김건이 한서리에게 눈으로 물었다. 한서리는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다.
“나탈리아 부모님이 체스 세계 챔피언이었어. 본인도 그랜드마스터급 실력자고. 예전에 번 상금으로 투자한 사업이 성공해서 놀고먹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백수는 아니야.”
유미에게 들었기 때문에 김건도 체스의 계급 체계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면, 세계구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다.
아직 세계구는커녕 지역구에서도 조금 잘한다 수준인 유미로서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유미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유미는 똑바로 나탈리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제가 지면요?”
그런 아이를 차가운 눈으로 깔아보는 나탈리아.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허섭스레기입니다라고 외치며 내게 열 번 절해.”
장난을 치는 듯한 요구 조건에 유미가 그게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이 나탈리아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조건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리고, 다시는 네가 평범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 것. 넌 아직 그럴 주제가 못 되거든.”
유미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건 그렇고, 나는 허섭스레기입니다라니, 애한테 그런 말을 시켜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학교에서 실컷 했을 텐데, 뭐. 안그래?”
“전 그런 저급한 말 안 해요.”
“아이구, 아가씨 납셨네.”
유미가 체스판 옆에 놓인 타이머를 집었다.
“제한 시간은?”
“15분. 귀찮으니까, 서든데스로 할까?”
“좋아요.”
그렇게 서로의 시간이 설정되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유미는 꽤 화가 난 모양이었다. 말을 다루는 움직임이 거칠었다.
반면 나탈리아는 여유작작했다. 그녀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체스의 말을 움직였다. 마치 모든 답이 머리에 입력되어 있는 것마냥 초속으로 수를 둔다.
그런 나탈리아의 모습에 유미는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이를 꽉 깨문 유미는 나탈리아를 따라 하는 것처럼 똑같이 최선의 속도로 수를 두었다.
그렇게 수십 수가 지나가고, 서로의 진형이 충돌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문득, 말을 옮기던 유미의 손이 멎었다.
“…….”
뭔가 위험을 감지했는지, 유미는 한참이나 체스판 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겨우 다음 수를 짜내어 수를 두었는데, 나탈리아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유미의 의도를 틀어막아 버렸다.
숨이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유미.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제한 시간을 써 가며 다음 수를 읽어 말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 말을 움직이는 유미의 손이 딱 멈췄다.
말을 쥔 손을 판 위에서 천천히 흔들어 보이지만 그것을 놓을 곳을 몰라 헤매고 있으려니, 어느새 모든 제한시간이 끝나고 설정해 두었던 타이머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승부조차 보지 못하고, 제한 시간 소비로 패배한 것이다.
“…….”
유미의 상체가 숙여진다.
의자에 앉아 무릎을 짚은 아이는, 졌다는 말도 하지 않고 체스판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나탈리아가 말했다.
“왜, 인정 못하겠어? 이번 건 연습으로 하고, 그럼 한 판 더 해 볼까?”
유미는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펼쳐진 한 판.
하지만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수읽기의 깊이가 달랐다.
사람을 상대하는 기세가 달랐다. 제한 시간에 쫓겨 악수를 남발하던 유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진형을 바라보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탈리아의 입에서 차가운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한번 봐줬으니까 용서는 없어. 일어나서, 절해.”
“윽……!”
유미가 이를 악물었다.
커다란 아이의 눈에 망울망울 눈물이 졌다. 유미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저편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서리와 김건을 돌아보았다.
냉정한 얼굴의 한서리가 보인다. 그녀는 유미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건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유미는 두 사람이 자신을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한테 의지하지 마. 스스로 한 약속도 못 지키는 거야?”
나탈리아가 엄히 말한다. 망연자실해 있던 유미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벌떡 일어서더니,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나탈리아의 앞에 서서 절할 자세를 갖췄다.
“말해야지. 저는 허섭스레기입니다.”
“저, 저는…… 흑, 허섭스레기입니다…….”
드디어 아이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압박을 하려 하면 더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본 나탈리아는 더 이상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열 번 해.”
유미는 그렇게 나탈리아가 정한 굴욕적인 말을 내뱉으면서 절을 했다.
눈물 콧물로 바닥을 더럽히면서도 꾸역꾸역 절을 해 나간다.
그렇게 정해진 숫자를 다 채우고 나자 무너질 듯이 쓰러져서는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으아아아앙!”
집안이 떠나가라 울어 젖히기 시작하는 유미.
그런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하가 이쪽을 바라봤다. 한서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하는 엎드려 울고 있는 동생의 옆에 쪼그려 앉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김건은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거야?”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기를 죽여 놔야 해. 똑똑한 것도, 자신감 있는 것도 좋지만…… 저 상태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커서 나처럼 될 걸.”
사람을 믿지 않고 스스로를 완벽하다 생각하던 독선적인 시절의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그런 인생을 살면서 호된 경험을 치른 그녀는 딸까지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김건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자각은 있었나 보네. 죽어도 인정하지 않더니.”
“그때는 몰랐어. 당신이 옆에서 알려 줬으니까 그제야 깨달았던 거지.”
그렇게 말한 한서리가 손짓을 해 나탈리아를 불렀다. 그러곤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잘해 줬어. 유미가 꽤 무례했는데.”
“괜찮아요 언니. 저는 어렸을 때 더 심했는걸요.”
나탈리아는 웃으며 마주 고개를 까딱였다. 한서리의 시선이 김건을 향했다. 그녀는 아직도 울고 있는 유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기다렸다가, 당신이 좀 달래 줘. 간식이라도 챙겨 주면서 어르면 금방 나아질 거야.”
“당신이 가 보는 게 낫지 않아?”
“아니야, 당신이 가. 유미는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니까…… 그동안 나는 나탈리아한테 애들 챙겨 줄 거랑 학교 연락처 같은 것들 좀 알려 주고 있을게.”
알았다고 말하며 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리는 나탈리아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나 참.”
머리를 긁적이며 김건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직도 울고 있는 유미에게 다가갔다.
그는 옆에 있는 재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엎드려 있는 유미를 일으켜 안아 주었다.
“으아앙, 흐어어엉!”
반사적으로 김건의 목에 매달리며 울음소리를 내는 유미. 김건은 그렇게 아이를 안고 소파에 앉아 자그마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엄마, 엄마아아!”
“엄마 금방 올 거야. 조금만 참자. 응?”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김건.
그러고 보면 항상, 힘든 일이 생기면 유미가 먼저 찾는 것은 김건이 아니라 한서리였다.
‘이미 충분히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가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긴 하지만, 그건 분명 두 사람의 사이가 워낙 가까워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렇게, 김건은 생각했다.
* * *
아이들을 나탈리아에게 맡겨 둔 이후, 김건과 한서리는 새로운 일상에 빠져들었다.
한서리를 격투기 선수로 만드는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은 몸을 만드는 게 먼저야.”
그렇게 말한 김건이 처음으로 한서리에게 시킨 것은 수영이었다.
한서리가 물었다.
“왜 수영이야?”
“갑자기 운동을 하면 몸을 다칠 수도 있으니까. 체력 붙이기도 좋고, 여러모로 안전하거든.”
풀장에 넘실거리는 물을 본 한서리는 몸서리를 쳤다.
“저거 보니까 옛날 생각나네.”
“강에서 허우적거릴 때?”
“그래,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딱히 한서리가 수영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금방 적응했고, 김건의 지시에 따라 점차 체력을 늘려 나갔다.
그다음에 힘 쓰기 시작한 것은 역시나 웨이트 트레이닝이었다. 몸에 근육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식단도 완전히 바뀌었다. 한서리는 벌써 다섯 번째로 나오는 간식, 각종 탄수화물과 단백직을 보충할 고기 등을 보고는 거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다 먹어야 해?”
원체 입이 짧은 그녀였다. 그 덕에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놀 때에도 체중은 그리 많이 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하루 종일 뭔가를 계속 씹어 삼키려니 죽는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건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 먹어야 돼. 먹지 않으면, 근육도 자라지 않으니까.”
한서리는 불퉁한 표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랑 별로 다를 게 없네. 엄청난 고수니까 뭐 신기한 걸 할 줄 알았는데. 무슨 호흡법이라던가 선도라던가.”
“당연하지. 몸 만드는데 지름길 따위가 있을 것 같아?”
“제기랄.”
투덜거리긴 했지만 부모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한서리에게는 무서울 게 없었다. 그녀는 강력한 의지를 발휘해 김건의 지도에 따라 몸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김건이 세팅해 준 체질 개선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한서리의 육체는 쑥쑥 성장했다.
지금껏 아무리 살이 쪄도 40킬로대이던 몸무게가 훌쩍 늘어나서 50킬로그램이 넘었다.
거울을 본 한서리는 몰라보게 변모한 스스로의 몸에 울상을 지었다.
“이게 뭐야…….”
좁던 어깨가 벌판처럼 넓어졌다. 팔도 다리도 두꺼워지고, 몸 이곳저곳에서 근육이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하얗고 낭창낭창한 팔다리로 살아온 한서리다. 그녀는 변화한 자신의 몸이 맞나 싶어서 투덜거렸다.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좀…… 그런데?”
그녀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되었지만 김건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게 당연한 거야. 보기 좋은데 뭐.”
“보기 좋아?”
그 순간, 한서리에게서 사냥꾼의 눈빛이 번득였다.
김건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한서리가 다가와 김건의 앞에 섰다.
스포츠브라를 입은 그녀의 상체는 뻣뻣하던 이전과 달랐다. 창백하던 피부가 보기 좋게 그을렸고, 몸에 전체적으로 굴곡이 생겼으며 체질 개선의 영향 탓인지 밋밋하던 가슴도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한서리는 팔을 뻗어 김건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당신, 이런 게 취향이었어?”
김건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나야 뭐, 당신이라면 뭐든지 다 좋지.”
“그런 뻔한 대답으로 넘어가려 하지 말고. 지금이 좋아? 아니면 이전이 더 좋아?”
몸이 변하니 그게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없던 야수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한서리는 절대로 틀려서는 안 될 질문을 김건에게 던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