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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85화 (185/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85화

외전 24화 우리 엄마는 한량 (8)

“아, 씨발…… 내가 이런 틀내 나는 데에 왜 와야 하는데…….”

“그놈의 주둥이는 좀 예쁘게 쓸 수 없냐?”

에디가 핀잔을 주자 여자아이, 아니,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여자아이인지, 여자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이 오는 것은 그녀의 생김새 때문이었다.

불꽃 같은 눈썹에 오똑한 콧날과 선명한 분홍빛 입술. 사나워 보이긴 하지만 얼굴에는 분명 소녀와 같은 앳됨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밑에 있는 것은 그야말로 전투 기계를 연상시키는 단련된 육체였다.

온몸이 근육 덩어리.

잔뜩 부풀어 올라 울퉁불퉁 튀어나온 근육은 아니지만, 그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마냥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근육이 훤히 드러난 팔에 조각되어 있었다.

키는 한서리와 비슷했고, 체구도 마냥 크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가진 분위기 자체가 범상치 않았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진득한 생명력이 묻어 있다. 가볍게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만 해도 율동하는 근육이 선명하게 보였다.

살아 있는 암사자를 인간의 형태로 바꾸어 놓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육체였다.

이쪽을 보고 싶지 않은지 자꾸 시선을 돌리고 있지만 한서리는 여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엄청나게 바뀌긴 했지만 분명히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놀란 기색으로 에디에게 물었다.

“교수님…… 혹시 그 아이가, 앤인가요?”

“그래, 네가 봤을 때랑은 좀 많이 달라졌지?”

에디는 그렇게 말하면서 억지로 딸의 머리를 눌러 인사를 시켰다.

에디와 스칼렛의 딸, 앤 슐츠.

한서리가 마지막으로 앤을 봤던 것은 7년 전. 유미와 재하를 낳기 전이었다.

그때만해도 마냥 귀여운 꼬마아이였는데, 어느새 다 큰 처녀가 다 되었다.

열다섯 살이라 보기에는 성장이 좀 과도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한서리는 시간의 흐름을 통감했다.

에디의 손에 의해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앤이 눈을 굴려 좌우를 살펴봤다. 그러던 그녀는 한서리의 옆에 서 있는 김건을 발견하자 스스로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삼촌.”

“그래. 잘 지냈지?”

“그럼요.”

자신과는 180도 다른 대우에 한서리가 김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당신, 앤이랑 만난 적 있어?”

“있지. 티리온 형님이랑 만날 때 에디 형님도 자주 참석하니까. 그러다 보니 몇 번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어.”

“보통 성격이 아닌 것 같은데, 당신한테는 깍듯하네.”

한서리가 그렇게 묻자 김건은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나한테도 별로 다를 바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왜 저래?”

“자꾸 대련하자고 졸라서 좀 어울려 줬거든. 그다음부터는 깍듯하게 굴더라고.”

말이야 점잖지만 실상은 두들겨 패고 힘의 차이를 보여 줘서 얌전하게 만들었다는 소리다.

한서리는 혀를 찼다.

하긴, 열다섯이면 한창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고 다닐 나이긴 하다.

거기다 과거 발할라에서도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2인방인 에디와 스칼렛의 딸이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사람들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오히려 얌전한 것이 더 이상하리라.

한서리는 지금까지의 언동과 행동으로 앤의 성격을 얼추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 개차반 같은 성격을 나타내듯, 앤은 삐딱한 시선으로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저딴 아줌마랑 스파링을 하라고? 염병. 딱 봐도 개초보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줌마가 아니라 이모라고 똑바로 불러라.”

에디가 으르렁거리면서 낮게 말한다.

어지간한 어린아이는 목소리만 들어도 울어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이모고 고모고 나발이고, 미쳤냐고. 나보고 갓난아기 상대를 시키게. 확 죽어 버려도 난 모른다?”

“죽어? 그건 너겠지. 저 친구가 누군지 잘 모르나 본데, 나도 예전에는 저애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때는 노제 누님에 맞먹는 인물이었던 말이다.”

“노제 언니랑 맞먹는다고? 처음 듣는 이름인데?”

“……하여튼, 대단한 사람이야. 최강의 후위 중 하나라고.”

“그래 봐야 후위잖아. 그 쫄보 근성이 어디 가겠어?”

딸과 아버지의 대화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은 꽤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대화 사이에 초보니, 갓난아기니, 죽이느니 뭐니 하는 소리가 들리자 한서리는 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녀는 김건에게 말했다.

“저 녀석, 선수인가? 아주 기세가 등등한데.”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선수는 아니야. 나이 제한에 걸려서, 실제 경기는 한 번도 치른 적 없다고 들었어.”

“응? 그러면 나랑 똑같은 거 아니야? 그런데 저렇게까지 까분다고?”

김건을 제외한 다른 사람과는 한 번도 겨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순식간에 상대를 아래로 본다.

알고는 있었지만, 김건은 아내의 자신감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러곤 정당한 대결을 위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공식적인 경기를 치른 적이 없다 뿐이지 스파링 경험은 상당히 많을 거야. 격투기를 배운 세월도 긴 편이니까 실제로는 선수급이라고 봐야 해. 거기다가, 저 녀석의 육체 능력은 상상을 초월해. 키가 작아서 아쉽지만…… 마력 한 점 사용하지 않아도 D급 몬스터 정도는 때려잡을 수도 있을걸. 우리가 발할라에 있을 시절로 따지면 셉텐트리온급 인재지.”

“그래 봐야 스물도 되지 않은 핏덩이잖아. 아무리 이쪽이 전문이 아니라도 그렇지, 내가 실전을 얼마나 겪었는데 저런 꼬마랑 비교를 해?”

아무리 실전을 겪었어도 그렇지, 이 분야에서는 초보이면서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 아니냐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김건은 그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한서리와 앤이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다. 김건과 에디는 두 사람의 스파링을 준비했다.

“이렇게 만나기 쉽진 않으니까, 조금 힘들더라도 5라운드로 할까?”

“그러시죠.”

에디의 말에 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은 아내에게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끼워 주며 말했다.

“솔직히, 당신이 여기서 이길 거라고는 생각 안 해.”

한서리는 입술을 뾰족였다.

“뭐야, 힘내라고 응원해 줘도 모자랄 판에.”

“응원은 별개고, 사실은 사실이니까. 다만 확실히 말해 두고 싶은 건, 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스파링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게 많다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 둘 건 이건 시합이 아니라는 거야.”

한서리의 글러브를 단단히 조여 주며 김건이 말을 맺었다.

“스파링에서 백 번 져도, 시합에서 이기면 그게 진짜 승리라는 거지.”

“알았어, 알았어, 여기서 진다고 풀죽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손사래를 치며 잔소리를 흘려넘긴 한서리는 링 반대편에 있는 앤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두고 봐. 여기서 보기 좋게 기절시켜 줄 테니까. 게거품 물면서 뻗어 있는 꼴을 보면 꽤 재미있겠네.”

김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앤에게 주의를 주던 에디도 아래로 내려가고, 링 위에는 한서리와 앤만이 남았다.

앤은 한서리를 보며 씩 웃었다.

“조심해. 아줌마. 나는 누굴 봐주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거든.”

한서리 역시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존대를 하렴. 예전에 봤을 때는 참 귀여웠는데, 되바라져서는, 천방지축으로 날뛴다고 누가 널 무서워할 줄 아니?”

“흥,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못 맞춰 줄 것도 없지. 하지만 여기는 링 위잖아? 설령 그게 스파링이라도, 나는 내 상대한테 존대 안 해. 그 사람이 나보다 강한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 그럼 나도 어린애라고 봐줄 필요는 없겠네.”

“바보 같긴. 쓸데없는 허세 부려 봐야 소용없어. 아줌마는 나한테 안 되니까.”

서로 간에 날선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에디가 외쳤다.

“잡담들 그만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공이 울렸다.

타앗!

앤은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발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며 냅다 하이킥을 갈겼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공. 거기에 첫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과감한 하이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당황해 몸이 굳을 수도 있었지만, 한서리는 달랐다.

수많은 실전을 거쳐 온 그녀다. 목숨조차 걸려 있지 않은 이런 느슨한 환경에서 당황할 그녀가 아니었다.

“흥!”

그녀는 여유롭게 킥을 피하며 앤의 디딤 발을 걷어찼다.

상당히 정확히 들어갔지만 앤은 개의치 않았다. 순식간에 빗나간 하이킥을 회수하고는, 쉭, 하고 호흡을 내뱉으며 번개 같은 로우킥을 내질렀다.

쐐액-!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발차기였다.

곧바로 다리를 들어 올려 방어하는 한서리. 그것을 맞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이 계집애, 완전히 괴물이잖아!’

가드했는데도 칼날이 다리를 파고드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몰아쳤다.

그래도 방어는 했기에 한 방에 무력화되지는 않았다. 한서리는 고통을 눌러 참으며 백 스탭을 밟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갑자기 눈앞의 광경이 회전했다.

“어?”

뒷걸음질 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스탭이 꼬인 한서리가 발라당 넘어졌다.

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달려들어서는, 한서리를 깔아뭉개더니 당황한 한서리의 얼굴에 그대로 파운딩을 먹였다.

쩌어어엉!

내려친 주먹이 링의 바닥을 때리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쩐지 타는 듯한 냄새가 난다. 한서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 옆에 꽂힌 앤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앤이 킥, 웃었다.

“운 좋았네? 아줌마.”

스파링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끝났다.

한서리가 작게 욕설을 내뱉고, 에디가 타이머를 멈췄다.

링 위로 올라온 김건이 한서리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일으킨 한서리가 갑자기 기능을 상실한 다리를 바라보았다.

“뭐야? 분명히 제대로 방어했는데.”

김건은 바르르 떨리고 있는 아내의 무릎과 허벅지 부위를 마사지를 해 주며 말했다.

“아직 타격을 받는 것에 몸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긴장이 덜 풀린 것도 있고. 물론…… 저 녀석이 대단한 것도 있어. 타격의 질이 상당히 좋아. 그래도 잘 막았어.”

“…….”

시작하자마자 다운이 된 상태라 아직은 서로 기운이 넘칠 때였다.

한서리가 고개를 들자 저편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앤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머리칼의 여자아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눈웃음을 치며 한서리를 깔아 보았다.

‘저 녀석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유미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근처에 있는 딸들은 왜들 이렇게 건방진 성격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한서리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그 버릇을 고쳐 주고야 말겠다.

한서리는 그런 각오로 다시금 링 위에 섰다.

앤은 다시 한번 공이 울리자마자 똑같이 속공을 걸어왔다. 그러곤 똑같은 폼으로 냅다 하이킥을 날렸다.

표정이 웃고 있다.

이렇게 해도 너 정도는 이길 수 있어, 라는 표현인 것이다.

“쯧.”

한서리가 혀를 찼다.

그녀는 분명 초보이긴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방금 전의 다운으로 타격기 승부를 하면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곧장 허리를 숙여 하이킥을 피하고 태클을 날렸다.

발차기를 하느라 중심이 깨진 앤의 다리를 붙잡고는 순식간에 싱글 레그 테이크 다운으로 그녀를 넘겨 버렸다.

곧바로 앤의 발목을 붙들고는 서브미션을 시도. 발목꺾기로 앤을 제압하려 하는데…….

“흥!”

코웃음 소리와 함께 앤이 한 번 다리를 떨치자 단번에 다리를 놓치고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무슨 놈의 힘이……!’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구속을 떨쳐 낸 앤이 허리를 튕겨 용수철처럼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근육의 탄력. 한서리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있었으나 앤이 더 빨랐다.

실제로는 고작 영점 몇 초의 차이였지만 한서리의 체감으로는 앤이 자신보다 두 배는 더 빠른 것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자세를 잡은 앤이 미들킥을 질러 왔다.

한서리가 팔을 들어 방어했지만 일어서던 도중이라 중심이 불안정했다. 버티지 못하고 가드째로 튕겨져 나갔다.

어설프게 일어서려고 하면 당한다.

그것을 깨달은 한서리는 아예 그냥 누워 버렸다.

누워 버린 상대를 제압하는 건 의외로 어렵다.

한서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앤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한서리가 누워 있든 말든 그대로 달려들어 공격을 걸어왔다.

방어를 위해 치켜든 한서리의 다리를 잡아채 간단히 젖혀 버리더니, 순식간에 파고들어 마운트 자세를 잡았다.

“……!”

주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폭발적인 기세에 열다섯 살 여자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력.

그 두 가지가 더해지자 그야말로 폭주 기관차가 따로 없었다. 한순간에 우위를 점한 앤이 마구 파운딩을 내리쳤다.

“크으윽!”

계속해서 위에서 주먹을 내리치니 정신이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서리는 앤의 팔을 잡아 공격을 방해하면서 그녀가 파운딩을 위해 팔을 젖혔을 때 브릿지를 해서 허리를 들어 올려 마운트 자세에서 빠져나왔다.

“오, 잘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디가 감탄을 토했다.

처음의 테이크 다운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변변한 경험도 없는 초보가 저렇게 침착하게 대응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응법을 알고 있어도, 막상 싸우기 시작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한서리와 앤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앤은 지금의 승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 해서 파고들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려 왔다.

잽, 스트레이트, 좌우 훅.

그 막무가내식 공격을 쳐 내며 한서리가 후퇴한다. 그녀는 중간중간 찔러 넣는 로우킥으로 앤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며 침착하게 아웃 파이팅을 했다.

‘멍청하긴. 기세만 좋다고 다 되는 줄 아나?’

냉정히 앤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한서리가 반격에 나서려 할 때였다.

아래쪽에서 공격이 올라왔다.

계속해서 팔을 크게 휘두르며 몸을 날린 공격을 하더니, 어느 순간 반전해서 콤팩트한 어퍼컷을 꽂아 넣은 것이다.

‘어?’

한서리는 그것을 가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스트레이트와 훅에 의식이 집중되어, 아래쪽의 움직임은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거센 충격이 머리를 꿰뚫었다. 한서리는 눈앞이 새까맣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의 눈앞에는 드넓은 체육관의 천장과, 김건의 얼굴이 있었다.

“……!”

벌떡 몸을 일으키자 멀찍이 서서 링에 몸을 기대고 낄낄 웃고 있는 앤이 보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지금의 상황을 깨달았다.

김건이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급하게 말하며 일어서는 한서리.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곧바로 주저앉아 버렸다. 아무리 헤드기어를 썼어도, 방금 전처럼 턱을 맞아 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어지는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서리가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웅크렸다. 그런 그녀의 귀에 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존나 재미없네. 어떻게 한 라운드를 채 못 견디냐.”

‘저년이……!’

계속된 도발에 울화통이 터지는 한서리였지만, 그 뒤의 결과는 그저 참혹할 뿐이었다.

스파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원래는 5라운드에 끝낼 생각이었지만, 3라운드 지점에서 초크에 걸린 한서리가 탭을 안치고 버티던 와중 까무룩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잘 놀다 갑니다~.”

한서리를 박살 낸 앤은 끝까지 깐족깐족 한서리의 신경을 긁어 댔다. 샌드백을 두들겨 팼더니 아주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까부는 앤의 머리를 에디가 바로 쥐어박았지만 당연하게도 그걸로 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한서리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고생했고, 다음에 또 보자. 선수 등록할 때 되면 미리 알려 주고.”

여기서 앤을 데리고 떠나는 게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에디가 서둘러 체육관을 빠져나가고, 휑뎅그렁해진 링 위에는 한서리와 김건만이 남았다.

한서리는 땀에 흠뻑 젖어서는 이를 벅벅 갈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왜 지는 거지? 딱히 뭔가 잘못하는 건 없는 거 같은데…….”

분해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김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해서 지는 게 아니야. 잘하는 게 없어서 지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주도권이 없어. 뭐든지 보고 대응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처리하기에는 기술도, 감각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얻어맞기만 하다가 끝나는 거지.”

“먼저 공격에 나서라는 거야? 그러다 카운터 맞으면 한 방에 끝나잖아.”

“무슨 공격이든, 리스크가 없는 건 없어. 기술 하나하나의 유불리에 휘둘리지 말고 싸움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껴 봐.”

“말은 참 쉽네.”

남편의 조언은 수준이 너무 높아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한서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금 전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뇌었다.

반성도 좋지만, 과거의 일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그래도 잘했어. 처음 스파링하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칭찬을 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하는 김건.

한서리도 그 뜻을 알아챘다. 그녀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또 그 녀석이랑 붙어 볼 수 있나?”

그러면 만회할 수 있다. 지금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진 거다.

다음번에야말로, 박살을 내 주겠어.

그런 각오를 되새기고 있을 때 김건이 말했다.

“또가 아니야. 앞으로 앤이랑은 지겨울 정도로 싸우게 될걸.”

“왜?”

“이제 몇달 뒤면 생일이 지나서 앤의 나이가 선수로 활동할 수 있는 최소치에 들어가거든.”

김건과 설계한 계획에서, 한서리는 앞으로 세 달 뒤에 선수로 등록해서 활동하기로 했었다.

그 말은 즉, 서로의 활동 시기가 겹치게 될 것이라는 것.

그 의미를 깨달은 한서리가 눈을 치켜뜬다.

“그렇다는 말은 곧…….”

“그래, 앞으로 계속 부딪치게 될 거야. 당신이 챔피언을 노린다면…… 반드시 꺾어야 하는 상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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