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87화
외전 26화 우리 엄마는 한량 (10)
신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자가 떼를 쓰니, 미력한 인간은 그저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디와 마력 제한 격투기 협회의 협회장은 자신들의 계좌에 무시무시한 금액이 꽂히는 것을 바라보며 멍하니 앤과 한서리의 데뷔전 매치를 승인하는 기획서에 사인을 했다.
그렇게 성사된 한서리의 복수전.
수익을 보장받은 마케팅 팀이 신경을 썼다.
그만큼 상당히 많은 광고가 나갔고, 그 결과 양쪽 모두가 데뷔전임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탈 정도로 상상당한 주목을 받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런 화려한 무대에서 신성의 등장을 알리고 싶었던 한서리는 화려한 역전패를 당했다.
“말도 안 돼!”
잠시 기절했다가 일어난 한서리는 정신이 들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대체 그 계집에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주먹을 내지르냔 말이야!”
“…….”
확실히, 분할 만도 했다.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으니까.
앤과의 첫 번째 스파링 이후, 계속해서 격투기의 경험을 쌓은 한서리의 실력은 상당히 물이 오른 상태였다.
지금까지 쌓아 온 실전경험과, 새로 익힌 격투기 기술이 서로 제대로 융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에 1라운드 때는 한서리가 압도하는 분위기 일변도였다.
젊은 피가 흐르는 앤은 기술보다는 기세를 살려 돌격해 왔고, 한서리는 노련한 투우사마냥 사나운 기세를 흘려내며 유효타를 꽂아 넣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2라운드였다.
앤의 체력을, 그리고 실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
계속된 로우킥과 견제로 충분히 기세가 죽었다고 판단한 한서리가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약이 바짝 오른 앤이 크게 주먹을 휘두르기 위해 주먹을 치켜올렸다.
동작이 큰 텔레폰 펀치.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한 한서리가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카운터를 노린 한 수.
하지만 카운터가 터진 것은 앤이 아니라 한서리였다.
애초에 보기 쉽게 주먹을 들어 올렸던 것 자체가 앤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보기 좋게 낚시에 걸린 한서리는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공이 울릴 때까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쾅! 소리와 함께 대기실의 벤치를 내리친 한서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앙다문 이빨,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호흡이 점차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검게 가려져 있던 눈이 파란빛을 되찾는다. 얼굴의 조형이 변하고, 검은 머리가 좌르르 흘러내리며 폭포수 같은 파란 머리가 되었다.
또르르-
파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김건이 깜짝 놀랐다.
“우, 울어?”
“으아아아아앙!”
한서리는 엉엉 울었다. 김건은 당황했다.
아내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두 사람은 사람이라면 울지 않을 수 없는 온갖 절망과 역경을 뚫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지만 한서리가 패배한 뒤 분해서 우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김건은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패배한 뒤에는 분해하거나 울 여유가 없었지.’
이전까지의 패배는 죽음이나 아니면 세상의 멸망 등을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그의 아내는 처음으로, 순수한 패배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꾸민 울음이 아니라 정말로 상심이 큰 듯했다.
숨 쉬듯이 유지하고 있던 마법이 풀리자 원래의 모습이 돌아왔다.
파란 머리와 파란 눈. 김건에게는 익숙한 아내의 모습이다.
한때 전 세계의 적이었던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어가면 일이 귀찮아진다.
김건은 필요할 때 사용하라며 한서리가 만들어 준 순간이동 장치를 사용해서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엉엉 우는 한서리를 안방의 침대에 눕혔다.
어지간히도 분한지, 한서리는 베개를 끌어안고 집이 떠나가라 울어 젖혔다.
이런 아내의 모습은 처음이라, 김건은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거실로 나갔다.
안 그래도 요즘 아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 시작했는데, 저렇게 우는 모습을 보여 버리면 큰 일이 날 것이다.
그는 바로 나탈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탈리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아까 방송 봤어요. 아쉽게 됐네요.”
김건은 한숨을 쉬었다.
“……네, 안 그래도 지금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예? 언니가, 운다고요?”
김건의 말에, 나탈리아는 깜짝 놀랐다. 입을 틀어막았는지 그녀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울 것 같지 않았는데…… “
“그런가요? 그 정도로 눈물이 없는 편은 아닌데.”
김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서리는 멘탈이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예민한 편이라 쉽게 상처를 입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고개를 주억거린 김건은 조금만 더 아이들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방으로 돌아가자 한서리는 여전히 서럽게 울고 있었다.
별달리 달래 줄 말도 없어서, 김건은 그저 아내의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점차 울음이 멎고 히끅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김건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됐어?”
그러자, 배게 아래에서 코맹맹이 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감량하느라 힘들었지. 맛있는 거라도 먹을래?”
“응…….”
김건은 식사를 준비했다.
원래는 밥보다는 디저트를 좋아하는 식성을 지닌 아내였지만, 체질을 개선하고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그녀도 입이 많이 늘었다.
그는 변한 아내의 식성에 맞게 푸짐한 한상을 차려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식성이 늘었어도, 이전의 습관이 남아 있어 와구와구 씹어 삼키지는 못한다. 김건은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다람쥐처럼 갉아먹으며 입가에 소스를 묻히는 아내를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도와줄게.”
그러곤 나이프를 들어 모든 음식을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썰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서리는 기다리고 있다가 김건이 접시를 건네줄 때마다 그것들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
밥이야 항상 해 주는 거지만, 이렇게 시중을 들어 준 적은 별로 없다 보니 기분이 묘했다.
김건은 웃으면서 바삐 포크를 움직여 식사를 해치우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선보인 파란 머리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그 모습은 오랜만이네.”
말없이 밥만 먹고 있던 한서리였지만, 그 말에는 반응을 보였다.
입가를 쓱 닦은 그녀는 파란 눈을 깜빡이며 남편을 돌아보았다.
“……역시, 이 모습이 좋지?”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처음 당신이랑 제대로 만났을 때부터, 가장 힘들었을 때까지 당신은 항상 그 모습이었으니까.”
한서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이야? 오늘은 어중간한 말로 안 넘어가네.”
“……저번에 그 일도 있고, 나도 조금은 애정 표현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언제까지고 당신한테만 부담 줄 수는 없잖아.”
김건은 조금 쑥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고지식하긴.”
한서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여서 말했다.
‘좋아해. 정말로.’
김건 역시 입술을 벙긋였다.
‘나도 좋아해.’
서로의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두 사람은 입술을 맞췄다.
별건 아니지만, 남편이 옆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니 기분이 빠르게 나아졌다. 그 기분에 맞춰 식욕도 올랐다. 그녀는 어느 샌가 비워진 밥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한 그릇 더!”
“괜찮겠어? 이미 배부르지 않아?”
“아니야, 더 먹어야 돼! 근육량을 늘려야겠어. 힘이 더 있었다면, 그 이전에 끝낼 수 있었을 거야!”
“나 참…… 갑자기 그렇게 먹으면 배탈만 난다고.”
타박을 하는 김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는 아내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넉넉하게 차 있는 밥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데뷔전 이후, 매번 억지를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한 한서리는 차분히 선수로서의 이력을 쌓아 갔다.
그리고 반년 후, 기존 챔피언의 은퇴로 공석이 된 지역구의 타이틀을 놓고 다시금 앤과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최초의 스파링, 데뷔전, 그리고 타이틀 결정전.
세 번째 승부이자 두 번째 복수전이었던 그 경기에서,
한서리는 또다시 패배했다.
4라운드의 접전을 치른 뒤, 5라운드의 혈투에서 우위를 점하다가 단방에 KO.
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그림과도 같은 역전승이었다.
물론 그것은, 한서리의 입장에서는 그저 최악의 패배일 뿐이었다.
“또 졌어!!”
으아아아아아아악!
한서리는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찌나 분한지, 집에 돌아온 그녀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왜, 자꾸 지는 거야! 기술이라면 압도할 수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건은 혀를 찼다.
지금까지 한서리의 전적은 5승 2패.
가지고 있는 2패는 모두 앤에게 당한 것이니 그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폼으로 최강의 후위로 거론되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아내는 확실히 뛰어난 전투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시야가 넓고 정해진 대응 규칙을 아주 잘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그야말로 기계와 같은 전투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너무 머리로만 싸움을 하려고 한다는 거지.’
너무 이성적이고 교과서적으로만 움직인다는 것, 그것이 한서리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한서리가 계속해서 앤에게 지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승부처에서의 폭발력과 대응력의 차이다.
감각적인 승부를 중시하던 에디와 스칼렛의 자식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앤에게는 번뜩이는 승부 감각이 있었다.
상황에 대응하는 적응력, 상대의 빈틈을 찾아낼 수 있는 관찰력, 그리고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배짱을 모조리 다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따라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특히나 손과 발이 뒤얽히고,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승부가 오가는 미시 세계의 승부에서는.
김건은 생각했다.
‘이긴다고 하면…… 판정승뿐이야.’
정면으로 붙어서 치고받으면 안 된다.
무조건 아웃파이트.
앤은 타격이 주특기지만 그래플링 기술은 그리 날카롭지 못했다.
죽어라 도망 다니며 점수만 따고 다니는 스타일에게 강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자꾸 한서리가 KO로 앤을 이기려 든다는 것이었다. 승부가 결정되는 극한의 라인 위에서는 자신이 앤보다 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모자라는 재능.
그리고 이기는 방법을 가릴 정도로 승부에 무른 것.
그것이 진정한 패인이라고 김건은 판단하고 있었다.
아마 한서리 본인도 알 것이다.
그래서 김건은 바보 같은 짓 그만두라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남은 방법은 하나야. 앤의 승부 감각까지 계산해서 행동할 수 있도록 익숙해지는 거지. 수 싸움보다는 순간적인 기지와 본능에 의지하는 타입을 가진 상대와의 싸움에 익숙해지면 지금까지처럼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맞고 뻗는 확률을 확실히 줄일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반쯤 울면서 베개를 팡팡 두드리고 있던 한서리가 김건을 쳐다보았다.
“……이를 테면, 당신 같은 스타일?”
언제나 급박한 상황에서의 한 수로 위기를 모면해 온 남편이다. 그렇기에 물은 것이었지만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니야. 내 스타일은 사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에 더 가깝지.”
그는 미소를 지었다.
“에디 형님도 좋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앤이니까 부탁하기 애매하고, 그래도 그 역할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 당신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야.”
“누군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서리.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김건은 간만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안 그래도 당신 소식 듣고 온다고 했으니까, 금방 볼 수 있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