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93화
외전 32화 우리 엄마는 한량 (16)
“정신병?”
한서리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엘리가 설명을 이었다.
“뭔가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정신 연령이 퇴화한 겁니다. 인간으로 치자면 우울증과 비슷합니다.”
그러고 보니, 용왕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용족들이 간혹 그런 병을 앓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한서리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들은 적이 있는데, 보통 이렇게까지 심하게 돌아가나?”
“아뇨, 이 정도로 심하게 퇴화하는 건 드뭅니다. 꽤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엘리는 그렇게 말하며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는 저도 아직 못 들었습니다. 지구로 귀환하자마자 제게 데려다주기만 하고 바로 떠나 버리셔서요.”
“아, 그게, 말하기가 좀…….”
세라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한서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뭔데 그래?”
“그렇게까지 난감해하시니 더 궁금하군요.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까?”
세라스는 한참이나 대답을 망설이다가 심각한 얼굴로 겨우 말했다.
“……절대로 비웃지 않겠다고 하면 알려 줄게.”
“대체 뭐길래…….”
“약속해! 특히 이 건에 대해서는 지금의 언니에게 절대로 이야기하거나 말을 꺼내서는 안 돼! 그랬다간 하루 종일 울어 버리니까. 알았어?”
세라스가 이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한서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말 좀 해 봐. 숨기지 말고.”
세라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언니가 여러 번 결혼을 했다는 건 알지?”
“알지. 용족들한테는 평범한 일이잖아.”
“저도 다섯 번은 했습니다.”
엘리가 말을 거든다. 세라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언니가 결혼했던 상대 중에 백 년을 넘게 같이 지냈다고 한 남자가 있었거든.”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어.”
조용히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건이 맞장구를 쳤다. 눈치를 보아하니 한서리도, 엘리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 같았다.
엘리가 말했다.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햇수로 따지면 백 년 조금 넘은 일이겠군요.”
다들 어느 정도 기본적인 내막은 알고 있으니 말을 하기가 조금 쉬워졌다. 세라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나랑 언니가 같이 용족의 세계에 잠깐 들를 일이 있었어. 그런데 거기에서…….”
“윽…… 그건…….”
그쯤에서,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엘리의 표정이 단숨에 안 좋아졌다.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그 남자를 봤어. 그, 언니랑 오래 결혼 생활을 했다는 남자. 그런데 언니가 아직까지도 그 남자한테 마음이 남아 있었나 보더라고. 엄청 반가워하면서 다가가더니…… 그, 막 다시 한번 해 보자, 재결합해 보자는 의도를 내비쳤어.”
“……그런데?”
“그런데는 뭐가 그런데야. 뻔하지.”
세라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그 남자는 그동안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지구에 정착했고, 보니까 애까지 있더라고.”
“…….”
“그걸 보고서는 돌아와서 펑펑 울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어. 같이 술 좀 마셔 주고 잤지. 그런데 일어나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다?”
“그래.”
주책맞기 그지없는 이유라는 데에서는 역시나 알리시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서리는 혀를 쯧쯧 차면서 알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라스가 말했다.
“외외로 반응이 평범하네. 엄청 한심해할 줄 알았는데.”
“무슨 마음일지 이해하니까. 만약 내가 비슷한 일을 겪었으면…….”
한서리가 말을 하다 말았다. 그녀는 작아진 알리시아의 볼을 만져 주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울게 아니라 어떻게든 뺏었어야지. 바보같이.”
근처의 초인들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말소리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내의 몸짓에 익숙한 김건은 단번에 그녀의 말뜻을 이해해 버렸다.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그는 한서리의 남편답게 못 알아들은 척 능청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세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한서리는 시치미를 떼며 다음에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치료 방법이 있어?”
“딱히 없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라서요. 약품 같은 걸 써서 일시적으로 정상화시키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만…… 저희 종족이 사용하는 약물들은 모두 후유증이 강한 것들이라서요. 이런 경우는 대부분 스스로 나아질 때까지 그냥 보살펴 주는 게 전부입니다.”
한서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세라스 넌 왜 엘리한테 알리시아를 맡긴 거야? 딱히 아이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
세라스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대신해 엘리가 말했다.
“일반적인 아이가 아닙니다. 정신 연령이 낮아진 거지 기억이 없어지거나 지식이 사라진 게 아니니까요. 세라스 씨를 동생, 자기보다 낮은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을 테니 아마 어지간히도 뗑깡을 부리거나 심술을 부렸을 겁니다. 꾸짖거나 교정을 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을 테고…… 조금만 강하게 나가면 바로 울어 버렸겠죠. 정신적으로 굉장히 약해진 상태라 돌보는 데 고생 좀 하셨을 겁니다.”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과거의 일을 떠올렸는지 세라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아직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럼 엘리한테는 왜 맡긴 거야? 엘리도 바쁜 몸인 거 알면서.”
“들었어. 용족들에게는 이렇게 퇴화한 사람들을 돌봐 주는 시설이 있다고. 그리고 언니 친척이라고 아는 사람은 엘리 씨밖에 없었으니까.”
“시설이 있다고?”
엘리가 답했다.
“신전에서 그 역할을 도맡아 합니다. 퇴화한 사람들을 돌봐 주다가 충분히 회복이 되면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 주죠. 거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이 오래 산 장로분들인 데다가 기본적인 직위도 높고, 여유가 있으니 퇴화한 사람들이 난리를 쳐도 제어가 제법 잘되는 편입니다.”
엘리는 피곤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도 요즘 너무 힘들어서…… 오늘 인사만 시킨 뒤에 신전에 데려다줄 생각이었습니다.”
“순순히 갈까?”
“아뇨. 난리가 날 겁니다. 신전의 장로님들은 가족들처럼 오냐오냐 해 주지만은 않거든요. 마침 잠이 들었으니, 지금 데려다주는 게 좋겠군요.”
“…….”
한서리는 물끄러미 알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엉엉 울어서는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쌕쌕 잠들어 있는 여자아이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러던 그녀가 문득 말했다.
“내가 데리고 있을게.”
“예?”
깜짝 놀란 엘리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그렇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퇴화된 용족을 신전에 보내는 건 저희 용족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간들이 가족을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것처럼 터부시되거나 하는 일이 아니에요. 딱히 안쓰럽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데리고 있고 싶어서 그래.”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며 누워 있던 알리시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녀는 알리시아의 등을 부드럽게 받쳐주며 말했다.
“알리시아한테는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내가 아무런 기반 없이 기린의 화신이기만 했을 때도, 날 믿어 준 사람이고…… 그 이후로도 항상 옆에서 날 지탱해 줬어. 가끔 어리광부리는 모습을 보면 저 나이 먹고 왜 저러나 싶어서 좀 징그러웠는데, 이렇게 되니까 귀엽네.”
“……엄청 폐를 끼칠 겁니다. 겉모습은 귀여워도,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폭군이거든요.”
치를 떠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한서리는 웃었다.
“괜찮아. 멀쩡할 때도, 내 말이라면 잘 들었으니까. 우리 애들도 만만치 않은 개구쟁이들이고…… 잠깐이겠지만 아이 한 명 더 키운다고 생각하지 뭐.”
한서리는 그러면서 김건을 돌아보았다.
“당신 의견은 어때? 괜찮아?”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지. 지금까지 진 빚이 있는걸. 용족 중에서는 가장 친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훈훈한 대화가 오가고 있는 와중에, 한서리는 문득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라스를 발견했다.
“넌 표정이 왜 그래?”
“……나는 빈대 취급하더니. 언니한테는 잘해 주네.”
친구의 투정에, 한서리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너도 이렇게 작아져 봐. 그러면 귀여워해 줄게.”
“제기랄.”
* * *
“팀장님! 팀장님! 이거 해 주세요!”
“팀장님! 간식 주세요!”
“팀장님!”
어지간히도 한서리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던 모양이다. 아이가 된 알리시아는 하루 종일 한서리에게 달라붙어 어리광을 부렸다.
그리고 한서리는 무슨 일인지 엄청난 모성애를 발휘해서 알리시아의 어리광을 다 받아 주었다.
씻겨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그런 한서리의 헌신적인 사랑에는, 김건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너무 잘해 주는 거 아니야?”
한서리는 웃었다.
“아이가 아니니까. 아이라면…… 버릇을 잘못 들일 수도 있고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으니까…… 애정을 함부로 주기 어렵잖아? 그런데 알리시아는 그냥 아픈 거니까. 간호해 준다는 생각으로 하니까 오히려 편해. 그냥 잘해 주기만 하면 되는걸.”
“그건 그러네.”
그 말에는 김건도 납득했다. 그리고 그도 최대한 알리시아를 챙겨 주기 시작했다.
세라스, 그리고 알리시아.
한 집에 동거자가 둘.
그 최대 피해자는 바로 아이들이었다.
모두가 같이하는 식사 자리, 여전히 알리시아는 한서리의 품에 안겨 한껏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잔뜩 뿔이 난 유미를 발견한 세라스가 말했다.
“입술 집어넣어. 잘하면 입으로 사람 찔러 죽일수도 있겠어.”
유미는 벌컥 화를 냈다.
“언니 때문이잖아! 언니가 어디서 저런 애를 데려와서!”
“저런 애라니, 그런 말하면 혼나.”
“~~~~!”
유미는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와중 유미는 자신의 불사조인 깜지가 자신의 밥그릇에 고개를 박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 내가 내 밥 뺏어 먹지 말라고 이야기했지!”
유미가 깜지의 목을 틀어쥔다. 깜지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입에서 불꽃을 쏘았다.
“아악! 야! 이씨!”
앞머리가 그을린 유미가 비명을 지르고, 유미와 깜지가 서로 싸우기 시작해서 주방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소란이 잦아든 뒤, 세라스는 씩씩 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은 유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줄로 꽁꽁 묶여서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깜지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자 녀석은 ‘뭘 봐?’ 라는 듯 신경질적인 눈매로 세라스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벌써 너한테 다 물들어 버렸네. 이건 누가 봐도 불사조라고는 생각 못할 거야.”
처음에는 병아리 같은 노란빛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까마귀처럼 까맣다.
거기에 이것저것 유미의 간식을 탐내더니 두껍게 부풀어 올라서는, 둥그렇게 생긴 것이 마치 부엉이나 올빼미처럼 보였다.
눈도 부리부리해서는, 건방지기 짝이 없다.
유미가 투덜거렸다.
“몰라, 뭔가 이상해. 이런 느낌으로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
요즘 유미는 세라스와 많이 친해졌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식탁 위에서는 오로지 재하만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세라스는 그런 재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재하는 불사조를 잘 안 꺼내네.”
세라스에게 재하는 귀엽기 그지없는 조카나 마찬가지다.
후후 웃으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자, 재하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