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94화
외전 33화 우리 엄마는 한량 (17)
세라스가 관심을 주자 재하는 평상시의 냉정함을 잃고 허둥거렸다.
“벼, 별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모습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본 적이 없네. 유미의 것처럼 뭔가 변한 게 있니?”
“색이 좀 파랗게 변하긴 했어요. 다른 건 아직 그대로예요.”
재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제가 너무 신경을 안 써 줘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저는 먹이도 잘 안 주고, 유미처럼 계속 만져 주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신경은 써 주고 있지 않아?”
“매일, 매일 저녁에 방에서만 같이 놀아 주는 정도예요. 답답할까 싶어서 바깥에 데리고 나가 보기도 했는데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세라스는 훗 웃었다.
“괜찮아. 빠르고 늦고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네가 진심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분명 너처럼 멋진 아이가 될 거야.”
“…….”
재하는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유미는 그런 재하를 불퉁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그의 팔을 툭툭 쳤다.
“학교 가자.”
“데려다줄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세라스는 그들과 같이 일어났다.
* * *
“싫어! 싫어! 팀장님! 으아앙!”
“조금만 참아. 이따 저녁에 데리러 올 테니까.”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며 용의 신전을 지키는 사제에게 알리시아를 맡겼다.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사제는 온화한 표정으로 난동을 부리는 알리시아를 자연스럽게 안아 주면서 신전의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세라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하면 하루 종일 돌봐 주고 싶지만 그녀도 사정이 있었다.
앤과의 경기 일정이 그리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몰아붙여야지! 안 그러면 이렇게 당한다고!”
“큭, 제기랄! 넌, 앤이야! 갑자기 네 스타일로 바꾸지 말라고!”
“맨날 똑같은 것만 하다보면, 실력이 안 늘잖아!”
세라스의 하이킥을 막아 내며 한서리가 숨을 토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쉽게 뻗어 버리진 않았다.
“훅, 훅!”
세라스와 스파링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한서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세라스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라운드가 끝난 뒤, 땀을 훔치며 세라스가 말했다.
“이제는 진짜 붙어 봐도 될 것 같은데. 일단 내가 영상을 보고 흉내 낸 건 거의 완벽하게 파악했어. 어지간히도 능숙해졌으니까 최소한 예전처럼 쉽게 나자빠지지는 않을 거야. 나머지는 경기에서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어.”
“……좋아.”
한서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한서리는 격투기 선수로서 활동하며 계속해서 승수를 쌓아 왔다. 이제는 지역구를 넘어 세계 랭킹을 향해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앤은 무패 행진으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대부분의 경기를 초살 KO승으로 이끌어 낸 앤은 앞으로 몇 번의 방어전만 더 치른 후 다른 체급으로 옮겨 그곳을 제패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상태였다.
한서리는 그 앤의 마지막 방어전을 노릴 생각이었다.
“타이밍은 딱 좋아. 상황상 협회에서 광고하기에도 좋고.”
한서리는 글러브를 낀 주먹을 팡팡 부딪혔다.
“한 상대에게만 계속해서 연패하던 실력자가, 전승으로 한 체급을 석권하고 다른 곳을 정벌하기 위해 나서는 정복자의 앞을 가로막는다. 대충 봐도 영화 한 편 찍을 수 있는 스토리야.”
“아, 예…….”
“여기서 이기면, 지금까지 쌓아 온 울분을 단번에 되갚아 줄 수 있어. 반드시, 이긴다!”
한서리는 기세가 등등했다. 앤을 쓰러트리고 난 다음의 일을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지 왠지 웃음이 음흉했다.
그 기고만장한 꼴이 보기 싫었던 세라스는, 이어진 스파링에서 한서리를 그냥 원 펀치로 기절시켜 버렸다.
김건은 뻗어 버린 아내를 보며 허를 쯧쯧 찼다.
“기절하는 게 거의 습관이 됐네. 이러다가 나중에 뇌에 이상 생기는데.”
세라스는 킬킬 웃었다.
“괜찮잖아. 주인격님이신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알아서 고치겠지.”
기린의 힘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한서리였지만, 그런 그녀도 자신이나 남편의 건강이나,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에는 아낌없이 그것을 쓰고 있다.
김건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쉬고 있어. 일어나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아내를 안아 올려 벤치에 눕혀 두고 온 김건은 세라스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여전히 링 위에 남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세라스는 씨익 웃으면서 그것을 받았다.
“고마워.”
세라스는 음료를 마시며 링의 케이지에 기대어 있다가 문득 말했다.
“김건.”
“응?”
세라스가 빈 통을 던졌다.
소매 없는 상의가 땀으로 젖어 있다. 세라스는 옆에 걸어 놓은 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았다.
스파링을 하느라 풀어진 머리카락을 다시 한데 모아 정리하며, 세라스는 진지한 눈으로 김건을 바라보았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
“뭔데?”
“붙어 보자. 한 번만.”
“…….”
김건은 잠시 세라스를 바라보다 말했다.
“난 이미 은퇴한 지 오래야. 별 재미는 없을걸.”
“진짜로 붙자는 게 아니야. 링 위에서, 스포츠 룰로 한번 겨뤄 보자는 거지. 당연히, 마력은 사용하지 않을 거고.”
“하지만 난 이런 쪽은 전문이 아니…….”
“나도 전문 아니야.”
김건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라의 의지는 명확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넌, 내 동경의 대상이었어.”
“…….”
“내가 줄곧 서리를 따라다녔던 것도, 화신이 된 것도, 그리고 지금 계속 선계를 누비고 다니는 것도, 결국은 다 내가 그리고 있던 너의 모습을 따라잡기 위한 거였어.”
“세라스…….”
“그러니까 부탁할게. 많은 세월이 지났잖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줘.”
김건은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친구의 진심 어린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는 옅게 한숨을 쉬고는, 불편하다며 세라스가 바닥에 던져 둔 글러브를 집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포츠의 영역 내에서야. 난 이제 전사가 아니니까.”
“그래, 그걸로 충분해.”
별다른 준비는 필요 없었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던 김건은 글러브만 끼고 바로 링 위로 올라갔다.
세라스는 주먹을 부딪치며 씩 웃었다.
“봐주지 말라고.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봐주긴, 내가 봐주라고 해야 할 판인데.”
김건은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잡았다.
세라스 역시 자세를 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
“…….”
적막이 흐르는 링 위.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맞붙기 전에 상대의 체격과 움직임으로 신체 능력을 재 보고, 자세로는 기술의 정교함을, 그리고 숨소리와 눈빛 등의 기척으로 감각의 정밀함을 확인한다.
신중한 자들이 일 대 일로 맞붙게 되면 이런 탐색전만으로도 수십 분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공격하는 것 자체가 빈틈을 내포한다. 상대의 반응을 상회하지 못한다면 선수가 불리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탐색전 끝에 누군가가 먼저 움직인다면, 그건 그 사람이 오랜 수읽기 끝에 장군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는 말과 동일하다.
두 사람은 한서리를 훈련시키면서 이미 서로의 능력을 확인할 기회가 많았다.
그렇기에, 그러한 탐색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후.”
작게 호흡을 내뱉으며, 세라스가 앞으로 돌진했다.
그녀는 그동안의 관찰로 김건의 신체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신체 구조상 여성의 몸이 남성보다 기본적으로 불리하지만, 그녀는 키가 크고 근육량도 많았다.
마력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세라스는 육체 능력으로는 자신이 김건을 압도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상대는 언제나 미약한 힘으로 거인들을 쓰러트려 오던 골리앗 킬러다. 기초 능력치가 위라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쉭!”
세라스가 로우킥을 질렀다.
빠르고 안정적인 공격. 김건은 다리를 들어 올려 방어했다. 역시나 고수라는 것을 증명하듯, 팔과 다리를 쓰는 공격은 보조 기술 정도로만 사용해 왔을 것이 뻔한데 그 날카로움이 범상치 않았다.
방어한 김건이 신음 소리를 흘렸다.
“음.”
김건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세라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상대가 하수였다면, 그가 로우킥이나 잽을 날려도 김건이라면 카운터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라스는 지구를 넘어서 차원까지 넘나들며 경험을 쌓아 온 사람이었다.
똑같은 잽, 똑같은 로우킥을 날리더라도 그것을 날리기 전에 선행된 동작과 이후의 심리에서 하수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있다.
가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방어를 했는데도 다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프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로우킥 한방에 김건은 자신과 세라스의 신체 능력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대체 단련을 얼마나 열심히 한 건지, 키도 골격도 김건보다 작은데도 체중은 엇비슷한 것 같았다. 거기에 골격의 강도나 근육의 탄력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타타닷!
세라스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후퇴하는 김건을 따라붙으며 잽을 날려 왔다. 김건은 곧장 허리를 숙여 그것을 피하며 바로 태클을 걸었다.
그래플링, 그라운드의 영역에서는 기술의 차이가 신체 능력의 차이를 쉽게 메울 수 있기에 한 선택.
그리고 그건 세라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태클을 읽고 있던 그녀는 곧장 중심을 바꿔 아래로 내려온 김건의 얼굴을 향해 니킥을 꽂았다.
퍼억-!
세라스의 무릎이 김건의 얼굴에 꽂혔다.
하지만 김건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고개를 살짝 틀어 정타를 피한 그는 코피를 쏟으면서도 니킥을 차느라 들어 올린 세라스의 다리를 잡고 그대로 테이크 다운을 시도했다.
“……!”
김건은 언제나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농락하는 사람이었지, 지금처럼 맞으면서 들이댄다는 무식한 전법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측을 벗어난 과감한 수에 세라스의 판단이 일순 흔들렸지만 경험이 많은 그녀는 생각을 마치기 이전에 몸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남은 한 다리를 뒤로 뻗어 각도를 바꾸더니 전신을 날린 김건의 태클을 한 다리와 허릿심만으로 버텨 냈다.
“큭!”
균형을 잡기 위해 쿵쿵 뛰다 보니 세라스의 등이 링의 케이지에 부딪혔다. 세라스는 케이지에 기대어 선채 바로 김건의 목을 휘감으려고 들었다.
테이크 다운이 실패. 그리고 이번에는 이쪽이 목이 졸리게 생겼다.
김건은 팔을 끼워 넣어 방어하고 다른 식으로 서브미션을 이어 가려 했으나 세라스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팔이 끼워져 있는데도 목이 턱턱 막히며 조이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체 능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쳇!”
김건은 혀를 차며 공격을 포기하고 전력을 다해 세라스의 조이기에서 벗어났다.
그가 밀친 탓에 나가떨어진 세라스가 순식간에 낙법을 쳐서 몸을 일으켰다. 서로의 거리가 벌어졌다.
스탠딩 상태가 되면 힘이 앞서는 세라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세라스가 다시 한번 로우킥을 날렸다.
“……!”
그것을 가드한 김건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세라스는 절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김건에게 당한 녀석들은 전부 자신이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김건의 힘을 얕보고 있다가 당했다.
세라스는 달랐다.
‘절대로 욕심 부리지 않아!’
위험 부담을 안고 모험을 해야 하는 것은 불리한 김건이지 세라스가 아니다. 그저 안전한 공격만 반복해서 김건을 쓰러트리면 된다.
정석 중의 정석.
뻔하지만, 뻔한만큼 뚫기 어려운 완벽한 전술이었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 앞서고 있다.’ 라는 생각 자체가 함정이라는 것을 그때의 세라스는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건의 몸이 가속했다.
순식간에 찔러 들어온 주먹이 세라스의 턱을 치고 지나갔다.
“읏?!”
김건이 반격을 해 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허를 찔렸다.
확실히 김건의 육체 능력은 낮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해 김건이 뿜어 낼 수 있는 한계치의 능력이 순간적으로 세라스의 예측을 상회한 것이다.
김건이 숨겨 두었던 비도가 세라스의 심장을 찌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세라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완벽한 카운터를 맞았지만, 예측 못한 상황에도 반응한 몸이 조금이나마 데미지를 경감시켜 준 것이다.
세라스는 뇌진탕으로 무릎이 풀리는 와중에도 팔을 휘둘러 김건을 후려쳤지만 김건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붙들고 잡아당겨 순식간에 세라스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백 포지션을 잡더니, 세라스의 등 뒤에 매미처럼 들러붙어 곧바로 세라스의 목을 휘감았다.
완벽하게 초크가 들어갔다.
팔은커녕 손가락, 아니 턱도 안 들어갔다. 완전히 걸 수만 있다면 평범한 인간도 맹수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기술이다. 아무리 기운이 좋아도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커, 헉!”
하지만 세라스는 탭을 치지 않고 버텼다. 그녀는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자신의 힘을 믿고 김건의 팔을 뜯어 낼 듯이 잡아당겼다.
호흡이 막히고, 순식간에 귓가의 소리가 멍하게 들리며 눈앞이 검게 물들어 갔다.
‘아,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세라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정말 조금. 정말 조금 목을 조르는 팔에서 힘이 풀렸다.
세라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생긴 빈틈에 손가락을 비집어 넣더니, 순식간에 억지로 초크를 풀어 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김건의 팔을 붙잡고 그의 몸을 바닥에 내리꽂아버렸다.
콰아앙!
“커억!”
무시무시한 메치기에 링이 비명을 지른다. 충격을 받은 김건이 숨을 토해 냈다.
그렇게 된 그의 머리 위로.
무서울 정도로 난폭한 세라스의 주먹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