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95화 (195/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95화

외전 34화 우리 엄마는 한량 (18)

주먹은, 김건의 콧대를 무너트리기 직전에 멈췄다.

“…….”

맞았으면 그대로 얼굴이 함몰되었을 만한 위력이었다. 과거의 전성기 때처럼 건곤대나이처럼 초고난이도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승부는 김건의 패배로 끝이 났다.

헉, 헉, 세라스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김건은 니킥에 맞아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세라스를 올려다보았다.

세라스의 눈에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호흡을 토해 내며 주먹을 거두고 김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건은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몸을 일으켰더니 코피가 주르륵 흘러 링 위에 떨어져서, 김건은 손을 들어 피를 막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세라스가 말했다.

“녹슬었구나.”

단순히 실력이 줄었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김건은 여전히 강했다.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전투에서 떨어져서 살아온 인간의 실력이 아니다.

하지만 김건은 패배했다.

그는 분명히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결투에서 진 세라스를 배려해서인지, 아니면 혹 다른 것인지, 무언가의 이유로 마지막 순간에 판단이 무뎌졌고, 그것 때문에 세라스에게 졌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이래서 졌다, 저래서 졌다 하지만 승부사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결과뿐이다.

특히, 목숨을 담보삼 아 싸우는 전사들의 세계에선 말이다.

하지만, 녹슬었다는 세라스의 말에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야 사람이 된 거지.”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라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단순히 김건이 마치 자신을 봐준 것처럼 여겨져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훨씬 더 근본적인, 훨씬 더 복잡한 고민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김건은 세라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힘내라.”

툭, 하고 가볍게 세라스의 어깨를 두들긴 김건.

그는 그렇게, 링 위에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 * *

자정이 넘은 꼭두새벽.

잠에서 깨 버린 재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학교에서 있었던 예비 영웅 전투 훈련이 꽤 고되었기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 버린 것이 문제였다.

이 새벽에 불을 켜기도 그렇고, 패드를 가지고 노는 것도 질렸다. 가만히 있기에도 몸이 근질거려서, 그는 물이나 한잔 마실까 싶어 방을 빠져나갔다.

아무 생각없이 계단을 내려가 거실을 건너 주방으로 향한다.

그런데 문득, 거실 너머의 베란다에 무언가가 보였다.

은빛으로 내리쬐는 달빛, 그 아래에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어두운 밤하늘과 대조되어, 그 하얀 피부는 더욱 선명하고 매끄러워 보였다. 짧은 바지를 입어 희게 드러난 맨다리는 길고 아름답게 뻗어 마치 도공이 만들어 낸 조각품 같았다.

“……!”

재하는 순간적으로 여성의 미모에 눈을 빼앗겼다.

그가 그 여성을 세라스라고 인식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때였다.

베란다 밖에 앉아 있던 세라스가 재하를 발견했다. 그녀는 고개를 잠깐 갸웃거리더니 이내 웃으며 이리 오라고 재하에게 손짓을 했다.

재하는 쭈뼛거리며 베란다로 나갔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자고 있을 시간 아니야?”

“저녁에 너무 일찍 자서요, 어쩌다 보니까 그냥 눈이 떠졌어요.”

세라스는 흐응, 하고 흥미롭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혼자서 술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앞에 있는 작은 탁자에는 커다란 술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세라스가 가볍게 술잔을 흔들어 보였다.

“한잔할래?”

“…….”

재하가 난감한 표정으로 망설이자, 세라스가 픽 웃었다.

“농담이야.”

그녀는 윙크를 해 보이더니 가볍게 허공에 대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이전의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간이 열리고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세라스는 그 주머니에서 병 하나를 꺼내더니 비어 있는 술잔에 꼴꼴꼴 하고 잔을 채워 주고는 재하에게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자.”

세라스가 술잔을 내밀었다. 재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고는 술잔 안으로 찰랑대는 황금색 액체를 보았다.

“이건…… 술인가요?”

“설마. 그냥 음료수야.”

한번 마셔 보렴, 하고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냄새를 맡아 보자 달달한 향이 났다. 딱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아서 재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것을 한 모금 마셔 보았다.

겉보기에는 그냥 물처럼 보였는데, 막상 입안에 넣자 액체가 혀를 휘감아 왔다. 하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마치 말랑말랑한 촉감에 부드러운 단맛, 마치 질 좋은 푸딩을 입에 넣은 것 같았다.

“맛있지?”

“네, 맛있어요.”

“그거, 사실 몬스터의 체액이야.”

“체액이요?”

“그래, 사람이랑 비교하자면…… 침이나, 오줌 같은 거랄까.”

“푸웁!”

다시금 잔을 입에 대던 재하는 세라스의 말에 거창하게 입에 넣었던 것을 밖으로 토해 냈다.

사레가 들렀는지 콜록콜록하고 기침을 해 댔다.

그 모습에 세라스는 깔깔 웃으며 설명했다.

“그렇게 난리 칠 필요는 없어. 오줌은 장난이고,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벌 같은 거니까. 그냥 꿀이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 옆에 놓아 두었던 손수건을 건네줬다. 재하는 입가와 기침을 하느라 나온 눈물을 닦으면서, 왜 그렇게 짓궂은 장난을 치냐는 듯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미안미안. 그런데 이거 정말로 귀한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마셔도 돼.”

세라스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빈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럼, 이렇게 모였는데 건배라도 한번 할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술자리라고는 영상 매체에서 본 것이 전부인 재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손을 뻗어 세라스의 잔에 자신의 잔을 맞대었다.

짠-!

그렇게 건배를 한 세라스는 자신의 잔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금 쪼르르 술을 따랐다.

“…….”

그다음부터는 적막이 감돌았다.

언제 그렇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냐는 듯, 세라스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베란다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골 마을이라 빛이 없다. 바깥으로 보이는 건 오로지 칙칙한 어둠과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뿐이었다.

사르르 흘러내린 금발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뭔가를 진중하게 고민하는 듯한 옆모습에는 지금까지는 보지 못한 위엄이 감돌았다.

근래에 같이 살면서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재하는 이토록 아름다운 자람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라스는 정말로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보통이었으면 웃으면서 장난을 치거나, 시답잖은 영웅담을 늘어놓을 텐데.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것을 느낀 재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왜?”

“어쩐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요.”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궁상 떠는 모습을 다 보여 버렸네.”

혼자서 술이나 마시고 말이야.

세라스는 웃으면서 자신 앞에 있는 술잔을 흔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재하가 말했다.

“무슨 일인지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아이가 듣기에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아뇨, 괜찮아요. 알고 싶어요. 세라스 씨에 대해서는 뭐든.”

“…….”

그 말을 한 직후, 재하는 곧장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제멋대로 나와 버렸다.

그는 아직 어려서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접해 온 문물과 본능적인 감각으로,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정말로 부끄러운 말이라는 것은 알았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

얼굴이 뜨거웠다. 부끄러웠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그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건만, 혼자 수치스러워하며 재하는 이 말을 들어 버린 세라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세라스는 이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재하에게서 멀어져 다시금 바깥의 캄캄한 어둠을 향해 있었다.

빠르게 부끄러움이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느낀 재하는 얼른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세라스가 잔을 기울였다. 그러곤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재하는, 혹시 동경하는 사람이 있니?”

“동경하는 사람이요?”

“이렇게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 말이야.”

그 말을 듣자 선뜻 떠오른 것은 수많은 범죄자들을 체포하던 만화책 속의 탐정 영웅 세라스였다.

미래에 영웅이 되는 것이 재하의 꿈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만화책 속의 사람처럼 되고 싶은 건 아니어서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있었어. 동경하는 사람이.”

“…….”

세라스가 고개를 치켜든다. 마침 환하게 뜨인 보름달이 둥그렇게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세라스는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때는 나도 어렸을 때였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목 안쪽이 꺼끌꺼끌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목이 탄다. 재하는 세라스가 다시 따라 준 음료수를 마시고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강한 사람이었어.”

“많이 강했나요?”

“응.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렇게 강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어. 샌님같이 생겨서는, 고리타분한 소리나 늘어놓는 벽창호였지.”

세라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엇을 떠올리는지, 그녀는 술잔을 내려놓더니 문득 웃었다.

“그런데, 강했어. 그 어떤 괴물도, 그 어떤 전사도 녀석한테는 당해 내지를 못했어. 마력적성 F급의 전위가 말이야.”

재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력적성이 F급이었다고요?”

“그래.”

“F급이면 그냥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아무런 힘도 없는.”

“그렇지, 그런데 그런 F급 마력적성의 전사가 수많은 화신들을 쓰러트렸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니?”

“화신을 쓰러트렸다고요? 벨제불이나, 티아마트 같은?”

“응.”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재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재하도 안다. 역사시간에도, 영웅이 되기 위하 훈련 시간에도 지겨울 정도로 그 강대함과 위험성에 대해서 배우기 때문이다.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난, 그와 같은 강함을 바랐어. 무술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약자가 강자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그런데 녀석은 누구보다 약하게 태어나서는, 누구보다도 강해졌어. 내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무인 그 자체였지.”

“…….”

“내가 여기저기 선계를 헤매고 다닌 것도,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고 떠돈 것도 다 녀석처럼 강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세라스가 말을 멈췄다.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요동치는지, 음영이 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그 슬픈 얼굴을 보자, 재하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오랜만이었어, 그 사람을 만난 건.”

“…….”

“그리고 한번, 싸워 보자고 했지.”

다시 한번 세라스가 말을 잃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있다가, 겨우 한마디를 뱉어 내었다.

“그 녀석…… 약해졌더라.”

그 한마디에 담긴 감정.

그것은 아직 어린 재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다.

가슴이 텅텅 비어 버릴 것 같은 허망함.

그런 것이, 세라스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