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96화
외전 35화 우리 엄마는 한량 (19)
“물론 아직도 나보다는 강해. 오래전에 은퇴한 주제에……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그뿐이야. 내가 예전에 그렸던 그 절대적인 강인함은 더 이상 녀석에게 남아 있지 않아.”
“…….”
“확신할 수 있어. 앞으로 몇 년 뒤면, 내가 지금의 녀석을 완전히 넘어설 것이라고.”
세라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꽉 깨물고는, 애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표는 사라졌어. 내가 뒤쫓던 이상은 없는 거야. 그러면 난 이제 뭘 보고 살아가야 하지? 내겐 더 이상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아이도 없는데.”
황금색 눈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세라스는 초조한 기색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난 지금까지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왔을지도 모르…….”
“제가 될게요!”
갑자기 재하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제가, 강해져서. 그 사람보다도 더 강해져서, 세라스 씨의 목표가 될게요!”
세라스가 눈을 크게 뜬다. 재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무의미하다는 말 하지 마세요. 세라스 씨는 이미 충분히 멋진 사람이니까요.”
그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가식도 없었다.
아이의 순수한 외침이 어디까지 세라스의 마음에 닿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세라스는 커진 눈으로 한참이나 재하를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쓰게 웃더니, 손을 뻗어서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재하의 눈이 푸른 마력으로 빛났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세라스 씨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너를 위해? 왜?”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히 이야기하더니, 이번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은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답은 이미 알고 있지만 어쩐지 말하기를 꺼려 하는 것 같이 보였다.
재하가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말에 재하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세라스는 피식 웃었다.
“내 목표점이 되려면,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정도로는 부족한데, 괜찮겠어?”
놀리듯이 묻자 재하는 똑바른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저는 이 세계가 아니라, 저 바깥의 선계에서도 누구도 덤비지 못할 정도로 강해질 거거든요.”
“왜?”
“나쁜 녀석들은 이쪽만이 아니라, 밖에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재하는 언제나 경찰이나, 영웅 같이 못된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했었다.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강박과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어머니의 적극성을 동시에 물려받은 것일까.
그리고 세라스 역시, 한때 수많은 범죄자들과 싸우며 그들을 체포했었던 이력이 있다. 그녀는 조카뻘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강해져 보렴. 네 앞에서는 그 누구도 나쁜 짓을 못하도록, 그리고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목표가 되도록 말이야.”
재하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앤과 한서리의 세계 챔피언전 일정이 나왔다.
한서리는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며 마지막 열의를 불태워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훈련 도중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뜨거운 몸을 식히던 한서리가 발신인을 보고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건은 알리시아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김건 대신 코치 역할을 하고 있던 세라스가 물었다.
“누군데?”
“스칼렛 언니야.”
“어? 진짜?”
스칼렛 발렌타인.
과거 발할라의 교수이자 현재 마력 제한 격투기 협회의 이사, 에디 슐츠의 부인.
그리고 지금은 한서리의 라이벌인 앤의 어머니였다.
세라스가 물었다.
“평소에도 자주 연락했어?”
“아니, 나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딱히 수다 떠는 걸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 뒤로 그녀는 예, 예 하면서 스칼렛과 짧은 통화를 했다.
전화가 끊어진 뒤 세라스가 물었다.
“언니가 뭐래?”
“글쎄, 집으로 잠깐 와 줄 수 있냐는데?”
“이렇게 갑자기?”
세라스는 의아해 했지만 한서리는 음, 하고 신음 소리를 흘렸다.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목소리가 별로 안 좋았어.”
“안 좋았다고? 언니가?”
스칼렛은 성질이 더럽고 기가 세기로는 발할라에서도 손꼽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목소리가 안 좋다고 하니 세라스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훈련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서리는 수건을 내던지며 말했다.
“일단 가 보자.”
* * *
두 사람은 가볍게 샤워를 한 뒤 순간이동을 이용해 스칼렛의 집으로 이동했다.
스칼렛은 과거에 있었던 큰 전투로 몸이 별로 좋지 않았기 주변에 인적이라고는 없는 휴양지의 별장에서 살았다.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아담한 별장.
와본지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분명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다.
그런데, 한서리와 세라스가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그저 폐허가 되어 버린 별장의 잔해뿐이었다.
스칼렛은 휠체어를 타고 별장의 마당에 앉아 있었다. 작은 탁자 위에 티 포트를 꺼내 놓고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니 적의 습격을 받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따뜻한 차를 홀짝이던 그녀는 한서리와 세라스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세라스도 같이 왔네.”
오랜만이다? 하고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당에 들어선 두 사람이 스칼렛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서리는 그야말로 박살이 난 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집은 왜 저렇게 됐어?”
스칼렛은 피식 웃었다.
“왜긴 왜야, 바보들이 싸워서 그렇지.”
예전처럼 교수님, 교수님 하던 시절은 지나간 지가 오래다. 거의 7년 만에 얼굴을 본 건데도 세라스는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과자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바보들?”
“그래, 내 남편이랑 딸 말이야.”
한서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교수님이랑 앤이 싸웠다고?”
에디와 앤이 싸움을 벌이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몇 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크게 싸웠다는 말은 들어 본적 없다.
“그래, 아주 마력까지 펑펑 써 대면서 죽어라 싸우더라.”
S급 마력 적성을 가지고 맨몸 격투로 세계에서도 손꼽는 격투가들이 제대로 싸움을 벌이다니, 이곳이 도심이 아니었던 것이 다행이다.
한서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쳤네. 경기가 코앞인데.”
“그런 걸 생각할 줄 알면 이렇게 집을 박살 내 놓진 않았겠지.”
“아니, 앤이야 그렇다 쳐도 에디 교수님은 왜 어울려 준 거야?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잘 알았을 텐데.”
스칼렛은 쓰게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바보 천치여서 그렇다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네. 이건, 앤이 잘못한 거야.”
“왜? 어디서 뭐 남자라도 꿰찼데?”
생각 없이 중얼거리는 세라스의 옆구리를 찌르는 한서리. 하지만 스칼렛은 그 질문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큭큭 거리며 웃었다.
“그래,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흘러나온 것은 진득한 한숨이었다.
“앤이 선계 탐사자가 되고 싶데. 이번 방어전을 마지막으로 하고 말이야.”
“선계 탐사자? 갑자기 왜?”
“이곳 지구는 자기가 몸을 담기에는 너무 좁다나 뭐라나, 세계 챔피언이 되었으니 어지간한 건 다 해 본 거 아니냐 이거야.”
한서리가 물었다.
“듣기로는 다른 체급까지 석권한다고 했는데.”
“그건 남편의 희망 사항이지. 앤이 바라는 게 아니야.”
세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싸울 일이야? 에디 오빠야 좀 마음에 안 들 수 있지만, 충분히 이야기로 풀어 나갈 수 있는 문제잖아.”
“단순히 선계 탐사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 뭐, 남편이야 어떻게든 자기 품 안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난 아니거든. 나도 그렇게 집에서 뛰쳐나오기도 했고. 하지만 이 녀석이 스스로 생각해서 그 길을 결정한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거기까지 듣고 무언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한서리가 이맛살을 구기며 물었다.
“설마 앤 그 녀석, 선교단 녀석들이랑 얽힌 거야?”
“그래,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스칼렛. 그러자 세라스가 물었다.
“선교단은 또 뭐 하는 놈들이야?”
“별건 아니야. 요즘 젊은 애들이 다른 선계로 넘어가는 데에 로망이 있으니까, 그걸 부추겨서 아직 어떤 세상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선계로 건너가게 하는 거지. 그렇게 가서 죽으면 나 몰라라 하고, 뭔가 얻을 만한 게 있으면 다 자기 거라고 주장하면서 권리는 다 가져가는 사기꾼들이지.”
“다른 선계로 넘어가는 건 불법 아니야?”
“당연히 불법이지. 그런데 아직 생긴 지 얼마 안 된 법이라 조항에 빈틈이 많아. 제대로 된 변호사만 몇 명 구해 두면 아무런 문제도 없어.”
“위대한 모험이니, 새 시대의 개척자니 하지만 말만 번드르르한 사기꾼 새끼들이야.”
그렇게 말한 스칼렛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내 멍청한 딸년이 그따위 헛소리에 넘어갈 줄은 몰랐네.”
한서리가 살짝 눈치를 주었다.
“대화는 해 봤어? 예전처럼 욕하고 소리소리 질러 가면서 달달 볶은 건 아니지?”
“아니야. 전에 그랬다가 가출하고 난리가 났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나도, 남편도 많이 참았어. 어떻게든 말로 하려고 했지.”
붉은 머리의 스칼렛.
미친 개 소리를 들었던 그녀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 그녀는 주름이 지기 시작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잘 안 되더라. 말이 안 통해. 완전히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차분하게 설명을 해 줘도 듣지를 않아. 남편도 처음에는 잘 참더니, 애가 억지를 쓰기 시작하니까 화가 폭발해서 집을 이 꼴을 만들어 놓은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지친 몸을 휠체어에 묻었다. 거친 움직임에 휠체어가 미끄러질 뻔해서, 옆에 있던 세라스가 그런 그녀를 잡아 주었다.
스칼렛은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봐. 애가 워낙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좋아서 내버려 뒀더니, 결국에는 이런 일이 생기네.”
그 말에는 한서리도 공감한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막상 해 보니까, 애 키우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긴 하더라.”
“너한테도 그래?”
스칼렛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서리가 누구인가. 한때 전 세계를 뒤에서 마음대로 주물렀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마저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담으니 느낌이 이상했다.
한서리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 너무 신경 써 줘도 문제, 너무 신경을 안 써 줘도 문제. 혼을 내도 문제고 혼을 내지 않아도 문제니까. 뭐 하나 분명한 게 없어. 모든 부분이 다 애매해. 내 새끼니까, 제대로 안 보이는 것도 너무 많고.”
힘들었다는 말은 정말인지 말을 잇는 한서리의 표정에도 고생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스칼렛은 큭큭 웃었다.
“그래, 나도 지금 오니 알겠더라. 내가 어렸을 때 얼마나 말괄량이였는지 말이야.”
“…….”
침묵이 흘렀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한서리가 물었다.
“그래서, 대충 상황은 알겠는데 날 부른 이유가 뭐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부탁?”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말을 이었다.
“이번 챔피언전에서, 네가 앤을 좀 이겨 줘야 할 것 같아.”
“…….”
“녀석은 지금까지 져 본 적이 거의 없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이 언제나 옳은 건줄 알지.”
한서리는 왜 스칼렛이 자신을 불렀는지 깨달았다.
얼마전, 그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유미를 잠재우기 위해 나탈리아를 불렀다.
그것과 똑같았다.
지금 스칼렛은, 한서리와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주 박살을 내 버려. 숨도 못 쉴 정도로 발라 버리면 제일 좋겠지. 한번 제대로 처맞아 보면 그제야, 듣는 귀가 뚫리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