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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97화 (197/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97화

외전 36화 우리 엄마는 한량 (20)

이번 챔피언 결정전은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모이는 빅 매치였기 때문에 계체량과 함께 공동 기자 회견이 있었다.

앤의 차례에 기자들이 물었다.

“이번 방어전에 성공하면, 다른 체급 석권에 도전한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러자 앤은 훗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새로운 목표가 생겨서요.”

그 말을 꺼내자마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앤과 같이 있던 코치가 귀엣말로 뭐라고 속삭였지만 앤은 깔끔하게 그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이번 경기가 끝나고 나면 저는 선수가 아니라 영웅으로서, 다른 선계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다른 선계요? 설마 선계 탐사자가 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제가 뛰어 놀기엔, 이 지구라는 행성은 너무 작은 것 같아서요.”

그와 같은 선언에 모여 있던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저거, 괜찮은 건가? 그러고 보니 요즘 선교단 놈들이랑 어울린다고 하던데.”

“그놈들, 사기꾼으로 유명한 놈들이잖아.”

“협회장이랑 슐츠 이사는 이걸 알고 있는 건가?”

“알긴 아는 것 같아. 표정이 저렇게 썩은 걸 보면.”

그렇게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가운데, 앤은 이번 경기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굴며 아주 거만하게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에는 한서리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한서리는 침착하게 질문을 받기 시작했고, 그녀의 차분한 태도에 혼란스러워하던 분위기도 점차 잦아들어갔다.

기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주제는 당연히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앤 선수에게는 계속해서 패배하기만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서리는 훗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 딸아이가, 이제 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서리는 의아해하는 기자들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창 자신감이 넘칠 나이라, 그런 아이를 꾸짖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혹시나, 너무 많이 혼을 내면 이 아이가 자신감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꾸 마음이 여려지게 되더군요.”

“…….”

그 말인즉슨, 앞날이 창창한 앤이 자신감을 잃을까 봐 계속해서 봐줬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뜻을 알아챈 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기자들은 흥미로운 기색을 띠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혼쭐을 내줘야 할 것 같네요.”

“……! 한시민 선수가 도발을 했어?”

한서리의 가명을 말하며 기자들이 감탄했다.

한서리는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기 위해 선수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딱히 자신의 스타성을 어필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자 회견이나 인터뷰가 있어도 모범생 같은 답변만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 얌전한 캐릭터가 갑자기 도발을 내던지니 흥미가 돋지 않을 리가 없다.

기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한서리의 말에 집중했다.

한서리는 씨익 웃으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앤을 바라보았다.

“건방진 꼬마아이를 바로잡는 데에는, 매만큼 좋은 약이 없다고들 하죠.”

“이게……!”

흥분한 앤이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에디와 코치가 말렸다. 하나 한서리는 앤이 화를 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지금까지 공식 경기에서 두 번 KO를 당했군요. 이번이 세 번째 승부고요.”

그녀는 그러면서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예고 하나 하겠습니다. 1라운드, 그리고 10초입니다. 1라운드의 10초 이내에, KO로 이번 경기를 끝내겠습니다.”

당돌한 KO 선언에 기자들이 당황했다.

“그, 그거 가능한 이야기이긴 합니까?”

그 질문에 한서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래 봬도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이 한 명 교육시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죠.”

“이런 씹, 이 아줌마가 보자 보자 하니까!”

참지못한 앤이 만류를 뿌리치며 한서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내리친 주먹이 탁자를 부숴서 마이크가 튕겨져 나가고, 서로의 코치진이 뛰어들며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기삿거리를 발견한 기자들이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대고, 누군가는 동영상을 찍는 가운데.

앤과 한서리의 공동 기자 회견은,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 채 마무리가 되었다.

* * *

유미는 체스판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가운데에는 큼지막한 체스판이 있고, 그 옆에는 각자의 남은 제한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가 놓여 있었다.

서로 시간은 거의 없다. 약 10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체스판을 내려다보는 유미. 그녀는 제한시간이 5초가 남은 시점에서, 체스 말을 움직이고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유미가 수를 두자마자 바로 말을 움직이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이제, 남은 제한 시간은 거의 두 배 가깝게 차이가 났다. 유미가 일순 숨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호흡을 크게 들이켜며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남은 제한 시간을 모조리 소요하기 전에, 앞으로의 계획을 마치고 다음 수를 두었다.

그다음부터 펼쳐진 것은 숨 쉴 틈도 없는 수 싸움이었다.

두고 누르고, 두고 누르고의 반복.

두 아이는 손을 멈추면 당장이라도 게임에서 지는 것마냥 연속하여 말을 움직였다.

마치 근접거리에서 칼을 주고받는 것과도 비견될 정도로 살벌한 장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유미가 수를 둔 뒤 반사적으로 자신의 말을 향해 손을 뻗어 가던 남자아이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음이 터져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대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유미는 그대로 그 손을 마주 잡아 악수를 했다. 꾸벅 인사를 하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후우.”

이제 막 승부가 끝난 참인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이마가 뜨끈뜨끈하다.

주변에는 그녀처럼 체스를 두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유미는 장내를 돌면서 상황을 지켜보던 자신의 스승, 나탈리아를 찾아갔다.

유미를 발견한 나탈리아는 이겼냐 졌냐 묻지도 않고 말했다.

“내일 결승전이 있으니까, 오늘은 일찍 가서 자.”

“네.”

유미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나탈리아의 옆에 있던 체스 마스터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는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 주고는, 축하한다고 어깨를 두들겨 주고 가 버렸다.

나탈리아를 뒤로하고 경기장의 출구쪽으로 나가자 한서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멀찍이서 유미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서리는 유미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짧게 축하를 한 뒤에 히죽 웃었다.

“그가 예의가 많이 발라졌네. 혹시, 나탈리아한테 많이 혼났어?”

“그런 거 아니야.”

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내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경기를 지켜보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거나 하고 있었다.

유미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있는 사람들 중…… 나보다 못한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

“마지막에 나랑 겨뤘던 애도…… 강했어. 까딱하면 내가 졌을지도 몰라.”

예전의 유미는 이렇게 쉽게 상대를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서리는 조금 감탄했다.

확실히 달라졌다. 나탈리아를 만나게 했던 것은 역시 유효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서리는 유미와 함께 건물을 빠져나오며 물었다.

“결승은, 내일이지?”

“응.”

유미뿐만이 아니다. 내일은 한서리도 앤과의 챔피언 결정전이 있었다.

“나랑 겹치네. 아빠가 코치를 서 줘야 하니까, 아마 내일은 나탈리아가 챙겨 줄 거야.”

“응.”

아직도 승부의 여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유미는 조금 긴장된 기색으로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그러다가 겨우 깨달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내일 챔피언 결정전이지?”

“그래.”

한서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유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맨 처음 격투기 선수가 되겠다고 할 때는 그냥 농담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말로 선수가 돼서 세계 챔피언까지 도전하게 됐네.”

“그러게, 나도 내가 이 정도로 열심히 할 줄은 몰랐는데.”

한서리는 킥킥 웃었다. 유미가 말했다.

“어제, 학교에서 누가 엄마 이야기를 하더라.”

“응?”

“남자애였는데, 격투기 시합을 자주 보나 봐. 엄마 보고 엄청 멋있다고, 이번에 열리는 빅 매치를 진짜 기대하고 있다고 신이 나서 떠들고 있던데.”

한서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말했어? 그 사람이 우리 엄마라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딸을 쳐다보는 한서리. 유미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안 했어. 앤 언니한테 맨날 지는 만년 2등인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말해?”

언뜻 차갑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냥 쑥스러움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는 것을 한서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두고 봐, 이번에는 완전히 다를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승자는 이 엄마라고.”

유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겨.”

“응?”

“이기면, 우리 엄마가 세계 챔피언이라고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녀 줄 테니까, 꼭 이겨야 해. 안 그래도 요즘 마이아랑 다시 경쟁이 붙었거든. 세계 챔피언쯤 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겠지.”

짓궂데 웃으면서 말하는 유미.

그런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서리가 말했다.

“그러면 우리 따로 이겨야겠네. 나도 딸 자랑 좀 하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내일 챔피언이 된 다음에, 우리 딸이 오늘 어린이 체스 대회에서 세계 1등이 됐어요, 라고 자랑하면 아마 반응이 꽤 좋을 거야.”

“그럼, 우리 둘 다 최고가 되는 거야?”

“그래, 최고의 모녀가 되는 거지.”

한서리가 히죽,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것과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유미가 말했다.

“여기서 지는 사람은 한 달 동안 아빠 밥 안 먹기야. 아빠한테 어리광 부리는 것도 안 돼.”

“그래? 그럼 간만에 남편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네. 꼬마들 방해 없이. 아, 재하한테는 미리 양해를 좀 구해야겠는걸?”

“흥, 꿈도 꾸지 마.”

서로 독설을 나누는 두 사람이었지만, 한쪽이 주먹을 내밀자 나머지 한쪽도 가볍게 손을 내밀어 서로의 주먹을 맞대었다.

* * *

앤과 한서리의 결승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한서리는 대기실에서 쉬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바깥에서 함성 소리와 발을 구르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세미파이널이 끝났나 보네.”

워밍업을 해서 따끈따끈해진 몸을 휘두르며 한서리가 바깥쪽을 돌아봤다.

그런 그녀를 세라스와 김건이 지켜보고 있었다.

세라스가 말했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예고한 것처럼 이길 수 있겠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애 하나 잡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어?”

세라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걸 못 잡아서 선계에 있던 나를 불러온 거 아니었어?”

“에이, 그건 내가 괜히 고집부려서 그렇게 된 거고. 제대로 상대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예전에는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넉살이 많이 늘었다.

세라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흥, 그러다가 또 한 대 맞고 뻗지나 마셔.”

세라스가 툴툴거리는 동안 김건이 가까이 왔다.

“어젯밤에 유미가 말하던데, 나를 두고 둘이서 내기를 했다고.”

“응, 아빠 한 달 이용권을 걸고 내기를 했지.”

김건은 어깨를 으쓱였다.

“상품이 될 정도로 내가 귀한 존재였는지는 몰랐는걸.”

“그래, 당신은 항상 자기 자신의 가치를 모르지.”

한서리는 김건의 멱살을 잡아 남편의 얼굴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코와 코가 닿을 거리, 뜨겁게 달궈진 근육에서 김을 피워 올리며 여느때의 차가운 미소가 아닌 야수같이 사나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대하고 있어. 만약에 내가 여기서 이기면, 당신은 한 달 동안 내거니까.”

“……!”

그녀는 그러면서 남편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라스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헛짓거리들 하지 말고, 얼른 나가! 메인 매치가 곧 시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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