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98화
외전 37화 우리 엄마는 한량 (21)
우렁찬 환성을 받으며 앤과 한서리가 링 위로 올라갔다. 경기장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했다.
앤은 눈에 불을 켜고 한서리를 노려봤다.
그에 반해 한서리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앤에게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해 보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와아아아아!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행해진 도발에 바깥의 관객들이 열광한다.
심판은 계속하면 경고를 주겠다며 한서리를 말렸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저 재미있을 뿐이었다.
신경질이 난 앤이 링 밖으로 침을 뱉었다. 그녀는 이를 벅벅 갈아 대며 한서리를 노려보았다.
링 바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라스가 말했다.
“좋은데, 도발이 아주 잘 먹히고 있어.”
“도발은 언제나 잘 먹혔어. 하지만 막상 싸움에 들어가면 금방 냉정해질 거야. 그런 점에서는 스칼렛 누님과 똑 닮았으니까.”
김건은 그렇게 말하며 링 건너편에서 앤을 올려다보고 있는 에디를 바라보았다.
김건의 시선을 눈치챈 그는 이 계집애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듯이 자기 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김건은 그 상대라면 여기에 있다는 듯이 턱짓으로 자신의 아내를 가리켰다.
아마 앤의 어머니인 스칼렛도 집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관객, 그리고 각자의 가족들의 기대가 링 위에 집중되었다.
그러한 시선을 받으며 한서리는 입가를 만져 마우스피스를 고쳐 끼웠다.
그리고 잠시 후.
때앵-!
타앗!
앤은 공이 울리자마자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인사고 뭐고 없다. 그녀는 순식간에 달려들어 한서리를 향해 냅다 하이 킥을 꽂아 넣었다.
맨 처음, 링 위에서 한서리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대시.
어지간히도 약이 오른 모양이다.
어떻게든 모욕을 주고야말겠다는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한서리와 지금의 한서리는 달랐다.
훗, 하고 한서리가 웃었다.
“바보냐?”
그녀의 상체가 회전하고, 쭉 뻗은 다리가 번개처럼 내쏘아졌다.
쩌어억!
한서리가 날린 하이 킥이 정통으로 앤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고개를 틀어 중심을 낮추며, 반대로 들어 올린 발로 상대를 걷어찬 것이다.
하이 킥을 하이 킥으로 맞받아쳤는데 그게 그대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그림과도 같은 예술적인 카운터.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
주먹 한 대만 제대로 들어가도 단련된 선수조차 발라당 드러누워 버리는 것이 이 바닥이다.
거기에 하이 킥.
하이킥은 타격기 중에서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맞추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정타로만 들어가면 단박에 경기를 끝내 버리는 아주 강력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걸 카운터로 먹여 버렸다.
뒤편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심판은 한서리의 하이 킥이 들어가고 앤의 신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양손을 들어 올려 경기를 끝내려고 했었다.
터억!
넘어지던 앤이 지면을 손으로 디디며 뒤로 굴러 한서리의 사거리에서 벗어나기 전까진 말이다.
“……!?”
그걸 맞고 버티다니, 사람의 맷집이 아니다.
심판은 놀랐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현실이었다.
앤은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우와아아아!
시작부터 터져 나온 화끈한 하이 킥에 앤이 투혼까지 발휘하자 경기장의 분위기가 더욱 거세게 달아올랐다.
링 아래의 세라스가 중얼거렸다.
“공격이 사각에서 날아왔는데도 순간적으로 턱을 당겨서 피해를 줄였어. 감이 좋은데.”
“에디 형님의 딸이니까, 보통 방법으로 가르치진 않았겠지.”
과거, 에디에게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있는 세라스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으으 하고 치를 떨었다.
방심한 탓에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커다란 피해를 입은 앤.
가까스로 버티고 일어서기는 했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공격을 너무 제대로 받아 버렸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맞은편의 한서리를 노려보았다.
“…….”
어지간한 선수라면 그대로 달려들어 끝을 보려고 했을 텐데, 한서리는 웬일인지 거리를 유지한 채 앤을 관찰했다.
관중 및 해설은 의아함에 웅성거렸지만 앤은 알았다.
그녀는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뺨을 움직여 웃었다. 마우스피스를 낀 채 입모양만 가지고 말했다.
‘아줌마, 또 한 대 맞고 뻗기는 무서운가봐?’
지그시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한서리. 앤이 계속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그렇게 잘난 듯이 이야기하더니, 벌써 10초가 넘었는데.’
10초 만에 경기를 끝내겠다던 한서리의 예고는 이미 틀렸다. 앤은 그것을 가리켜 비웃었다.
하지만, 한서리는 눈곱만큼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예고?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덕에 네 페이스를 흐트러트릴 수 있었다는 거지.’
그러면서 천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하거든.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어설프게 싸워 줄 거라는 기대는 버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걸?’
‘흥, 패배한 개의 헛소리야.’
‘아니, 진심이 담긴 충고야. 아무리 그래도 지인의 딸인데, 어디 가서 주제도 모르고 나대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잠자리가 사나우니까.’
그러면서 한서리는 바깥에 있는 에디를 턱짓해 보였다.
앤은 자신과 부모님 사이의 불화가 한서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우스피스 사이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가, 뭔데, 참견이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거리를 좁히려는 찰나,
쩌억!
로우 킥이 앞다리에 꽂혔다.
“……!”
방어고 뭐고, 제대로 맞아 버렸다.
짜릿한 고통이 머리를 저릿저릿하게 울린다. 미칠듯이 다리가 아팠다. 앤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윽, 큭…….”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고르는 앤을 향해 한서리가 달려들었다.
잽, 그리고 스트레이트, 미들 킥이 연달아 터지며 충격을 받은 앤이 비척비척 뒤로 물러난다. 한서리는 가드 위를 무자비하게 두들기며 앤을 케이지까지 몰아붙였다.
“한시민 선수! 한시민 선수! 계속 밀어붙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설욕전인가요!”
항상 앤에게만 패배하던 한서리가 기세를 타자 흥분한 해설이 그녀의 가명을 부르짖었다. 사람들의 환성 역시 더 커진다.
하지만 막상 린치를 당하고 있는 앤은 의아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뭐지? 전혀 무게가 실려 있지 않잖아.’
계속 공격을 받고 있는데 전혀 위협적이지가 않다.
최초에 그녀를 쓰러트린 하이 킥과, 기세를 끊은 로우 킥에 비하면 그야말로 솜방망이나 마찬가지인 타격이 이어졌다.
“이익!”
계속 맞고만 있다간 심판이 경기를 멈출 수도 있으니, 중간중간 주먹을 뻗으면서 저항을 해 보았다.
일부러 카운터를 끌어들일 수 있을 만한 큰 공격을 질러 보았는데도, 한서리는 카운터를 노리기는커녕 오히려 거리를 벌리며 그녀에게 여유를 주었다.
눈이 마주친 한서리가 씩 웃는다.
앤은 한서리가 일부러 그녀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아줌마가……!’
날 뭘로 보고!
울화통이 끓어오른다. 동시에 차갑게 머리가 식었다. 앤은 이를 꽉 깨물고 몸 상태를 회복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1분 정도를 버텼을까, 그쯤 버티자 최초에 터진 하이 킥의 데미지도 다소 해소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런 그녀가 번개처럼 다시 치고 나가려 할 때,
다시 한번 섬광 같은 로우 킥이 꽂혔다.
“악……!”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제대로 들어갔다. 깜짝 놀란 앤이 한다리를 들고 뛰며 한서리를 쳐다보았다.
한번은 우연이었다 쳐도 똑같은 걸 두 번이나 당했다.
기세를 끊는 타이밍, 그리고 빈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각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로우 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퍼퍼퍽!
……그리고 잽까지도.
방금 전까지의 무게 없는 보여 주기식 타격을 버리고 한서리가 제대로 기어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돌며 로우 킥으로 기세를 끊고 잽으로 견제를 하니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데뷔전 때도, 지역구 챔피언십에서도 결정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견제는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격의 틈에 살짝 멈춰 선 한서리가 왼팔과 왼다리를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 의도는 뻔했다.
‘왼쪽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그런 말도 몰라?’
‘언제 적 헛소리를!’
상태를 보아하니 자신을 제대로 꺾기 위해 한서리는 타격기만 가지고 승부를 보려는 모양이었다.
자기 특기 영역에서 싸우게 된 앤은 이를 앙다물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운영을 시작했다.
먼저 로우 킥. 한서리가 방어한다.
앤은 원 탭을 밟아 뛰어 들어가는 척하며 한서리의 호흡을 흐트러트린 뒤, 바로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엇박자 공격으로 잽을 날렸다.
퍼엉!
가드 위를 때렸는데도 손맛이 좋았다. 그건 앤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열악한 상대를 때릴 때의 손 느낌이었다.
‘힘으로 짓이겨 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드는데, 곧바로 한서리가 잽을 날려 왔다.
대충 패링으로 튕겨 내며 접근. 동시에 날아온 로우 킥을 가드한다.
“으으윽!”
아까 정타를 두 대나 허용한 것이 너무 컸다. 막았는데도 다리가 욱신거리며 아려 왔다.
앤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또다시 잽이 날아왔다.
툭, 툭.
가벼운 잽. 하지만 그런 것도 계속 맞다 보면 데미지가 쌓인다. 그러면서 한서리는 계속해서 거리를 벌렸다.
난타전에는 자신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아웃파이트로 처리하겠다는 모습이다.
그런 겁쟁이는 가까이 붙기만 하면 순식간에 박살 내 버릴 수 있다.
앤은 다소의 피해를 각오하고 억지로 거리를 좁히려고 스텝을 밟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한서리는 곧바로 태클을 걸어 왔다.
앤의 특기는 타격이지, 그래플링이 아니다.
방어는 곧 잘 하지만 역으로 공격을 거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기에 지금까지 앤은 대부분의 경기를 타격으로 끝냈다.
“……!”
허리를 잡힌 앤이 깜짝 놀라 하체를 뒤로 빼며 한서리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한서리는 의외로 쉽게 앤을 놓아 주며 거리를 벌렸다.
가까이 가면 태클, 멀어지면 잽과 로우 킥의 견제.
한서리는 그것을 반복했다.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끝나고, 3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계속.
단 한 번의 미스도 없고, 욕심을 부려 뛰어드는 것도 없다. 그녀는 보는 사람이 지독하다고 느낄 정도로 똑같은 전술을 반복했다.
앤의 다리는 이미 퉁퉁 부어올랐다. 가벼운 잽에 계속 두들겨 맞은 얼굴도 점차 붓기 시작하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야말로 잽과 로우 킥의 지옥 속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
마치 끈적끈적하게 몸을 감싸 오는 늪에 빠진 것만 같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4라운드의 시작에 앞서 다시금 링 위에 올라온 앤이 생각했다.
타격전은 그녀의 특기였다.
제아무리 대단한 녀석이라도 스탠딩 상태에서 제대로 붙으면 주먹을 몇 번 주고받기도 전에 나가떨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장기인 타격으로.
라운드 사이의 쉬는 시간,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아버지, 에디의 목소리가 언뜻 머리를 스쳤다.
‘기본기가 부족한 거야. 그러니까 말렸을 때 풀어 갈 줄을 모르지.’
그러고 보면 에디는 항상 말했었다.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기본기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라고 재미없는 기본기만을 반복적으로 연습시켰다.
물론, 앤은 금방 그 잔소리가 지겨워져 그것을 금방 때려치웠지만 말이다.
그녀는 항상 생각했다.
‘기본기 따위에 의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데 왜?’
그녀는 마치 자신들이 장인이라도 된 듯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기본기를 갈고닦는 선후배들이 한심해 보였다.
그렇게 죽자고 노력하면 뭐 하나, 막상 붙으면 반응 속도가 느려서 크게 휘두른 공격에 카운터도 안 나오고, 센스라고는 죽어라고 없는 데다 쓸 줄 아는 기술도 몇 개 없어서 앞으로 뭘 할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에디를 포함한 코치진은 계속해서 훈련을 등한시하는 앤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앤은 정말로 기본기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에디는 지금 체급에는 제대로 된 실력자가 별로 없어서 그렇다, 다른 체급으로 가면 정말로 쓴맛을 보게 될 거라고 말했지만 이미 그의 말은 앤의 신용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백날 잔소리하고 걱정하면 뭐 해.
막상 부딪혀 보면 다들 별것도 아니고 쓰러지기 바쁜데.
눈앞에 있는 한서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나은 편이었지만, 결국은 조금만 먹이를 쥐고 흔들면 금세 낚여서 한 방에 뻗어 버리는 바보들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앤의 눈에는 한서리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처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