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99화
외전 38화 우리 엄마는 한량 (22)
일순 커다란 압력을 느꼈지만 앤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양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치며 나약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링 반대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서리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격투기를 배우기 시작한 지 고작 일 년정도 밖에 되지 않은 아줌마다.
내가 저런 초보자한테 질 리가 없다.
조금 실력을 쌓긴 한 모양이지만 지금까지 당한 것은 자신이 방심했기 때문이다.
침착하게만 하자.
그러면 이길 수 있어.
정신 무장을 마친 앤이 앞으로 나섰다.
공이 울리고, 다시금 경기가 시작되었다.
“…….”
앤은 냉정해졌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던 이전 라운드와는 달리 침착하게 싸움에 임했다.
파파팟!
두 사람의 주먹이 얽힌다.
앤은 똑같은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한서리와 잽을 주고받으며 이길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공방을 주고받는 팔다리가 너무나도 느렸다.
상대의 견제로 체력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3라운드 내내 두들겨 맞기만 했으니 포인트로는 당연히 이길 수 없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앤은 자신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인정했다.
이기려면, 약간의 요령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쉭, 쉭!
한서리가 뻗은 잽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앤은 일부러 그것을 맞았다.
“크윽!”
신음 소리를 내지만 연기다. 그녀는 한서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최대한 공격을 몸으로 받아 냈다.
퍼퍼퍽!
연속으로 잽과 로우킥을 맞아 줬더니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그쯤 되자 연기 할 필요도 없었다. 흐려진 눈으로 절뚝절뚝 앤이 뒤로 물러났다.
우우우!
바깥쪽에서 관중들이 안타까워하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봐도 그로기 상태.
언제라도 경기를 중지시킬 수 있도록 심판이 긴장하고, 조마조마해진 사람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경기장 안쪽을 바라보았다.
경기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경기의 끝을 알리는 클라이맥스가 다가온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 분위기에는 선수도 영향을 받는다.
온몸의 감각이 열린듯 눈앞이 환하게 보이고, 온갖 소리가 귀를 적시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승기를 잡은 쪽에서는 굉장한 전능감을 느끼며 무서울 정도로 기세를 끌어올리게 된다.
그 상태가 되면 아무리 목석이라도.
조금은, 조금은 과감한 수를 던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림과도 같은 역전승의 발판이 되어 왔다.
앤의 노림수가 적중했다.
분위기가 바뀌자, 지금껏 계속해서 견제만 반복하던 한서리의 동작이 슬금슬금 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휘두른 훅에 맞은 앤이 휘청거리고, 뒤로 물러나는 순간.
끝을 낼 모양인지 한서리는 크게 앞으로 내디디며 어깨를 회전시켰다.
앤의 눈이 번뜩였다.
‘걸렸다!’
그것만 봐도 안다.
앞으로 쭉 뻗는 스트레이트가 앤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들어오는 타이밍이 뻔했다.
몇 번이고 한서리를 쓰러트려온 앤은 그녀가 언제나 이런 타이밍에 공격을 내밀고 뻗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바보 같으니, 이 정도면 완전히 습관이잖아!’
그 뻔한 습관을 고치지 못한 것이 한서리의 패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카운터를 날렸다.
두 주먹이 공중에서 교차한다.
서로의 팔이 뒤섞였다.
퍼억!
통쾌하게 터져 나온 파육음이 링 위를 울렸다.
그리고, 얼굴에 주먹이 꽂힌 것은 앤이었다.
통렬한 크로스 카운터가 작렬.
완벽한 타이밍. 완벽한 각도.
그것은 한서리가 세라스와의 스파링으로 빚어 낸 반격의 칼날이었다.
스스로의 상황도 인지하지 못한 앤이 허수아비처럼 뒤로 나동그라졌다.
심판이 손을 들어 올리고, 무시무시한 환호성이 경기장을 울렸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수많은 스포트라이트와 환성을 온몸에 받으며, 한서리가 쓰러진 앤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마지막 앤의 공격에 스쳐 찢어진 눈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안일하긴. 그러니까 아직 꼬마라는 거야.”
* * *
“이겼어어어!!”
“졌어어어어!!”
집에 돌아온 한서리가 좋아서 펄펄 뛰었다.
반면 유미는 울상이 되어서는 엉엉 울었다. 집은 두 여자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한서리가 받아 온 벨트를 들어 보였다.
“자, 유미야! 봐 봐! 이게 세계 챔피언 벨트야! 멋지지?”
유미는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보기 싫어!”
“너무하네, 엄마가 그렇게 고생을 해서 따 온 벨트인데.”
“이 아줌마가! 딸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응, 재미있어. 으하하하하핫!”
“빌어먹을~!”
정말 평생에 보기 드물 정도로 텐션이 올라간 한서리와 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유미가 왁왁거리며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 재하는 알리시아를 돌보고 있었다.
“오빠! 오빠! 이거, 먹여 줘!”
알리시아는 재하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서리나 세라스는 “세상에, 미쳤나 봐! 진짜!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라고 중얼거리며 소름이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맨 처음부터 아기나 다름없는 모습의 알리시아를 본 재하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는 자기보다도 한참 작은 알리시아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와 놀아 주었다.
알리시아가 원하는 대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넣어 주자 알리시아는 활짝 웃었다.
“맛있어?”
“응! 마시써!”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영악하기 그지없는 동생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함에 무뚝뚝한 재하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알리시아는 귀엽네.”
“나, 귀여워?”
“그래.”
재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리긴 하나 조각 같은 얼굴을 가진 소년이 웃어 주자 알리시아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알리시아는 히히 웃으면서 재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기분 좋아?”
“응!”
정말로 행복한 모양이다. 알리시아는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도, 세라스도, 재하도 잘해 주니까 정말 좋아!”
“그래, 잘됐네.”
고개를 끄덕이며 재하는 부드럽게 알리시아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알리시아는 마치 사람 손길이 닿은 아기 동물처럼 후아아 숨을 토해 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맨 처음에 재하는, 그것이 그냥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였다.
“응?”
갑자기 허벅지에 무게가 실렸다.
품에 안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 같아서 재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갑작스럽게 눈앞에서 검은 그림자가 부풀어 올랐다.
“으왓!”
깜짝 놀란 재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반사적으로 알리시아를 보호하려고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는 움직임을 취했지만, 금방 깨달았다.
갑자기 부풀어 오른 그림자의 정체가 바로 알리시아라는 것을 말이다.
“무슨…….”
충격을 받은 재하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괴상한 차림을 한 금발의 미녀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
그 꼴이 왜 괴상한고 하니, 그녀는 전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옷이 모두 찢어져서 너덜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다. 원래는 맞았던 옷이, 급격한 몸의 성장을 버티지 못하고 사정없이 찢어져 버린 것이다.
“아…….”
여자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렀다.
재하의 비명 소리를 듣고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금발의 여자에게로 꽂혔다.
여자는 녹색 눈을 깜빡이며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못 볼 꼴을 본 것마냥 얼굴로 손을 감싸고 있는 세라스와 한서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난감한 표정의 김건, 신기한 것을 발견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유미, 그리고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의 재하의 얼굴을 찬찬히 돌아본다.
이내, 금발 미녀의 얼굴에 핏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으으…….”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피가 뚝뚝 묻어 나올 것마냥 새빨갛게 변해서는, 수치심 때문인지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친 듯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귀곡성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뭐야?”
“엄마, 깜짝이야!”
놀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사정을 아는 어른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여자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엄청난 고난이도의 마법을 펼치더니 공간을 가르고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다.
“…….”
정적이 찾아왔다.
그 침묵 속에서 세라스와 한서리의 눈이 부딪혔다.
한서리는 어서 가보라는 것처럼 세라스에게 턱짓을 했다. 세라스는 절대로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으르렁.
한서리가 눈빛을 위협을 했다.
오늘 내가, 챔피언 벨트까지 딴 날인데, 고생을 사서 해야 하냐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그러자 세라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 벨트를 따게 도와준 것이 나니까, 오늘은 네가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손짓을 보냈다.
의견이 합치되지 않고 길항한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다가, 이내 가운데에 선 김건을 눈짓했다.
세라스가 돌아온 이후로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해 오던 예의 그것을 하라는 것이었다.
김건이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주먹을 꺼냈다.
그는 꽉 쥔 주먹을 두 사람의 앞에 들어 보였다.
한서리가 입술을 끔뻑였다.
‘앞면.’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는 뒷면.’
서로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김건이 손을 펼쳤다.
그의 손 안에 숨어 있던 동전은, 정확히 앞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좋았어!”
“빌어먹을.”
각각의 환호와 욕설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
세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앞으로 그녀는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주제에 무게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주책맞은 언니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자기 나이의 백 분의 일도 안 되는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다가 정신이 들었으니, 지금 그 상태가 어떨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깊게 한숨을 쉬는 세라스.
하지만 이미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알리시아가 남긴 공간 주소를 추적해 순간이동을 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