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00화 (200/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200화

외전 39화 우리 엄마는 한량 (23)

그날 이후로, 알리시아는 한서리의 집에 오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어디 간 거야? 저번에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는 뭐고?”

처음에는 그렇게 싫어하더니 막상 동생처럼 굴던 아이가 없어지자 서운해진 모양이다. 유미가 그렇게 물었지만 한서리와 세라스는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데려갔어. 아마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눈치가 좋은 아이들이다.

유미도, 재하도 그 말 속에 무언가 비밀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뒤 유미와의 내기에 이겨 무려 한 달 동안의 김건 독점권을 얻은 한서리는 바로 두 사람만의 여행을 계획했다.

일정을 짜고, 필요한 준비물 등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그녀는 오랜만에 게임 폐인으로 돌아가 방안에 틀어박혔다.

유미는 대회에서의 패배로 나탈리아에게 특훈을 받기 위해 끌려갔고, 김건은 휴식계를 반납하고 학교로의 복귀를 위해 준비를 시작해서 바빴다.

가족들이 모두 각자의 일로 바쁘다.

그동한 재하는 비교적 심심한 나날을 보냈다.

세라스와 약속을 한 그 뒤로, 그는 계속해서 영웅 육성 전문 학교로의 전학을 부모님과 학교에 요청했지만 아무래도 이런저런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전학을 가기 전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는 딱히 초조해 하지 않고 조용히 일상을 지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최근에 떠오른 근심거리는 있었다.

“……제기랄.”

그날도, 그는 새벽에 눈을 뜨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몇달 전, 세라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그는 어쩐 일인지 항상 이맘때면 눈이 뜨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마냥 거실을 서성이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다시금 잠이 든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재하는 방을 빠져나갔다.

어쩌면 오늘은 나와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기대심이 고개를 쳐들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날, 술을 마시던 세라스와 대화를 나눈 이후에도 그녀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눈 적은 있지만 재하에게는 어쩐지 세라스가 그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못된 습관을 더욱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오늘, 오늘까지만이야. 내일부터는 중간에 깨도 그냥 잘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거실로 나온 재하. 그리고 그는 마침 외출복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온 세라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세라스는 씩 웃었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세라스는 맨처음 그녀를 봤을 때 입었던 기다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별다른 짐은 없어 보이지만 그런 것은 모두 그녀가 갖고 다니는 공간 틈새의 주머니에 들어 있을 것이다. 재하는 어쩐지 조금 냉랭해 보이는 세라스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무슨 일로 이 새벽에 밖을 빠져나왔는지 금세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가시는 건가요?”

세라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슴이 따끔거린다. 재하는 그것이 섭섭하다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엄마나, 아빠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시지…… “

“됐어.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뭘.”

세라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라지는 게 나한테 어울려. 그리고 딱히…… 작별 인사 같은 거 나누고 싶지도 않고.”

그 말 속에서 무언가를 눈치챈 모양이다. 재하가 조금 뾰족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

세라스는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망설이고 있을 때, 재하가 먼저 말했다.

“지금 가면,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요?”

세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조금 오래 걸릴 수는 있어.”

“얼마나 걸리는데요? 십 년? 이십 년?”

“그건 말로 하기 힘드네. 어떻게 될지 몰라서.”

세라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보니 과분한 역할을 맡게 되어서 말이야. 아무래도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지.”

“과분한 역할…….”

재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때 말하던 관리자, 라는 건가요?”

“……눈치가 좋구나.”

세라스가 옅은 숨을 흘린다.

재하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다 말해 줄 수는 없고, 그냥 누가 사고를 치면 수습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돼. 조금 스케일이 큰 일도 건드리곤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군요.”

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면, 제 쪽에서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는 형형한 눈으로 세라스를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반드시, 세라스 씨보다도 강한 사람이 되어서 찾아갈게요.”

“…….”

“그러면, 그때 말해 주세요. 제가 세라스 씨의 목표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었는지, 아닌지.”

세라스는 재하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본인도 제대로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재하는 진심이었다.

그토록 진심이 담긴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 어쩐지 기대심이 생겼다.

그렇기에, 세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녀는 그러면서 재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잘 있으렴. 만약 나를 찾고 싶으면, 네 엄마한테 물어보면 될 거야.”

인사를 마친 세라스가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재하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뭔데?”

황금색 눈이 다시금 재하를 향했다. 재하는 한번 침을 삼키고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책의 세라스는…… 실제로 있었던 사람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고 했어요. 한때 발할라에서 영웅으로 지냈고, 특무대에서도 굉장한 활약을 했었던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뭔지 아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세라스 프레이저라는 사람이래요.”

“……흠. 그래?”

세라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재하가 물었다.

“혹시, 세라스 씨가, 그 원본이 되는 사람이 아닌가요?”

“…….”

그다음에는 말이 없다. 세라스는 조용히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더니, 문득 미소를 지으며 재하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금발이 사르르 쏟아져 내리고,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눈이 점차 커진다.

붉은 입술이 똑바로 보였다. 재하는 새하얀 얼굴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긴장해서 몸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세라스는, 잔뜩 긴장해 있는 재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 대답은, 네가 나중에 나를 찾아오게 되면 알려 줄게.”

옅은 한숨만을 남기며 세라스가 재하에게 멀어진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그를 향해 윙크를 해 보였다.

“안녕.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을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해 보이곤,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공간을 찢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황금빛 빛줄기만 남기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

재하는 그녀가 남아 있던 자리를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이내 직접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침대에 눕자, 어쩐 일인지 마음이 편해져서 그는 금세 잠에 빠져들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재하는 습관적으로 그의 불사조인 파랑을 소환했다.

그는 유미처럼 낮이고 밤이고 자신의 불사조를 끌어안고 다니지 않았다.

그저 아침 저녁이면 녀석을 불러 아직 뒤뚱뒤뚱 걷는 녀석의 상태를 확인하고, 쓰다듬어 주면서 혼잣말을 하듯 그날 있을 일과나, 있었던 일을 말하며 놀아 주는 것이 그의 일과였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파랑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파랑? 어디 갔어?”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무슨 일인지 창 밖에서 후드득 날개를 퍼득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직감한 재하가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집의 마당에 서 있는 나무.

그 나뭇가지의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 새를.

“…….”

그것은 아기새 따위가 아니었다.

부리부리한 눈. 뾰족한 부리는 마치 한 마리 송골매를 닮았다. 하지만 그것의 전신에는 푸른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근엄한 표정의 녀석이 이쪽을 쳐다본다. 재하가 손짓하자 녀석은 가볍게 날아올라 재하의 어깨 위에 앉았다.

재하는 놀란 눈으로 파랑을 바라보았다.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괜찮으냐, 그런 말이 떠올랐지만 파랑은 그저 고개를 까딱이며 부리로 문밖을 가리켰다.

재하에게, 그 동작은 마치 잔말 말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것처럼 들렸다.

재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움직여야지.

그 사람을 따라잡으려면,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때마침, 바깥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하야! 일어나야지! 오늘부터 영웅 육성반으로 옮기게 된다며!”

“금방 갈게요!”

그렇게 외치며, 재하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 *

한서리 가족이 자주 가는 집 근처의 디저트 가게.

거기에 한서리는 그녀의 고정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맞은편에 앉은 것은 그녀의 가족이 아니라 붉은 머리를 한, 사나워 보이는 여자였다.

앤 슐츠는 정돈되지 않은 붉은 단발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하여튼, 오늘 온 거는 아줌마가 금방 은퇴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거야.”

그녀는 그러면서 여기 맛있네 하고 파르페를 퍽퍽 떠먹었다.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초에 세계 챔피언 벨트를 따는 게 목표였으니까. 굳이 방어전을 더 하면서 지킬 필요는 없지.”

파르페를 떠먹던 앤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한서리를 흘겨 보며 말했다.

“그러지 마. 딱히 실력이 줄은 것도 아니고, 아직 현역이잖아?”

그 새침한 시선에 한서리는 미소를 지었다.

“아,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체력이 좀 딸리네.”

“헛소리 하지 마. 풀 라운드를 그렇게 펄펄 뛰는 인간이.”

앤이 완전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똑바로 한서리를 노려보았다.

“딱 한 번. 딱 한 번만 더 붙어 보자. 아줌마가 벨트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도전할 테니까.”

“아줌마?”

“아이, 언니~ 그러지 말고. 응?”

대사 자체는 애교가 있는데 말투만 들으면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응어리진 앤의 목소리에 한서리가 킥 웃었다.

“너 개 약하잖아. 내가 왜 너 같은 애랑 싸우는 걸 기다려 줘야 하는데?”

“…….”

거기까지 듣자, 앤은 울화통이 터지려는지 이를 벅벅 갈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끙끙거리면서 말을 고르다가, 이내 성질이 올랐는지 수저를 집어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어쨌든, 기다려! 다시 한번 싸울 때까지 벨트 반납하지 말고. 다음번에는 반드시 개박살을 내 줄 테니까!”

그렇게 빽 소리를 치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한서리는 가게를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흐음, 건방진 줄만 알았더니, 제법 귀여운 면이 있잖아.”

그녀는 그러면서 천천히 자기 몫의 디저트를 다 먹어치웠다. 그러곤 언제나 그녀의 가족들을 맞이해 주는 이웃인 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려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리?”

지금의 한서리는 한시민이다.

몇몇의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 심지어는 그녀의 아이들도 그녀와 남편의 본명을 몰랐다.

한서리는 깔끔하게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발을 옮겼다. 그러자, 뒤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하지 마. 네가 한서리인건 알고 있으니까.”

그제야, 한서리의 발이 멈춘다. 그녀는 짜증이 드러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한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후반쯤 되었을까,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파랏 브릿지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여자가 웃었다.

“오랜만이네.”

그 얼굴을 본 한서리의 이마가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빈대 붙을 생각으로 온 거면 꺼져. 네 얼굴 따위,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네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한번 만나 보고 싶었을 뿐이지.”

그렇게 말하며 한서리의 언니, 한서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한서리가 물었다.

“TV에서 보고 안 거야?”

한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에는 몰라봤어. 이름도 다르고, 생긴것도 아예 달랐으니까. 하지만…… 네 표정이랑 행동거지가…… 딱 너를 떠올리게 하더라. 그리고 네가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네 딸 사진을 어쩌다가 봤는데…… 네 어린 시절이랑 너무 똑같이 닮았더라고. 그래서 확신했지.”

선수가 되면 TV에 방영이 되니,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한서리는 하아,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만나서 어쩌려고? 당신들은 내 가족이 아니야. 그때 나한테 했던 일을 잊지는 않았겠지?”

과거, 선계의 침략으로 한서리가 화신이고, 그녀가 인류의 적으로 낙인 찍혔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집안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완전히 한서리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그녀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공개해 버렸다.

심지어는 화신인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 지구 방위군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것이 한서리에게 큰 위험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정신적인 상처를 남긴것도 아니다.

상처라면, 이미 회귀하기 전에 모두 받아 버렸으니까.

하지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 행동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서연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행동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고 싶지만…… 변명은 안 되겠지. 네 입장에서는 방조한 것도 그것과 별다를 바 없을 테니까.”

“그래, 그걸 알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왜, 어디서 무슨 갚지 못할 빚이라도 졌어?”

날선 어조로 말하는 한서리.

그동안 김건과 아이들, 그리고 친구들과 지내며 많이 둥글어진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도, 자신을 버린 가족들에게는 서슬 퍼런 날을 들이댔다.

한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 그냥 오랜만에 너를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야.”

“언니 행세할 생각하지 마. 그냥 역겨울 뿐…….”

말을 잇던 한서리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후, 한숨을 쉬더니 말을 뱉었다.

“그래, 확인했지? 난 잘 지내니까, 이만 가. 그리고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어.”

“……그래, 알았어. 건강한 건 봤으니 이만 가 볼게.”

한서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한서리는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한서연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불게.”

“…….”

멈춰 있는 한서리. 한서연은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지금은, 행복하니?”

한서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행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 말을 듣고서야, 한서연은 처음으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미련은 그것이 끝이었던 모양이다.

한서연은 제 갈길을 가는 한서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있으렴.”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그녀는 한서리와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 * *

“그래서, 어떻게 했어?”

한서리와 거닐던 김건이 옆에서 물었다. 한서리는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어떻게하긴 뭘 어떻게 해. 뒤를 캐서 조사해 봤지.”

그녀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그래도 애도 낳고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더라. 아버지란 작자는 내가 당신을 되살리려고 선계를 돌아다닐 때 뻘짓 하다가 악마들이랑 엮어서 죽은 것 같고.”

“어머니는?”

“잘 살고 있어. 아주 뻔뻔할 정도로 말이야.”

“아버지 일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나머지 분들은 잘 있다니 다행이네.”

“흥, 다행은.”

한서리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김건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차가운 척을 해도 뒤에서 모든 상황을 다 알아보았다는 것은 이미 아내가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의 아내였다면, 그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으리라.

그것은 아내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증거였다.

그런 아내의 변모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김건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나저나, 이곳 하늘은 정말 멋지네.”

그렇게 올려다본 하늘 위.

그곳에는 끝도 없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별이 장막마냥 하늘 전체를 덮고 있고, 푸르고 보랏빛의 광원이 기이한 색을 그려 냈다.

광원이 가득한 지구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모습.

그곳은, 지구가 아닌 다른 선계의 하늘이었다.

한서리는 웃었다.

“멋있지?”

“그래.”

“당신도 본 적 있어. 내가 보여 줬거든. 예전에.”

의식을 잃은 김건을 되찾기 위해 선계를 여행할 때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김건은 웃으면서 한서리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래, 고마워.”

두 사람은 선계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애초에 두 사람은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차원을 찢고 나갈 수 있는 기린의 주인격 앞에서 인간들의 법도를 들이미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지금 그들이 거닐고 있는 선계는 굉장히 평화로운 곳이었다.

유목 생활을 하는 소수의 원주민들. 그리고 그들이 키우는 생명체가 들판을 한가득 메울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얀 털에, 조그만 머리와 네 다리만 뽈록 튀어나온 귀여운 생명체는 마치 구름에 다리가 달려서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얍.”

문득 호기심이 동한 한서리가 불쑥 손을 뻗어서 발치를 돌아다니는 한 마리를 붙잡았다.

녀석은 끽끽 소리를 내며 바동거렸지만 한서리의 억센 손아귀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어.”

목덜미를 꽉 쥐며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겁을 먹었는지 금세 얌전해졌다.

한서리는 보들보들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샐쭉해진 한서리가 물었다.

“왜 웃어?”

“아니, 그래도 선수 생활을 하면서 많이 터프해진 것 같아서.”

“흥. 난 원래 터프했어.”

그렇게 말은 하지만 남편의 말이 맞았다. 예전의 그 비리비리한 몸이었으면 지금 이렇게 강제로 녀석을 붙들어 놓을 수 없었을 테니까.

한서리는 보드라운 털을 조금 더 만지작거리다가 놈을 놓아 주았다.

녀석은 한서리의 구속이 풀리자, 짧은 다리를 움직여 호다닥 무리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한서리는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는 삐딱한 시선으로 김건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모습의 나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그 소리를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다.

김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몇 번이나 대답해 줬는데 계속 물어보는 이유가 뭐야?”

“당신이 항상 좋은 말만 하니까, 긴가민가해서 그렇지.”

“그거야. 항상 좋은 말밖에 할 수 없으니까.”

김건이 손을 뻗는다. 그녀는 아내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선계에 나온 한서리는 오랜만에 본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게 빛나는 물빛의 머리, 그리고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눈망울.

변장을 위해 뒤틀어 놓은 이목구비의 위치를 되돌려 놓은 원래의 얼굴은 그야말로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최근, 운동을 하느라 허리까지 흘러내리던 머리도 어깨 높이로 짧게 자르고, 살도 조금은 탔지만 아름다움의 방향성이 달라졌을 뿐,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대단했다.

김건은 아내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유미가 이 모습을 보면 당신한테 함부로 이야기 못할 텐데 말이야.”

“아닐걸, 이 정도 얼굴에 쫄면 내 딸이 아니지.”

“그런가?”

킥, 웃으면서 김건이 한서리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계속해서 선계의 초원을 걸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깜깜한 어둠이 장막처럼 깔렸다. 한서리가 마법을 이용해 피워 올린 조명을 앞에 두고 작은 풀이 사박사박 밟히는 초원을 걷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고즈넉한 분위기가 흘렀다.

산책을 하던 두 사람은 마침 앉기 좋은 그루터기를 발견해 그곳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어깨를 맞댄 채 나란히 앉아 은하수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주변은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웠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수풀의 소리, 벌레의 소리. 그것은 지구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달라서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한서리가 불쑥 말했다.

“언니가, 나한테 묻더라.”

“뭐라고?”

“지금은 행복하냐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

“당연히 행복하다고 했지.”

김건은 살짝 눈을 깔아 아내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는 여유로운 미소로 웃고 있는 한서리를 발견했다.

“아이들도 잘 크고, 당신도 건강하니까 행복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던 한서리가 문득, 김건의 손을 잡았다.

“오히려, 난 다른게 걱정이야.”

그녀는 깍지 낀 손을 꽉 조이면서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당신은…… 행복해?”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하는 평범한 삶.

그것이야말로 한서리가 원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한서리와 달리, 그녀의 남편은 커다란 것을 버렸다.

김건은 평생을 무술에 바쳤고, 평생을 무기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정체성을 빼앗은 것은, 바로 한서리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불안했다.

혹시나, 남편이 남편이 지금의 삶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될까.

때로는 그것이 두려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건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지.”

“거짓말 아니지?”

새침하게 눈을 치켜뜨며 이쪽을 올려다보는 아내의 모습에 김건이 피식 웃는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불안하기도 했어. 평생 칼밥만 먹고 살아온 내가 제대로 된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나 걱정이 됐거든.”

“…….”

“그런데 막상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것저것 하기 시작하니까…… 의외로 아무런 생각도 안들고 적응이 되더라. 애들 키우다 보니까 새롭게 깨달은 것도 있고.”

“깨달은 거?”

김건이 한숨을 들이켰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무술을 익혔던 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아빠 노릇을 하다 보니까 안 거야. 지킨다는 행위가, 꼭 물리적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는 거라는 걸.”

고개를 숙인 김건이 아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아이들을 키워 온 과거를 회상했다.

“내가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모습을 보여 주며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게 아이들의 앞날을 지키는 거지.”

고개를 돌린 그가 한서리의 머리에 키스를 했다.

“이렇게 당신에게 입을 맞춰 주고, 상냥한 말을 해 주며 보듬어 주는 게 당신의 마음을 지키는 거야.”

“당신…….”

“그렇게 생각하니까, 전혀 불안해지지 않더라고. 여전히 이 세상에는 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한서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살짝 몸을 떨어트려서는, 김건의 어깨를 톡 두들겼다.

“당신, 정말 바보네.”

“왜?”

“당신은 있어야 할 이유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 살아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의 나를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했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김건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으로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

“그래, 알았어.”

그렇게 두 사람은,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까맣게 멀어져 있는 초원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김건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 여행이 끝나면 계속 격투기 선수, 할 거야?”

한서리는 웃었다.

“앤의 부탁도 있고 하니까…… 조금만 더 해 보려고.”

그녀는 그러면서 단련된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뭐, 막무가내로 시작한 거지만 좋았어.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까. 당신도 좋았지? 내 새로운 모습을 많이 구경했잖아.”

“……좋긴 했지.”

“이건 부끄러워할 만하네. 최근에는 평소의 배는 더 하는 거 같으니까.”

“…….”

대체 그런 말은 왜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김건.

한서리는 그런 남편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킬킬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한테 제안해 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하고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는 김건. 그런 남편에게, 한서리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장난기 넘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도, 뭔가 새로운 걸 해 보지 않을래?”

당신의 새로운 모습. 나도 보고 싶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나가기 위해, 남편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외전 완결)

K2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