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다.
처음으로 여자 사람에게 선물한 물건이 치실이라니 내 인생도 참으로 기구하다.
지금까지는 삶이 너무 힘들다보니 연애는커녕 제대로 된 취미 하나도 가져보지 못했다. 유일한 취미는 잠자기.
돈도 안 들면서 체력보충도 가능한 최고의 취미이다. 학생 때는 수업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다 보니, 집에 오면 거의 새벽 2시 정도가 되었다.
레포트가 있는 날이면 날을 꼬박 세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항상 만성 피로에 시달리고, 오히려 수업에 집중하기가 힘든 악순환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잠을 자는 게 유일한 취미이자 생존 전략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취미가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바로 렉오 블록 위에서 잠자기다. 렉오 블록 위에서 뒹굴 거리다 보면 아늑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냐면 내 얼굴에 난 렉오 블록 자국이 왜 생겼냐는 김상구 pd님의 물음에 대해 대답을 하려다보니 그런 거다.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얼굴에 그게 도대체 뭔가요? 그것도 컨셉입니까?”
“아.. 그게 이건 제 취미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죄송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할머니를 업어주고 얻은 [병뚜껑 튕기기의 달인]이라는 재능을 촬영하기 위해서 준비 중이었다.
안 그래도 처음으로 소속사와 함께 하는 촬영이라서 긴장되기도 했는데, 내 얼굴을 확인한 pd님의 물음에 거울을 본 나는 멘붕 상태가 되었다.
어차피 촬영 복장은 츄리닝이어서, 메이크업만 받는 걸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데, 내 얼굴에 큼지막한 렉오 블록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카메라와 조명은 셋팅을 시작하고 있어서 촬영을 미루자고 하기도 미안했다.
“그냥 얼굴에 스티커 같은 거 붙이고 할까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생각한 방법을 pd님께 제안했다.
“음..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촬영 장비들을 설치하는 동안에 메이크업을 받았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메이크업에 뭔가 굉장히 부끄럽기도 하고, 진짜 연예인이 된 것 같은 우쭐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뭔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듯한 기분도 들었다.
“너무 과하게 하신 거 아닌가요?”
“이 정도는 해야 조명에 비췄을 때 예쁘게 나와요. 그래도 피부가 깨끗하셔서 최대한 얇게 한 거예요.”
얇게 한 게 이정도면 본격적으로 하면 엄청 나겠네. 얼굴이 무거워서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할 수 도 있겠다.
“안녕하세요! 힐링님. 김신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 엄청 팬이에요! 저는 성혜미라고 해요. 탄산 코로 먹는 거 따라하다가 울었어요. 헹”
오늘 촬영은 남자 신인 배우 한 명과 여자 아이돌 연습생 한 명이 같이 촬영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연습생 분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따라 하신 걸까?
“안녕하세요. 천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천운오빠 동생 천송이라고 해요. 그런데, 엄청 잘 생기셨네요. 신우 배우님 옆에 우리 오빠 있으니까 오징어 같아요. 오빠! 오늘은 오징어로 변신하는 거야?”
“어. 그래. 변신이 잘 됐나 모르겠네. 어? 너도 꼴뚜기로 변한거니?”
송이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신우씨와 혜미씨가 웃고 있었다.
“제가 원래 안 그러는데, 그렇지 오빠?”
내 옆구리를 강하게 찔러대는 송이가 대답을 강요했다.
“오늘 무슨 촬영인지는 알고 오신 거죠?”
“탄산을 코로 먹는 거 아닌가요? 헤헤”
“그럼 혜미씨는 코로 탄산 드시고, 저랑 신우씨는 병뚜껑 튕기기 게임 하시죠.”
“하하하하. 네. 열심히 연습하고 왔습니다.”
“저도 어제 연습실에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성혜미가 오른손을 들며 말을 하였다. 천생 아이돌 체질인지 모든 행동이 애교스러웠다. 우리 송이도 어렸을 때는 저렇게 귀여웠었는데.
“뭘 봐? 내가 그렇게 이뻐?”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자. 촬영 시작합니다. 다들 준비해주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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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힐링입니다. 오늘은 병뚜껑 튕기기 게임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하면 재미가 없어서 게스트를 두 분 모셨습니다. 들어 오세요~”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김신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오~. 연습생 17살 성혜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김신우 배우님은 [너와 오늘을]이라는 영화로 데뷔를 하셨습니다.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하셨죠?”
“제가 알아요! 제가 말하고 싶어요!!”
“네. 그럼 성혜미씨가 이야기를 해보실까요?”
“네!! 감사합니다. 거기에서 주인공의 동생으로 나왔습니다. 연예인하고 싶다고 주인공인 형의 방 보증금을 몰래 훔쳐 달아난 철없는 동생이요!”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혜미씨가 이야기해주신 철없는 동생역으로 나온 김신우입니다.”
“그거 신우님의 실제 이야기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신가요?”
“어머! 신우 오빠 진짜에요? 와! 어쩐지 연기가 리얼하다더니... 어서 돈 갚으세요!”
“네? 아니. 저는 형이 없는데요.. 하하하.”
갑작스러운 내 멘트에 살짝 당황하는 신우이다.
“그럼 혜미씨는 연습생 생활을 얼마나 하신 거죠?”
“저는 이제 1년 됐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하하. 응원하겠습니다. 자. 오늘 하기로 한 게임을 한 번 해볼까요? 다들 무슨 게임인지는 알고 오신 거죠?”
“넵! 병뚜껑을 튕겨서 탁자 끝부분에 가장 가깝게 붙이면 이기는 게임입니다!”
성혜미가 씩씩하게 게임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저도 어제 열심히 연습하고 왔습니다.”
“네. 그런데! 그냥 게임만 하면 재미가 없으니 벌칙이 있어야겠죠?”
“네?”
벌칙에 대해서는 말을 듣고 오지 못한 두 사람이 정말로 당황하였다.
“벌칙은 바로! 얼굴에 낙서하기!”
“우~~~~”
김신우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고, 성혜미만이 열심히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주 유명해지면 두고두고 자료화면 될 영상이니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너무 불리한 거 아닌가요? 힐링님한테 패널티를 주세요!”
성혜미가 당차게 요구를 하고, 김신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했다.
“음..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여러분은 탁자에서 하시고, 저는 봉 위에서 해보겠습니다.”
미리 준비해둔 청소용 걸레자루를 가지고 왔다.
“여기서 하신다구요? 말도 안 돼!”
어색해하며 멘트도 못하던 김신우가 놀라서 소리쳤다.
“예쓰!!! 무르기 없기에요! 신우오빠 조용히 좀 해요! 오늘 힐링님 캡쳐각이닷!!”
성혜미가 기쁨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완전 아저씨 막춤이네.
“그게 끝이 아닙니다. 눈도 가리고 하겠습니다. 이정도면 불만은 없으시겠죠?”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기서 눈까지 가리고....아얏!”
성혜미가 얼른 김신우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김신우가 놀라서 성혜미를 바라보니, 성혜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에 올리고, ‘쉿!!’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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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저는 배우인데, 어떻게 안 될까요?”
“배우는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안 돼요!!”
나의 신기와 같은 힘 조절에 김신우와 성혜미뿐만 아니라, 촬영팀까지 감탄하였다.
그리고, 둘의 얼굴에는 내가 그린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김신우는 두 눈을 검정색으로 그려 판다로 변신을 시켜주었고, 성혜미는 진한 구레나룻 수염을 그려주었다. 김신우는 완전히 울상이 되었고, 성혜미는 은근히 수염을 마음에 들어 했다.
“오늘 촬영 수고가 많았어요. 항상 혼자 촬영했었는데 같이 하니까 재미있었어요.”
“형님. 이제 말 편하게 해주세요.”
“네! 맞아요. 오빠. 저한테도 편하게 해주세요!”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그래.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
“어디 가서 이제 친한 사이라고 자랑해도 되죠? 사진도 찍어도 되나요?”
연예인들이 나하고 친분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평생 연예인들과 마주칠 일조차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연예인 동생들이 생기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사진까지 같이 찍어주었다. 코로 탄산 먹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김신우는 연신 감탄하고 있었고, 성혜미는 자신도 따라하려고 해서 겨우 말렸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서 촬영하자. 수고들 했어. 그리고 이건 수고해서 주는 용돈이니까 맛있는 거 사먹고.”
내가 내민 봉투를 보며 김신우가 당황을 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오히려 저희가 홍보가 되었는데요. 돈은 저희가 드려야할 것 같은데요.”
“어.. 저는 이번 달 용돈이 다 떨어져서요. 다음 달에 드릴게요..”
“무슨 소리야. 촬영을 했으면 출연료를 받아야지. 그냥 동생들 용돈 준다는 마음으로 주는 거니까 받아. 내가 동생들 용돈하나 못주겠니?”
“오빠.. 고맙습니다. 힝.”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 신우는 언제 술 한잔 하자.”
“네. 그럼요.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오빠 저도요!!”
“미성년자는 우유나 드시죠.”
“나도 먹고 싶은데.. 힝..”
사람들과 북적거리며 어울리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어색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재미있었다.
이런 경험은 태어나 처음이다.
항상 혼자 공부하거나, 동생과만 같이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과 있어본 건 대학 조별 과제를 할 때였다. 그때는 정말 짜증나는 경험뿐이었지만, 오늘은 설렘과 충만한 감정이 느껴졌다.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구나. 정말 좋다.’
촬영을 도와준 스태프들에게도 조용히 회식비를 지원해드렸다. 김상구 pd님 모르게. 직장인들은 상사와 같이 회식하면 불편해 한다고 들어서 몰래 드렸다.
당연히 스태프들은 너무나 기뻐했고, 김상구 pd님만 아무것도 모른 채 같이 웃을 뿐이었다.
“천송이! 이제 가자! 뭐해?”
저쪽 구석에서 김신우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천송이가 수상했다. 조용히 다가가니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그럼 박모겸 배우님하고 친하다고 하셨으니까 두 분이 있을 때 영상통화 꼭 해요! 호호호호”
“아...네. 하하하하...”
“야! 천송이. 너 신우 괴롭히지 말고 이리 안와?”
“뭐.. 뭘? 내가 언제 괴롭혀?”
“신우야 천송이 전화번호 지워버려. 그럼 영상통화도 못하겠지.”
“하하하 네!? 하..하..하..”
내 뒤에서 도끼눈으로 천송이가 노려본다. 자기 전화번호를 지우면 너도 세상에서 지워질 각오를 하라는 무언의 협박 같다.
“신우야. 우리는 간다. 나중에 시간 될 때 연락해. 술 한잔 사줄게.”
“네. 형님. 오늘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뭔가 허전했다. 천송이는 친구 만난다고 떠났고, 나는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북적이며 있다가 혼자서 집으로 향하다보니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허전함이 몰려왔다.
너무 삶이 힘들다보니 반은 의도적이고, 반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그런데, 그런 돈 조차도 나는 아까웠다. 그 돈이면 우리 송이 신발도 사줄 수 있었고, 용돈도 조금 더 줄 수 있었다.
‘이제는 친구를 사귀어도 괜찮겠지?’
친구를 사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돈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귀고 싶다.
서로 사는 이야기도 하고, 상대방의 힘든 이야기도 들어주고 싶다.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다.